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89화 (8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0화.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리샤르는 앤시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건 분명 기특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으나 긴장이 풀린 앤시아는 리샤르가 잘못 알고 있던 수신호의 뜻이 너무도 궁금했다.

“공작님은 이 신호를 어떤 뜻으로 아시는 거예요?”

“내가 오해한 거요. 부인이 손을 잡고 싶어 한 걸 눈치채지 못해 미안하군.”

“그건 공작님이 이 신호를 다르게 알고 계셔서 그런 거잖아요.”

리샤르의 손목을 톡톡 건드리며 몇 번이고 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침묵과 함께 한숨을 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앤시아가 차라리 토라져 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를 눈치 챈 리샤르가 가벼운 입맞춤을 해왔다. 이전 같은 짙은 키스가 아닌 정말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마치 철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부를 대하는 듯한 행동에 앤시아는 진심으로 서운해졌다.

“저도 알 건 다 알거든요. 감추시면 속상해요.”

앤시아가 조금 속상한 티를 낸 것만으로도 굳게 닫혀 있던 리샤르의 입이 열렸다.

“비밀을 만들려던 건 아니었소.

그…… 말하리다.”

망설이던 것과 달리 진중하고 상세한 리샤르의 설명을 듣던 앤시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비밀을 만들지 않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괜히 말해 달라고 했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 위해 연신 손부채를 부치던 앤시아는 리샤르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마차 구석으로 도망쳐 버렸다.

앤시아가 지나치게 부끄러워하자 리샤르의 변명이 이어졌다.

“용병들이 나누는 대화를 곧이 곧대로 믿은 내 탓이오. 기사들에게 확인이라도 해 봤어야 했는데.”

“아뇨. 안 하시는 게 나았을 것 같아요. 공작님 입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이……”

앤시아는 화끈 달아오른 뺨을 마차 내벽에 붙이며 열을 식혔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부부 사이에서도 이렇게 민망하고 당황스러운데 썸 타는 이들 사이에서 이런 수신호가 다르게 해석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축제의 들뜬 분위기 속에, 용병들의 지식과 영지민들이 가진 지식이 달라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자 아찔해졌다.

마차가 축제 현장 중심부에 도착하자마자 앤시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서 내린 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예상보다 많은 외부인들이었다. 앤시아는 마음이 급해져 축제 준비 현황을 빠르게 점검했다.

주변을 열심히 살피는 앤시아를 보며 리샤르는 뿌듯함과 동시에 조금의 서운함을 가졌다. 영지 일에 이리 열심인 아내를 보며 서운하다니. 리샤르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앤시아는 그날 저녁 저택으로 돌아와 ‘연인 간의 비밀 암호, 최신판’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충동적인 작업이었으나 하녀들과 함께하여 단 하룻밤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리샤르처럼 잘못 알고 있는 경우, 혹은 제멋대로 해석될 수 있는 수신호의 기준을 세워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책자는 축제 기간 내내 불티나게 팔리면서 예상치 못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이것이 그윈티드 영지에 새로운 유행으로 퍼져 나간 소책자의 탄생 비화였다.

***

소책자를 밤새워 만들어 낸 앤시아는 중간중간 기절하듯 잠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예전만큼 나쁘지 않았다. 최근 몸이 가벼워진 것 같더니 확실히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마님, 주무시더라도 약은 드시고 주무세요.”

“아…… 고마워, 비앙카.”

아침도 거르고 잠들었던 앤시아는 비앙카가 내민 약초 물과 환약을 삼키며 이것들 덕분이 아닌가 짐작했다. 그건 엘리와 줄리도 마찬가지였는지 비앙카가 가져오는 약초 물을 앤시아에게 더 자주 권했다. 덕분에 점심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 곤란할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줄리. 어제 만든 책자, 인쇄는 하루면 된다고 했지?”

“네, 마님. 공작가 안의 설비는 마석을 이용하기에 일반적인 인쇄와 달리 반나절이면 충분히 마릅니다.”

“비앙카, 전에 말한 사랑의 가루라는 거 얼마나 있어?”

“한 포대 정도 있어요. 실제 복용하려면 백 인분도 안 될 거예요.”

“그 약초 가루, 향만 맡아도 심장이 살짝 빨리 뛰는 효과가 있다고 했지? 그거 엘리가 작은 주머니를 가져오면 조금씩 나눠 담아 줘. 책자 부록으로 함께 줄거야.”

“아, 그 정도라면 복용 양보다 적어도 괜찮으니까 훨씬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요.”

점심시간에 찾아온 리샤르는 하녀들과 일거리를 만들어 내는 앤시아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잠을 못 잔 것 같군.”

“앗, 공작님.”

“밤새 책자를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네. 저희처럼 잘못 알고 있는 연인이나 부부들이 곤란해지지 않게 하려구요.”

어제의 일이 떠올랐는지 리샤르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런 반응이 앤시아에게는 오히려 반가웠다.

“최대한 설문을 하고 싶었는데 못 해서 아쉬워요. 그래도 일단 기준을 잡아 둬야 혼란이 없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만들어 봤어요.”

리샤르는 이 바쁜 시기에 앤시아가 책자를 만들어 낸 것이 조금은 못마땅했다. 누군가를 위한 책을 만들기보다 편안히 잠자리에 들거나 자신을 찾아와 주길 바랐다.

비몽사몽 한 얼굴로 하녀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는 앤시아의 모습에 리샤르는 차마 서운한 기색을 비칠 수 없었다.

대신 그녀가 하는 일에 약간의 훈수를 두었다.

“소량이라 해도 전문 약초 판매자가 아니면 유통은 할 수 없을 거요.”

“아, 파는 건 책자니까 괜찮을 거예요. 허가받지 않고 약초를 파는 건 불법이지만 무료로 나눠주는 건 괜찮잖아요.”

원래 부록에 잡지 붙여 주는 거 아닌가.

배보다 배꼽이 큰 잡지가 익숙했던 앤시아에게 이런 류의 발상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앤시아의 꼼수에 리샤르는 한방 맞은 얼굴이 되었다.

리샤르에게는 이런 사고방식이 생소했는지 앤시아를 보는 눈빛에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걱정했던 약초에 대해서도 이어진 앤시아의 말에 약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약초,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 주는 정도의 효능이라고 하더라고요. 약초 상점에 가서 확인도 받아 왔어요.”

“그렇군.”

열심히 일하는 앤시아의 모습을 본 리샤르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자꾸만 앤시아에게 접근하려는 황태자를 애써 마수 사냥 대회의 현장을 답사하도록 유도하고 동선을 겹치지 않게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다.

앤시아를 자유롭게 두고 싶었다.

졸음이 가시지 않아 나른한 눈매가 살포시 웃음 짓고, 잉크 묻은 새하얀 손끝으로 종이를 넘기는 모습 하나하나가 그녀를 생기 있어 보이게 했다.

“아름답군.”

갑작스러운 리샤르의 발언에 그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비앙카에게서 작은 비명이 들려 왔다.

줄리와 엘리는 능숙하게 각자의 할 일에 열중하면서도 이쪽으로 귀를 열어 두었다.

하여간 다들 사랑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어린 소녀들 같았다.

“감사해요. 참, 식사를 권하러와 주신 거예요?

“그것도 그렇고, 저녁에 축제개회식이 시작되니 미리 알리러 온 거요.”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어제 민망했던 수신호 사건 이후 리샤르와 함께 정신없이 영지를 둘러보고 왔다. 축제 준비가 거의 끝난 듯하면서도 일부 장소에는 기둥 밖에 세워져 있지 않아 걱정스럽기도 했다. 오늘 저녁에 축제가 시작된다고 하니 미흡했던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앤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리샤르가 손을 붙잡아 왔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만큼이나 축제준비를 해내는 영지는 없을 테지.”

“그럴까요?”

“부인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거요.”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된 곳들도 있고 무너진 건물의 보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그 정도는 지금 가진 인원으로 해결할 수 있소. 이왕 찾아온 황태자도 유용하게 써먹을 테니.”

리샤르의 의미심장한 말에 앤시아는 약간 걱정이 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정말 이대로 가?”

“예, 마님. 지금은 과해 보여도 막상 밤이 되면 이 정도는 돼야 그나마 보이는구나 싶으실 거예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경 쓴 머리 장식에 앤시아는 이러다 목에 담이 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눈토끼 숄 위로 두꺼운 로브까지 걸쳤다. 굴러갈 것같이 두툼해진 어깨에는 자체 발광하는 마석들을 크리스마스트리 조명처럼 둘렀다.

한껏 반짝반짝하게 꾸며진 앤시아는 리샤르와 함께 탈 개방형 마차를 보고 깨달았다.

“퍼레이드라도 하는 거야?”

“물론이죠, 마님. 중앙광장까지 가시는 동안 어두워지면 폭죽도 차례로 터질 거예요.”

“아쉬워요. 폭죽에도 지지 않을 만큼 마님을 꾸며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 세 사람은 충분히 열심히 했어.”

여기서 조명 같은 마석을 더 달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조형물로 보일 것이다.

마차 옆에 서 있던 리샤르는 앤시아를 보고 칭찬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앤시아가 먼저였다.

“공작님은 왜 조명이 없어요?”

“빛나는 건 부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비겁한 변명 같은데요.”

새까만 제복은 금실로 수놓아지지 않았다면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에 반해 앤시아는 새하얗다 못해 조명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태였다.

함께 서 있으니 빛과 그림자 수준이었다.

“조명은 떼도 될까요?”

“부인은 마석 없이도 빛나니 그렇게 하지.”

다행이었다.

하녀들의 끊어넘치는 의욕과 달리 리샤르의 눈에도 과한 장식이었는지 쉽게 호응해 주었다.

아쉬워하는 하녀들의 시선을 느낀 앤시아는 떼어 낸 조명을 마차 테두리에 둘렀고, 그것만으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말이야.’

투덜대는 듯했으나 앤시아의 눈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톡톡.

앤시아의 손목을 두드리는 리샤르는 평소에 잘 사용 않는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앤시아가 만든 책자에 남성 역시 동일한 수신호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해 두었는데 리샤르가 그새 읽어 본 모양이었다.

‘큰일이야.’

누가 봐도 멋들어진 리샤르가 귀여워 보여 큰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