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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84화 (84/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5화.

커다랗고 호기심 어린 앤시아의 녹안과 흥미로워하는 황태자의 적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리샤르는 영문 모를 불쾌감이 일었다.

황태자 카일루스의 거짓 미소가 점점 옅어지더니 이내 눈꼬리까지 접히며 진심이 섞여 들었다.

“역시 문서로만 접해서는 진정한 가치를 알기 힘들지.”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유지한 채 카일루스가 느긋하게 다가섰다.

“성인식도 치르기 전에 끌려왔다지? 이리 작고 사랑스러운 줄 알았다면 좀 더 배려하라 전할 걸 그랬어.”

언뜻 상냥하게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 든 뜻은 오만한 지배자였다.

앤시아 랜피스는 문서상으로 보았을 때 그윈티드 공작가의 기세를 죽이기에 적합했다. 귀족이긴 하지만 한미한 가문 출신. 공작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쓸모없는 여인.

이제는 앤시아 그윈티드가 된 그녀는 예상과 달리 그 외형에서부터 가치가 있었다.

만약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황성에 방문했다면 그녀의 가문이나 가치보다 저 외모에 치중했을 이들이 상당했을 터. 대부분의미혼 영식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영리하기까지 했다. 북부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마수를 그윈티드 공작이 어찌 처리하나 지켜보았더니 마수 토벌 대회를 주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생각이 공작 부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제법 놀랐다. 이런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대범함과 추진력도 가지고 있다니, 참으로 의외였다.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여인의 외형을 가졌으나 머리는 제법 비상한 앤시아에 대한 평가가 황태자의 머릿속에서 수직 상승했다.

그래 봤자 지금은 그윈티드 공작 부인이지만.

“아쉽게 됐단 말이지.”

와. 지금 황태자가 나 꼬시는거 맞지? 날 좋아하는 건 아닐 텐데? 아, 그냥 품절된 물건을 보는 아쉬움 정도인가?’

대놓고 눈웃음치며 앤시아에게 수작을 부리는 카일루스의 태도에 리샤르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톡.

다시 앤시아의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다행히 리샤르는 진정 할 수 있었다. 기세를 누른 리샤르는 카일루스에게 덤덤히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용건만 말하고 꺼져.

눈으로만 욕하는 리샤르는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앤시아는 그를 온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러다 황태자와 눈이 마주친 앤시아가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카일루스의 금발이 가볍게 흔들리며, 적안을 품은 수려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간 북부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려 면밀히 살펴볼까 하네.”

“보고서를 원하시는 만큼 상세하게 써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북부에서 열리는 축제에 관심도 생겼고 말이지. 그윈티드 영지에서 축제가 사라진 지 몇 년 째인지 가물가물하군.”

전달하지 않은 축제에 대한 소식을 언급하는 카일루스에게 리샤르는 한 수 접어야 했다.

“급하게 추진하다 보니 보고가 늦었습니다. 어차피 저희 영지에서만 치르는 작은 축제인지라.”

“작다기에 오는 길에 마주친 용병들이 상당하더군. 그윈티드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는 건 아닌지 오해할 만큼.”

황가가 가장 경계하는 내용이 평온한 말투로 툭 튀어나왔다.

이건 그냥 넘기면 안 될 일이었기에 앤시아가 눈치 없는 척 사르르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태자 전하, 이번 축제는 제가 낸 의견이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난 아무것도 몰라. 세상 물정도 몰라.

그러니 대화에 끼어든 건 일부러도 아니고, 목숨을 내놓고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건 알아주겠지.

수줍고도 화사한 웃음과 함께 앤시아가 꺼낸 한마디에 카일루스의 관심이 쏠렸다.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군.”

“물론입니다. 그럼 회의실로 가시겠습니까?”

리샤르가 급히 앤시아에게 못박힌 카일루스의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침착하지 못한 리샤르의 행동이 카일루스의 흥미를 부추겼다.

“아니. 본인에게서 듣고 싶군.”

“전 아이디어만 냈을 뿐, 모든건 저희 남편이 알고 있답니다.”

사르르 웃으며 리샤르의 팔을 콩 두드리자 돌처럼 단단해진 팔뚝이 그의 긴장 상태를 나타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긴장하나 싶을 만큼 리샤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앤시아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카일루스는 짐짓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흠, 피곤해서 일단 쉬고 싶군.

먼 길 온 손님에게 머물 곳도 내주지 않는 건가?”

먼 길은 무슨. 황궁 내부에 있는 게이트에 훌쩍 올라타 북부 게이트에서 이곳까지 느릿느릿한두 시간 만에 도착해 놓고선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따지고 들 수는 없었기에 리샤르는 짜증을 무심함으로 감춘 채 카일루스를 안내하려 했다.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닐세. 영지 축제로 바쁠 텐데 영주인 공작을 아랫사람 부리 듯 할 수는 없지.”

자각은 있구나.

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카일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이런 일은 안주인에게 부탁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부인의 몸이 약해 전하를 모시기에 부족합니다.”

오, 리샤르도 제법 눈치가 있네.

앤시아를 편들기보다 부족함을 알려 카일루스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그러나 카일루스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더욱 손을 앤시아 쪽으로 내밀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몸이 약한 공작 부인을 고생시켰나 보군. 부인을 방까지 에스코트할 영광을 내게 주겠나?”

리샤르와 앤시아에게 동시에 묻는 말이었다.

리샤르에게서 날 선 반응이 튀어나오기 전, 앤시아가 먼저 살짝 몸을 틀며 손등으로 뺨을 가렸다.

“감히 황태자 전하께 손이 닿는 영광을 사사로이 누릴 수는 없어요. 지금도 부끄러워서 뺨이 달아오르는걸요.”

황족이 내민 손을 거절하는 건 불경한 일이 될 수도 있었으나 수줍어하는 여인이 부끄러움을 앞세운다면 신사적인 매너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아름다운 공작 부인의 가슴을 뛰게 했다니 오히려 영광이군.”

거절이 익숙지 않을 텐데도 카일루스는 능숙하게 손을 갈무리하며 앤시아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그때는 이 손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네.”

황태자는 지나칠 만큼 친근하게 굴었다. 아무리 봐도 앤시아에게 대놓고 들이대는 격이었다.

당연히 리샤르에게서 불편한 기색이 여실히 느껴졌으나 카일루스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 앤시아에게만 말을 걸었다.

“황실에만 납품되는 귀한 차가 있는데 기력 회복에도 좋다고 하더군. 공작 부인에게 선물할까하는데 그윈티드 공작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공작, 무척 바빠 보이는데 어서 가 보게. 내 일부러 부인에게 안내를 부탁하는 배려까지 했건만,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천연덕스러운 카일루스의 핀잔에 리샤르의 푸른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새파랗게 짙어졌다. 뻔히 보이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도록 앤시아는 그를 향해 서둘러 윙크를 해 보였다. 황태자의 아이돌 윙크보다야 못하겠지만, 앤시아의 사랑스러운 외향은 익숙지 않은 윙크조차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카일루스에게 분개하던 리샤르의 얼굴이 풀어질 만큼의 파급 효과가 있었다.

“부인, 혼자 괜찮겠소?”

“네. 여기는 걱정 마시고 어서가 보세요.”

실제로 일이 밀리기도 했고 어차피 황족을 모시기 위해 한 명이 잡혀 있어야 한다면 리샤르보다는 앤시아가 나았다. 게다가 앤시아가 상대한다면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틈도 있었다.

리샤르는 황태자의 도발을 받아 내기보다 영지를 살피고 일을 하는 편이 나았다.

밀린 업무를 보셔야 한다며 재촉하는 보좌관과 아서에 의해 리샤르는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황태자의 뒤통수를 뚫어 버릴 듯 노려보는 것을 보니, 그나마 같은 저택 안에 있다는 사실에 양보한 듯 보였다.

리샤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앤시아는 살짝 몸을 휘청이며 비앙카에게 눈짓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호위보다도 빠르게 앤시아를 부축하는 비앙카의 반응이 예상대 로라 다행이었다.

“응, 좀 어지러워서 그래. 이제 괜찮아.”

“힘드시죠? 잠도 거의 못 주무시고 한참 서 계셨으니 쓰러지시는 게 당연하죠.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황태자 앞에서도 긴장 않는 마이웨이, 비앙카다운 순발력이었다.

평민 하녀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황궁의 아름다운 미녀들을 잔뜩 봐 왔을 근위기사들의 시선이 호의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미녀와 사랑스러운 소녀의 조합에 모난 소리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러나 두 미녀를 합친 것만큼이나 빛이 나는 미모의 황태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놀랍도록 무례한 하녀에게 손님인 내가 벌을 내릴 수는 없으니 공작 부인의 현명한 답을 기대해 볼까?”

리샤르 앞에서와 달리 가벼워진 말투에 앤시아는 카일루스가 어떤 타입인지 바로 알아챘다.

다소 친근하게 굴기는 했으나 역시 황족은 황족. 귀족이 아닌 비앙카의 아름다움은 아무런 쓸모도 없기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내게 보이는 호의는 진심이 아니야. 아픈 사람에게 하녀의 잘잘못만 따지는 걸 보니 뻔하지.’

앤시아는 자신의 가벼운 시도가 보기 좋게 빗나간 후, 그 화살이 다시 저에게 향한 것에 안심했다. 자칫 비앙카를 위험하게 만들 뻔했다.

카일루스를 대할 때 다른 이들을 끌어들여선 절대 안 된다.

황태자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한 앤시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새하얗게 꾸몄기에 더욱 여려 보이는 공작 부인이 머리를 숙이자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벌이 필요하다면 제가 받겠습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던 이를 공작가에 들여 교육하지 않은 제 탓이니까요.”

“공작 부인에게 벌을 내린다라?

내가 그리 무도한 자로 보이는가?”

미인계도 통하지 않고, 귀족다운 매너도 저 멀리 집어던진 것 같은 카일루스의 대답에 앤시아는 막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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