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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86화 (8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7화.

“시종 따위를 데려오기 위해 황족이 직접 움직여야 쓰겠나.”

“저 많은 기사 분 중 한 분 정도는 공작가의 기사를 대신 쓰시고, 전하의 편의를 봐줄 시종을 데려오면 더 편하지 않으셨을까요?”

뭐가 그리 두려워 기사들을 줄줄이 달고 왔느냐. 그것도 게이 트 통과를 위해서 황태자와 접촉한 채 몇 번이나 오갔을 테지.

다들 그걸 신기하고 특별한 광경처럼 여길지 모르나, 앤시아의 눈에는 달랐다.

자동차 한 대에 면허 있는 사람이 하나. 운전 가능한 한 사람이 여럿을 옮기느라 뺑이 친 걸로 밖에 안 보였다.

“이런.”

카일루스는 이런 대화가 오가면 앤시아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사과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다음엔 게이트를 통해 황궁에 방문하고 싶다며 아양을 떨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앤시아는 태연한 태도로 지적까지 해 왔다. 카일루스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역시 다르군.”

다른 지적 없이 식기에 손을 대는 카일루스를 보며 앤시아 역시 식기를 들었다.

요리들이 저마다 귀퉁이가 잘려있거나 쑤신 자국이 있는 걸 보아하니, 근위기사들이 미리 음독검사를 한 듯싶었다. 역시나 음식을 먹는 카일루스의 행동은 우아하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기사들을 믿는구나. 꽤 대범한 편이네.’

기분이 풀린 듯 보였던 카일루스는 정작 식사 내내 대화를 일절 하지 않았다. 앤시아 역시 굳이 황태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나 싶어 말을 걸지 않았다.

능숙한 예법 덕에 식기 부딪히는 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종종 앤시아가 신선한 샐러드나 과일을 아삭아삭 씹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다른 귀족들은 이런 분위기에 소리가 날 수 있는 요리는 피했을지 모르나 앤시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카일루스조차 그런 앤시아를 보고 피식 웃었을 뿐 트집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심심하기도 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앤시아는 거의 반쯤 졸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샐러드와 과일을 입에 밀어 넣다가 누군가 내민 스테이크 조각을 엉겁결에 받아먹기까지 했다.

반쯤 잠에 취해 리샤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으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입에 들어온 스테이크 조각은 배려 없이 상당히 커서 한쪽 볼이 불룩해졌다. 큰 고기 조각을 우물거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소 황당해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카일루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잘 먹는군.”

챙그랑.

고요했던 만찬장에 앤시아가 떨어트린 식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 안의 음식 탓에 사과나 질문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열심히 고기를 씹었다. 최근 요리장 하몬의 솜씨가 일취월장이라 예전과 달리 무척이나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그렇다 해도 큼지막한 고기 한 조각을 씹어 삼키는 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삼키고 입을 여는 순간, 이전보다 확연히 작은 고기 조각이 앤시아에게 내밀어졌다.

“난 잘 먹는 여인이 좋다네.”

카일루스가 사람을 홀리려는 듯 눈웃음까지 치며 자연스레 포크를 내밀었다. 앤시아 역시 지지 않고 눈을 곱게 접으며 사랑스러운 웃음을 피워 냈다.

“저녁은 많이 먹지 않아서요.

권유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에둘러 거절하는 솜씨가 사교계에 한 번도 몸담지 않은 여인 같지 않군.”

에두르기는. 진실 그 자체다.

어느 황족이 남의 집에 연락도 없이 손님으로 쳐들어와 안주인에게 스테이크를 먹여 준단 말인가.

지적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상대가 권력으로 눌러 오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식사가 끝나셨다면 차를 하……지요.”

앤시아는 대충 상황을 넘기기 위해 식후의 차를 권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일루스는 내밀고 있던 고기 조각을 자신의 입으로 쏙 넣어 버렸다.

괜스레 민망해진 앤시아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용인들과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저마다 얼굴을 붉히거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앤시아는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의도치 않게 추문을 불러올 수 있음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사랑스러운 웃음 대신 접대용의 과하지 않은 웃음을 지은 채 샐러드에 집중했다.

식사 후에 무의미한 대화가 난 무하는 티타임까지 마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잔뜩 지친 하녀들을 보며 앤시아는 그녀들이 분류해 둔 자료를 빠짐없이 확인했다.

늦은 밤까지 앤시아의 손은 쉬지 못했다.

무아지경으로 일에 집중하던 앤시아는 자신을 끌어안는 익숙한 체취에 잔뜩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을 풀 수 있었다.

“공작님?”

“미안하오. 황태자를 부인 혼자 상대하게 해서.”

“아니에요. 우리 둘 다 잡혀 있는 것보다야 나아요.”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

반쯤 감겨 있는 앤시아의 눈두덩이를 살살 문지르는 리샤르의 손길이 투박하면서도 상냥해 웃음이 났다.

“공작님도요.”

“그럼 쉬어야지.”

리샤르가 앤시아를 안아 들자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둘이 누우니 앤시아의 침대가 꽉 찼다. 부부 침대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좁기는 해도 아예 못 누울 만큼은 아닌 데다 둘이 딱 붙어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리샤르의 따뜻한 품 안에서 앤시아는 안도감을 느꼈다.

황태자는 리샤르에게 좋은 인물이 아니다. 둘이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당분간 힘들더라도 앤시아가 황태자를 상대하자 마음먹는데, 이마 위로 따뜻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부인. 축제가 코앞이라 정신없이 바쁠 때이나 마수 경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이 필요해. 황태자까지 안전을 이유로 트집을 잡으니 아무래도 하루 이틀 저택을 비워야 할 것 같소.”

“아, 네. 마수는 공작님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맞아요. 공작가 일은 제가 집사장이랑 어떻게든 해 볼게요.”

“아니. 그동안 부인은 별채에 가 있었으면 해.”

“별채요?”

“그래.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별채가 있소.”

아, 이거 원작에서 나왔던 거다.

비앙카가 저택 안을 이리저리 활보하다가 별채에 들어가게 되고, 그녀를 찾지 못한 리샤르가 전전긍긍하는 에피소드.

비앙카를 찾느라 온갖 최악의상상을 했던 리샤르는 별채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전 공작 부인이 무척이나 아꼈던 공간이었으나 가차 없는 결정이었다.

“어머님께서 아끼셨다는 별채 말씀이세요?”

가볍게 한 질문에 리샤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아니 이 정도는 공작 부인인데 알아 뒀을 수도 있지, 너무 놀라는 거 아냐?’

“공작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부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또요?”

뜬금없이 또 뭐에 꽂혀서 이러나. 리샤르의 시도 때도 없는 애정 표현은 기뻤지만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니를 살갑게 부르는 부인을 보니…….”

“아.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너무 빨랐나요?”

“다정한 그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어머니께 부인을 자랑하고 싶을 만큼.”

“어머님께서 보시기엔 부족하기만 할 텐데요.”

“그럴 리가. 부인은 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존재이니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거요.”

“고마워요. 하지만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마저 별채에 머물게 되면 황태자 전하는 누가 상대하나요?”

“기사부단장과 보좌관을 두고 갈 테니 이틀 정도는 괜찮겠지.”

“그래도 괜찮나요? 공작님이나 안주인인 제가 해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괜찮소. 걱정되면 더더욱 별채에서만 머물면 돼. 귀찮은 황태자를 상대할 필요 없소.”

“그래도 된다면야…… 좋네요.

하암…….”

달달한 리샤르의 속삭임에 앤시아는 구름이라도 올라탄 것처럼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 그대로 잠들어 버린 탓에 리샤르의 아쉬운 부름을 듣지 못했다.

***

마수 경계 현황을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 리샤르는 앤시아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고 갔다.

앤시아가 잠든 사이 그녀를 별채로 옮긴 것은 물론 밤새 고민해야 끝날 만큼 쌓였던 보고서를 전부 처리해 주었다.

아무래도 최종 결정은 리샤르가 하다 보니 앤시아보다 더 빠른 결정이 가능했다.

오후가 되면 또다시 일이 밀려 들겠지만, 오전 시간이 이토록 한가한 건 일주일 만이었다.

시간만 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비앙카가 햇볕 쬐는 고양이처럼 창틀에 기대서 멍 때리는 모습도, 앤시아의 손끝이 상했다며 다듬고 마사지하는 엘리도, 별채에 있는 정원 산책을 제안하는 줄리도 모두 한가해 보였다.

“우리 오랜만에 정원에서 티타임 가질까?”

“찬성! 대찬성이에요!”

“바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시녀가 없는 앤시아는 하녀들과 거의 매일 간식을 나눠 먹으며 차 역시 함께하고는 했다. 이제는 하녀들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앤시아의 마음을 기껍게 받아들이며 다양한 디저트와 차를 준비했다.

앤시아는 아끼는 하녀들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무척 즐거웠다.

먼저 준비해 두겠다며 줄리가 떠나고 길 안내를 위해 엘리가 앞장섰다. 비앙카는 앤시아의 바로 뒤에서 오늘 디저트는 뭘까 궁금해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디저트 순위를 말해 왔다.

“정말 한가하고 좋은 날이야.”

“여기는 벽이 없는데도 따뜻하네요. 신기해요.”

평온한 일상이 너무도 좋았다.

전 공작 부인이 손수 꾸몄다는 별채는 모퉁이의 작은 장식조차 신경 쓴 티가 났다. 앤시아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장식을 모아 작은 온실을 꾸며 볼까 고민할 만큼 마음에 들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유리 천장과 보온 마석으로 인해 정원 안은 춥지 않았다. 숄을 살짝 둘러야 할 만큼의 선선한 바람이었으나 꽃이 피고 유지될 정도의 온도였다.

“여기 정말 좋구나. 관리도 잘돼 있고.”

“선대께서 굉장히 아끼시던 곳입니다.”

줄리가 가져온 디저트를 테이블에 늘어놓는 동안 앤시아는 꽃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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