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8화.
“이런 곳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이라니. 두 눈이 있는 자라면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구나.”
살려 줘요. 홀로 핀 꽃도 민망해 죽겠는데 매혹이라니.
플러팅이 너무 고루하면 소름이 끼쳐야 하는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왕자님, 아니 황태자이다 보니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카일루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며 어서 앤시아도 손을 내밀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해 왔다.
앤시아는 떨떠름한 마음을 환한 웃음으로 감추며 닿을 듯 말 듯 살짝 손가락 끝을 얹었다. 부드럽게 쥐어 오는데도 뺄 수 없을 만큼 꽉 붙잡혔다.
“그윈티드 공작 부인. 이름을 허락해 주지 않겠나.”
“갑자기요?”
당황한 나머지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다행히 카일루스는 그런 앤시아의 뜬금없는 발언들을 특이한 귀여움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싶군.
허락해 주었으면 하오.”
아니 하찮게 대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귀부인 대하듯 구는 건 뭔데? 냉탕 온탕 온도 차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갑자기 거리감 없이 바싹 다가와 버리는 카일루스의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앤시아는 꽉 쥐인 손을 티 나지 않게 빼려다 실패했다. 결국 포기하고 손에 힘을 빼자 갑자기 카일루스가 앤시아의 손등을 얼굴로 가져다 댔다. 입술이 닿지도 않고 가볍게 숨만 스쳤는데도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치 황태자가 입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반응이었다.
카일루스는 마치 동화 속 왕자님처럼 굴었지만, 이곳에는 여성만 출입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물론 앤시아의 호위를 위해 몇 명의 기사가 머물기는 하지만 그 외엔 요리장이나 집사장조차 별채 앞에서 하녀를 통해 용건을 전하고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황태자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충실한 사용인 중 누군가는 카일루스가 이곳으로 들어오고자할 때 별채의 의미를 알렸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입구를 지키는 기사나 병사가 규칙을 알렸을 터.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별채 정원으로 들어선 황태자와 그의 기사들을 보며 앤시아는 형식적인 미소로 답했다.
“제 허락에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한가요?”
“가시를 세우는 영문을 모르겠군.”
앤시아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짓는 황태자를 앞에 두고도 흔들리기는커녕 거부 반응까지 보였다.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카일루스의 적안에 흥미로움이 어렸다.
앤시아는 무례해 보이지 않도록 겉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별관의 출입 제한을 부탁드렸음에도 황태자 전하의 발걸음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으신 듯한데, 어떤 것이든 제 허락이 의미가 있나 해서요.”
“있고말고, 타인의 정원에 핀꽃을 함부로 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놈의 꽃 타령.
황태자는 생긴 건 완전 아이돌저리 가라 화려한 것과 달리 말투는 완전 애늙은이였다.
비유하자면 아이돌이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걸 기막히게 잘 해내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가식이라는 뜻이겠지.’
카일루스 드미트리는 앤시아 앞에서 한시도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돌 웃음이라면 이쪽도 지지 않았다.
앤시아는 몇 년이나 천사 같은 소녀를 연기하며 웃음을 보여 왔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건 앤시아의 특기나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속마음과는 별개로 서로를 향해 더없이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주인의 허락이 없더라도 꽃의 허락이 있다면 이 손을 친히 더럽힐 의향이 있네.”
카일루스는 바로 옆에 핀 꽃을 꺾어 손에 쥐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과 행동이었다. 그러나 태연한 카일루스의 웃음은 여전히 해사하기만 했다.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이 순간의 두 사람을 환하게 밝혔다. 살랑이는 바람은 선남선녀의 머리카락을 딱 보기 좋을 만큼 흔들어 놓았고 부드러운 숄이 바람에 흔들리며 앤시아의 사랑스러움이 돋보였다.
“그대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는 나를 언제까지 애태울 셈인가?”
앤시아는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환한 웃음으로 카일루스의 뒤에 서 있는 근위기사들의 시선까지 모조리 빼앗으며 답을 주었다.
“제 답이 필요하신가요? 그럼 꺾지 마세요.”
상냥한 음성이었지만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태자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제 정원에 있는 그 어떤 꽃에도 손대지 마세요.”
앤시아의 정원은 아니었지만, 공작 부인의 정원이기는 했다.
확실한 거절의 뜻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숨을 멈췄다. 앤시아의 아름다운 미소에 넋이 팔려있던 기사들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작 카일루스의 얼굴에는 그린 듯한 웃음이 더욱 깊어지며 진심이 섞여 들었다.
“히아신스인 줄 알았더니 가시를 품고 있었군. 이러면 더욱 예뻐해 주고 싶지 않은가.”
앤시아에게 던지는 노골적인 추파였다.
기세를 죽이고 있던 앤시아의 호위 기사에게서 선명한 적의 가새어 나왔다. 그동안은 상대가 황태자였기 때문에 참아 온 것이다. 앤시아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짙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아무리 공작가에 충성심이 높은 기사들이라지만, 황태자를 향해 저런 식으로 적의를 드러내도 될리 없었다.
“흐음…….”
소름이 돋을 만큼 묵직한 공작가 기사들의 기세에 카일루스가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그에 황태자 측 근위기사들이 반응하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를 본 앤시아가 먼저 손을 들어 손부채질을 했다.
“세상에, 햇볕을 너무 오래 쓰었나 봐요.”
마치 열이 나는 것처럼. 이런 앤시아의 행동은 황태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앤시아는 곧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전하, 전 몸이 약해서 쉬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답니다.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꽃이 혼자 움직이게 둘 수야 없지. 동행하겠네.”
앤시아 측 호위에게 불만을 드러내는 대신 카일루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상황을 피하려고 했더니 아예 옆에 붙어 서는 카일루스의 행동에 앤시아는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그, 꽃이라는 표현은 너무 부끄러우니 어울리는 영애에게 불러 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대 역시 철없는 영애처럼 가벼운 말투라 충분히 귀엽소.”
지금 공작 부인답지 않은 말투라고 대놓고 깐 거지?
“제가 좀 예법에 익숙지 않아서요. 이러다 황태자 전하께 실수하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어지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다시금 멀어지 려는데 카일루스가 손을 내밀어 방해했다.
“떠나기 전에 이름을 허락해 주면 좋겠군. 아, 그래. 나를 카일이라 불러도 좋아. 이러면 이름을 허락하겠는가?”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하는 거지?
원작에선 앤시아와 한 번도 얽히지 않는 인물이라 상대하기가 곤란했다.
능글거리면서도 집요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자는 카일루스의 태도를 보니 친밀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힐끗 하녀들과 호위 기사를 살펴보자 필사적으로 안 된다는 표현을 하고 있었다.
특히 호위 기사들은 앤시아의 대답 여하에 따라 검이라도 뽑아드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비장해 보였다.
여기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에스코트라도 할 심산인지 카일루스는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뭐라도 말을 건네자 싶어 입을 여는 순간 정원 입구 쪽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자 익숙한 모습이 정원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섰다.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는 리샤르그윈티드의 등장에 앤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작님!”
반가운 마음에 누구보다 먼저 그를 불렀다.
뒤돌아보는 카일루스의 얼굴이 미약하게 찌푸려졌으나 이내 능숙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윈티드 공작이 여기엔 웬일인가? 마수 이상 증식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한 것 같은데.”
“기사부단장이 한발 빨리 출발하였기에 돌아왔습니다.”
“공작. 황족의 안전을 위해 직접 확인하라고 전했을 텐데. 이래 봬도 공작을 믿고 있기에 그리하였건만.”
“황태자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저희 영지의 마수 경계와 방비책을 면밀히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하를 지키는 근위기사의 실력이면 마수 수십 마리가 덤벼도 아무 문제 없으실 테지요.”
리샤르의 지적에 근위기사들은 칭찬이라도 들은 양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굴었고 카일루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황족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걸 빌미로 공작을 괴롭히려던 찰나, 리샤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불안하게 여기신 영지의 안전함을 알리고자 급히 돌아왔습니다. 서두르느라 제 마음이 다급해 잘못 들은 것 같기는한데, 혹 전하.”
지금까지 태연하게 상황을 전하던 리샤르의 푸른 눈이 사납게 일렁였다.
“제 아내에게 이름을 허락하셨습니까?”
이름. 그놈의 이름이 뭐길래 리샤르까지 저러는 걸까?
“아니. 공작이 바쁘긴 바쁜가 보군. 환청이라도 듣는 건가?”
방금 카일이라고 불러 달라며?
뻔뻔한 황태자의 거짓말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결혼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새신 부에게 이름을 허락해 달라 청하실 리 없는데 큰 오해를 할 뻔했습니다. 아무래도 요즘 업무가 지나치게 많아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전하를 보필하지 못할 듯한데 괜찮으십니까?”
“그대 말대로 훌륭한 내 기사들이 있으니 다른 건 필요 없네.
괜히 헛생각하지 말고 쉬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리샤르가 허리를 숙이자 카일루스는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기사들까지 전부 나가자 리샤르는 곧장 앤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과 의아함이 깃든 것을 본 리샤르는 일그러진 표정을 풀며 최대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부인. 황태자에게 이름을 허락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