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9화.
“전하도 그렇고 공작님도 심각하게 굴고…… 대체 이름을 허락하는 게 무슨 의미라도 있어요?”
이름이야 친하면 부를 수 있는거 아닌가?
앤시아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듯 호흡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줄리나 엘리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비앙카는 꿈꾸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더욱 불안해졌다.
‘왜. 뭐. 뭔데? 이 분위기 뭔데?’
어리둥절해하는 앤시아의 반응에 맥이 풀린 리샤르는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공작님?”
“몰랐다면 됐소.”
리샤르는 안심한 듯 깊은 한숨을 쉬며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부인이 너무 순진해서 혼자 둘 수가 없군.”
“아니, 저 그렇게 순진하진 않은데요.”
등을 도닥이는 리샤르의 커다란 손이 무척 든든해서 어린애 취급 받는 것 같았다. 이에 앤시아도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앤시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리샤르의 웃음소리에 경직됐던 주변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 하녀들에게 들어 두었으면 해.”
“아, 네. 알았어요.”
“그리고 오후에 데리러 올 테니 외출 준비를 해 두시오. 그때까진 무리하지 말고 쉬도록 하고.”
오후에 다시 본다는 말에 앤시아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황태자를 향해 꾸며 낸 웃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 안에 순수한 기쁨이 들어 있어 보는 사람마다 가슴이 푸근해졌다.
리샤르가 정원을 떠나고 사용인들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앤시아는 상냥한 웃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가장 친숙한 세 명의 하녀만이 곁에 남자 앤시아가 진지한 얼굴로 돌아섰다.
“뭐야? 뭔데? 뭐가 문제길래 다들 이름 가지고 난리인 거야?”
“마님, 정말 모르셨어요? 배움이 적은 저조차 알고 있는 로맨틱한 전설인데.”
“로맨틱한 전설?”
비앙카의 엉뚱한 말에 앤시아가 의아해하자 엘리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소설이나 이야기를 말하는 거예요. 비앙카는 그걸 무슨 전설처럼 알고 있지만요.”
“마님께서 모르고 계셨는데도 현명하게 대처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대체 뭐냐고.
앤시아가 팔짱까지 끼며 세 사람을 쳐다보자 그제야 엘리가 바싹 다가와 속삭이듯 알려 주었다.
“기혼자에게 이성이 이름을 허락해 달라는 건 불륜 상대로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예요.”
앤시아에게 이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원작에선 나오지 않은 표현이었다.
백작가에서도 어른들의 사정이나 저속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이는 없었다. 항상 어리고 순수하게만 보이던 앤시아였기에 그 누구도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작은 마을에 살던 비앙카마저 알고 있는 상식에 가까운 사실을 앤시아는 알지 못했다.
문득 앤시아는 예전에 서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여인들을 위한 책장에는 이름에 관련된 책이 유독 많았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당신만 아셔야 해요, 내 이름은……〉〈이름을 파는 여인) 등등.
전부 불륜 소설이었구나.
어쩐지 멀뚱히 제목을 읽고 있는데 하녀들이 다른 쪽으로 데려가더라니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된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리며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미친X이었네.”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호위에게서 헛기침과 참지 못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줄리는 황태자가 사라진 방향을 황급히 확인했고, 엘리는 손뼉까지 치며 감탄한 눈을 했다. 정작 비앙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왕자님이 마님께 고백한 거 아니에요? 전 되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는데.”
“응, 아니야.”
“하지만 우리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님께 백마 탄 왕자님은 정말 잘 어울리셨는걸요.”
이 새하얗기만 한 비앙카의 머릿속을 어쩌면 좋을까.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용인들이 비앙카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앤시아는 앞으로도 죽 비앙카를 곁에 둘 예정이었기에 하나의 비유를 해 주었다.
“비앙카. 난 비앙카를 아주 좋아해.”
“저도 마님이 너무너무 좋아요.”
“그렇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예쁜 하녀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비앙카의 집중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앤시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사르르 웃었다.
“마님. 제게 이름을 허락해 주세요. 저는 마님께 특별한 하녀가 되고 싶답니다. 이렇게 말이야.”
“안 돼요! 저부터 이름을……
아얏!”
적절한 타이밍에 엘리의 매서운 손이 비앙카의 팔뚝을 치며 데리고 물러섰다.
역지사지라고 했다.
비앙카는 자신과 대입해 설명을 해 주자 곧장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께서 무지무지하게 속상하실 일이었네요.”
“응. 큰일 날 뻔했어.”
앤시아는 자신의 지식이 공작가에서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는 통용되리라 여겼다.
시녀가 있었다면 더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조언을 받으면서 이런 일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 와서 친분도 없는 영애를 불러 상식에 가까운 이야 기부터 시작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앤시아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또는 호감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하녀들과 호위를 둘러보며 생긋 웃었다.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상냥한 웃음이었으나 다들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듯 보였다.
정말로 대화를 하자는 것뿐인데.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앤시아는 얼른 첫 질문을 던졌다.
“혹시 남녀 사이에 비밀 암호라던가 은밀한 신호 같은 게 있으면 좀 알려 줄래?”
리샤르의 손끝이 살짝 앤시아의 뺨에 닿았다 떨어지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부인, 얼굴이 지나치게 빨간데 열이 있는 건 아닌가?”
“괜찮아요, 그냥 좀 흥분해서.”
“흥분?”
리샤르의 물음에 앤시아는 속내를 너무 그대로 내비친 것 같아 살짝 말을 돌렸다.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요. 쉬라고 배려해 주신 덕에 오랜만에 하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리샤르는 준비된 마차로 앤시아를 이끌었다. 오늘도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어른의 대화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외출 시간이 다가온걸 깨닫고 서둘러 준비를 해야 할 만큼.
준비 과정에서도 물꼬가 트인 수다와 전담 하녀들의 은근한 참 견이 이어졌다.
새로 알게 된 은밀한 신호를 공작님께도 보내 보라고.
앤시아는 대부분을 웃으며 넘겼지만, 그중 몇 가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이렇게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내밀어 리샤르의 손목을 톡톡 두드린다거나.
“부인?”
아. 역시 모른다.
하도 기상천외하고 25금 수준의 은밀한 규칙들이 많아 그중 소소하게 해 볼 만한 건 몇 가지 없었다.
안 그래도 이 신호를 알려 주며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레이스 장갑까지 찾아온 엘리는 주인님이 모르실 수 있다며 걱정하기도 했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남성의 손목을 톡톡 두드리는 건 손을 잡아 주었으면 한다는 귀여우면서도 은밀한 수신호였다. 레이 스 장갑을 끼는 이유는 벗지 않아도 서로의 체온과 약간의 살결을 느낄 수 있어서라나.
이 수신호는 레이스 장갑만 끼면 되는 데다 리샤르의 손을 잡아 보고 싶었기에 시도해 본 것이었다.
‘역시 리샤르는 이런 걸 모르는구나.’
최근에 생긴 신상 수신호인 데다 어린 연인들의 풋풋한 방법이다 보니 마수 토벌에만 힘써 온 리샤르가 알 리 없었다.
아쉬움을 감춘 앤시아가 손을 거두려는데 리샤르의 손이 살며시 손끝을 잡아 왔다.
‘어머, 리샤르도 아나 봐.’
요즘 마을에 자주 다니더니 신상 스킨십까지 배워 오고, 아주 듬직하고 바람직한 남편이구나 싶어 뿌듯해하는 순간.
잡힌 손이 그대로 들리더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인지할 틈도 없이 리샤르의 이에 물린 레이스 장갑이 부드럽게 벗겨졌다.
앤시아의 눈을 한시도 놓치지 않는 푸른 눈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도 없이 툭 떨어진 레이스장갑에 잠시 시선을 준 사이, 손끝에 온기가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고, 고, 공작님?”
“부인이 이렇게 유혹해 올 줄 몰랐는데.”
“네? 아니, 그게 아닌 건 아닌데요.”
“레이스 장갑을 보고 설마 했지만.”
“아, 공작님도 알고 계셨어요?”
손끝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추며 손바닥 위에 지그시 눌리는 입술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뜨거워서 앤시아의 손이 움찔거렸다.
손 좀 잡으려다가 손을 잡아먹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금 리샤르의 행동이 과연 앤시아와 같은 걸 알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망설이는 사이 손목까지 타고 오른 입술에 앤시아는 은밀한 수신호고 뭐고 잡히지 않은 손을 파닥거리며 리샤르를 밀어내려 했다.
“공작님, 잠깐만요.”
“부인.”
덜컹.
언제 출발한 건지 마차가 저택을 벗어나며 가볍게 흔들렸다.
자세가 불안정했던 앤시아가 비틀거리자 이를 리샤르가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며 얼굴이 가까워졌다.
“부인이 원한다면 어디서든 나는.”
리샤르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는 것 같아 앤시아는 다급해졌다.
“아뇨! 공작님 뭔가 다른 거랑 헷갈리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소. 부부나 연인 사이에 오가는 수신호라면 나 역시 최근에 들은 게 있으니. 갑작스럽기는 하나 부인을 위해…….”
“그러니까, 그게 틀린 것 같다고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웠기에 입이 막히기 전 필사적으로 외쳤다.
“전 손을 잡고 싶었을 뿐이거든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오던 리샤르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깃든 의아함. 의문 가득한 얼굴에 점점 번져 가는 당혹감.
잠시 후 이를 갈며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는 리샤르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