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6화.
카일루스와의 대화는 마치 꼬투리 잡는 상사와 대화를 나누는 듯 불편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조건 ‘네, 네. 하기에는 괜스레 비앙카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아 최대한 머리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녀에게는 제가 따로 벌을 내리겠습니다. 보기에 불편하시다면 황태자 전하를 뵐 때는 동행하지 않을테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용서를 강요하는 건가, 그대는?”
‘공작 부인 소리도 안 하네? 황태자 이놈 인성 보인다, 보여.’ 속마음과 달리 앤시아는 더없이 유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태자 전하께 감히 강요하다니요. 그저 제국의 작은 태양의 햇살 같은 자애로움을 바랄 뿐입니다.”
예법은 딱히 기억나지 않지만, 최대한 허리를 숙여 보이고 필요하면 주저앉을 마음도 먹었다.
황태자의 핍박에 공작 부인이 쓰러졌다는 입소문이라도 돌라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오해라면 용서한다고 하면 되잖아. 아이고 허리야.’ 허리를 숙인 채 버티고 있자니 슬슬 진심으로 엎어져 버릴까 고민스러웠다.
“그저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야.”
“예?”
무슨 기회? 허리디스크를 얻을 기회?
맥락 없는 황태자와의 대화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공작 부인의 티타임에 초대해 준다면 기꺼이 용서하지.”
그러면서 또 아이돌 미소를 발사하는 카일루스의 느긋함이 앤시아에겐 경계심을 불러왔다.
카일루스는 권위를 내세우는 듯 하다가도 농담이라는 듯 가벼운 태도를 보이며 영문 모를 친근감을 드러냈다.
앤시아는 그런 황태자가 무척이나 귀찮고 불편했다.
머릿속으로는 즉각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함을 알면서도, 한 번 튕겨 낼 만큼.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몸이 안좋아 시일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야 내가 배려해야지.
축제가 끝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공작 부인도 차를 마시지 않겠는가?”
축제가 끝날 때까지 있겠다니 이런 민폐 손님이 어딨느냐 싶으면서도 카일루스의 꿍꿍이가 염려됐다.
게다가 저 말은 정식 티파티를 열라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차한잔하자는 의미였다. 그마저 거절하겠냐는 카일루스의 말까지쳐 낼 수는 없었다.
“자애로운 황태자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카일루스의 관심이 부담스럽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조만간 차나 마시며 탐색이나 해 두자 싶었다.
“좋네. 그럼 내가 머물 곳은 어디지?”
아까는 날 에스코트하겠다며?
‘리샤르 앞에선 그나마 내숭이었던 거냐고.’
속으로 이를 갈며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 있던 집사장에게 눈짓했다.
“고귀한 분을 모시겠습니다.”
집사장이 눈치껏 행동한 덕에 앤시아가 그 뒤를 쫓을 수 있었다. 능숙한 집사장을 따라 황태자가 머물 방으로 향하는 동안 카일루스는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의를 보이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아랫사람 대하듯 편히 굴다가 이제는 관심조차 뚝 끊어 버린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어 앤시아 역시 침묵을 지켰다. 다행히 황태자가 머물 곳은 무척 가까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장 편리한 위치의 넓은 방을 내어 줬기 때문이다.
집사장이 멈춰 서고 사용인들이 양쪽에서 문을 열기 위해 다가서 자 앤시아가 환한 웃음과 더불어 겸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급히 정리하느라 준비가 미흡하나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앤시아 자신이 모실 건 아니지만, 최대한 몸을 낮추며 예의상해야 할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보인 화려함에 앤시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저택에 이런 물건들이 있었던가?
하녀들이 고생한 흔적이 묻어나는 장식과 화려한 가구들에 이리 저리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이런. 그윈티드 공작가는 인색 하군.”
저기요? 저 주먹만 한 조명 마석이 얼마짜린지 모를 리 없을 텐데? 가구만 해도 박혀 있는 보석에 장식까지 눈 튀어나올 만큼 화려한데?
황당함에 되물을 뻔한 걸 볼을 깨물며 참았다.
“아무리 급하게 준비했다고는 하나 고작 이런 싸구려…… 후, 아니지. 북부에서만 주먹구구식으로 살아왔을 테니 귀족다운 것까지 바라면 안 될 일이지. 수고 했네.”
앤시아를 아랫사람 대하듯 치하한 카일루스가 안으로 들어가자 근위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몇몇은 주변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그 외에도 아직 한참 남은 인원이 대열을 유지한 채 앤시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집사장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앤시아가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하는데도 카일루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근위기사단장이 방 안을 철저히 살핀 후에야 카일루스는 소파에 편히 앉았다. 다른 근위기사들은 벽 쪽으로 물리고, 가까이에는 기사단장만 둔 후에야 카일루스의 고고하던 웃음이 풀어졌다.
“장미만 보다 히아신스를 보니 눈이 즐겁군. 거기에 예상보다 무척 아름다워.”
“공작 부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외형부터 마음에 드는군.
핏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깨끗한 백금발에 손이 가는 걸 참느라 혼났어.”
“마음에 드신 것치고는 전하께서 상당히 신사적이지 못하셨습니다만.”
“폴칸, 자네가 그리 눈치가 없으니 아직까지 연애 한 번 못해본 거 아닌가.”
“크흠, 그러나 공작 부인께서 불편한 기색을 몇 번이나 비치셨습니다.”
핏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깨끗한 백금발에 손이 가는 걸 참느라 혼났어.”
“마음에 드신 것치고는 전하께서 상당히 신사적이지 못하셨습니다만.”
“폴칸, 자네가 그리 눈치가 없으니 아직까지 연애 한 번 못해본 거 아닌가.”
“크흠, 그러나 공작 부인께서 불편한 기색을 몇 번이나 비치셨습니다.”
지지 않고 답하는 기사단장의 태도에도 기사들은 정면만 바라볼 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황태자인 카일루스와 기사단장폴칸은 오랜 지기로, 외부인이 없을 때면 허물없이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기가 센 듯하여 조금 죽여 둘 필요가 있어 그런 것이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은 분이 던데요. 눈물을 보이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습니다.”
“정말 자네는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연인이 생긴다 해도 걱정이군.”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제 연인 걱정보다는 잔뜩 골이 나셨을 공작 부인을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녀가 내 생각으로 속을 태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동안 마수 이상 증식 관련 서류를 확인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전하.”
충실한 기사 폴칸은 카일루스의 요구에 따라 착실히 움직였다.
앤시아는 황태자의 생각과 달리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밀려드는 서류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껏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내리는데도 하녀들조차 신경 써 주지 못할 만큼 모두가 분주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집중하던 앤시아의 방에 몇 시간 사이 핼쑥해진 집사장이 다급히 찾아왔다.
“만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모시러 왔습니다.”
“저녁은 됐어. 먹을 시간도, 식욕도 없어서.”
“황태자 전하의 방문을 축하하기 위한 만찬이라 공작 부부의 참석은 필수입니다.”
“아…… 엘리, 드레스를 골라와 줘. 비앙카는 화장 도구를 준비해 주고, 줄리, 책상 왼쪽에 있는 보고서를 대충이라도 읽어 줄래?”
“네, 마님.”
바빠 죽겠다, 정말.
만찬 때 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가면 성의 없다며 꼬투리를 잡힐수 있었다.
새로운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 역시 낮과는 다르게 한쪽으로 크게 땋아 내려 작은 꽃 모양 장식을 여러 개 달았다. 조명 아래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식사 시간을 약간은 빛내 줄지도 모른다.
어떤 의도는 상관 없었다. 앤시아는 줄리가 읽어 주는 보고서에 보류, 반려, 승인을 적당히 외쳤다. 얼굴에 닿는 화장 붓의 부드러운 감촉에 졸음이 몰려올 만큼 피곤했다.
오늘은 죽어도 제시간에 잘 테다.
아무리 바빠도 이 이상 무리하면 큰 실수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걱정은 얼마 가지 않아 현실로 일어났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앤시아는 낮설 정도로 변한 식당을 보고 당황했다.
만찬을 위해 준비된 식당에 들어서자 의자며 식기 하나하나까지 화려하게 변신한 상태였다.
리샤르는 아직 오지 않았고, 손님인 황태자는 벌써 상석에 자리했다.
이거 괜히 트집 잡히는 건 아닌가 싶어 급히 집사장을 쳐다보자 카일루스 쪽에서 답이 흘러나왔다.
“공작이라면 게이트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러 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를 기다리게 한 무례는 그대 하나뿐이라는 뜻이지.”
“송구하옵니다.”
리샤르의 부재가 카일루스의 뜻이라면 다행이었다. 저 신경 긁는 황태자를 리샤르가 상대하느니 혼자 좀 괴롭고 마는 게 나았다.
앤시아가 긴 식탁의 끝인 반대 편에 앉으려 하니 근위기사단장이 황태자와 가까운 자리의 의자를 빼 주며 눈으로 압박해 왔다.
리샤르와도 저렇게 가까이 앉지 않기에 망설여졌으나, 이미 빼둔 의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거절 예법 따위 알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향했다.
앤시아가 살짝 몸을 낮춰 인사후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카일루스의 살랑이 가벼운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돌아가면 공작가에 선물을 보내도록 하지.”
“예? 선물이요?”
“손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너그러운 이가 아니면 불쾌해할 일이지 않나. 이런 일이 없도록 모든 방에 걸 수 있는 만큼의 시계를 보내도록 하지.”
시계는 많다고 해 봤자 그럼 왜 늦었냐 한 소리 듣겠구나 싶어 앤시아는 그저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끝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계를 볼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와중에 혼자 식사하시는 손님을 위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시계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이 나를 고작 손님 취급한단 말인가?”
“전하께서 스스로를 손님이라 칭하셔서 그리 불러 드렸습니다만. 혹시 원하는 호칭이 있으시다면 알려 주세요.”
말의 내용과 별개로 앤시아는 상냥한 웃음으로 다정히 말을 건넸다. 그런 앤시아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카일루스 역시 예의 아이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그대.”
“시,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감히 황태자의 발언을 멈추게 한 용기 있는 등장은 요리장 하몬이었다.
카일루스의 그림 같은 미소가 단번에 굳어 가기에 앤시아가 급히 말을 걸었다.
“식기 전에 드시면 좋을 음식들이라 요리장이 서둘러 내온 듯합니다. 이것조차 무례하다 하시면, 저희가 무지한 것이니 꾸짖으시기보다 황가의 시종을 보내어 지침을 알려 주시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카일루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앤시아가 선수를 쳤다. 이에 카일루스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요리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앤시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