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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0화 (90/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1화.

앤시아가 살며시 손을 잡으려 하자 리샤르는 바로 장갑을 빼내고 맨손으로 맞잡아 주었다.

연애하는 부부라니. 바람직한 관계였다.

앤시아는 자꾸만 환한 웃음을 보였고, 그때마다 리샤르 역시 미약한 웃음을 보였다.

‘다행이야. 몸 상태가 좋아.’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고, 남은 건 축제 현황을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이건 앤시아가 참견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다.

체력도 제법 좋아졌다. 지금 이런 상태라면 어느 정도 축제를 즐길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했다.

천장이 없는 퍼레이드용 마차에 앉자 평소보다 느리게 출발했다.

뺨을 스치는 공기는 차가웠으나 몸은 두툼한 옷으로 따뜻하기만 했다.

해가 떨어지며 날씨가 더욱 쌀쌀해지는데도, 리샤르와 손을 잡은 내내 훈훈한 열기가 올라왔다.

‘진짜 열이 오르는 건 아니겠지?’

앤시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목 언저리와 이마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하지만 식은땀도 흐르지 않았고 몸의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마차가 저택을 빠져나가자 중앙광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꾸민 마석들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오며 지난 며칠간 준비했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윈티드 영지 축제의 시작이었다.

축제 개회사 후, 리샤르와 황태자는 마수 사냥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광장을 떠났다. 기사들 역시 그 뒤를 따라 상당수 자리를 떴으나 일부는 광장에 남았다.

이전에 임대해 둔 건물에 도착한 앤시아는 언제 무너졌냐는 듯 깔끔한 외형을 보고 놀라워했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건물을 다 고쳤어?”

“외형과 1층만 마석을 이용해 빠르게 보수했을 뿐, 위층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런. 아쉽겠어.”

건물주는 무혐의로 보이나 좀 더 조사를 받아야 했다. 건물에 대한 조사는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임대 기간 내에 수리도 끝날것 같으니 손해는 크지 않을 터.

앤시아는 건물주의 손익을 계산하면서 태연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기사들은 폭발 사고를 겪은 공작 부인이 겁을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앤시아가 1층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편안히 앉자 안도했다.

문밖에서 기웃대던 영지민들을 보며 앤시아는 생긋 웃음을 보였다.

“그럼 나도 한 손 거들 테니 다들 업무를 시작해.”

아무래도 축제 첫날이니만큼 여러 가지 소소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걸 축제 관리자가다 해결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앤시아가 거들어 주는 편이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축제 현장 관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잘한 사건과일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통에 앤시아는 바깥에서 풍기는 고소한 음식 냄새에도 배를 곯아야 했다.

앤시아가 밀려드는 민원에 고군 분투하는 시간.

리샤르는 황태자와 함께 숲속가장 깊은 곳에서 마수 사냥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해졌습니다.”

“마수 사냥은 얼마나 자주 하나?”

크라바트를 당겨 목 주변을 느슨하게 만든 카일루스의 질문에 리샤르는 미동도 없이 답했다.

“매달 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근 영지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거의 매일 사냥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북부 기사들이 다들 괴물처럼 덩치가 커지는 거겠지.”

근위기사와 흑의 기사단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빛과 그림자처럼 색채에서부터 차이가 컸다.

커다란 짐승들을 인간으로 형상해 놓은 듯한 흑의 기사단과 먼지 한 톨 묻지 않고 아름답기까지 한 근위기사의 대비에 카일루스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불편하시면 막사로 모시겠습니다.”

“불편할 게 뭐가 있겠나. 나의 기사들이 이리 지켜 주고 있건만.”

카일루스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흥미를 보였다.

“호오. 보고대로 마수의 알이 제법 보이는군. 산란기가 아닐 텐데 말이지.”

“원인을 찾기 위해 조사 역시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몰라 곤란하겠군. 마음같아선 나의 기사들을 빌려주고 싶지만, 황제께서 허락지 않으시겠지.”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해 준 것 없이 감사인사만 받아 가는 카일루스의 태도가 씁쓸하면서도 그의 말 속에 담긴 미약한 호의가 의문스러웠다. 앤시아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언제고, 견제하며 떼어 놓으니 순순히 물러나는 카일루스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근위기사가 마수의 알을 파괴하는 걸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카일루스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기울였다.

“우승자는 어떻게 정하는 건가?”

“마석의 개수로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몰아주기로 인해 거짓 우승자가 나올 수도 있지 않나?”

주변을 살피고 온 근위기사들이 저마다 손에 마석을 들고 돌아왔다.

카일루스가 우아하게 손을 펼쳐 보이자 즉각 기사들이 다가왔다.

손수건으로 마수의 체액을 닦아낸 깨끗한 마석이 카일루스의 손에 올려졌다.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울 만큼 마석을 받아 든 카일루스가 리샤르에게 팔을 뻗었다.

“나는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벌써 이만큼의 마석을 손에 넣었네. 이런 식이면 내가 우승자가 되겠군.”

“마수 사냥 대회의 첫 우승자가 황태자 전하시라면 그 또한 영광입니다.”

그깟 소소한 감투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갑작스러운 마수 이상 증식을 해결하려면 그 누구의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축제와 대회라는 명목을 내세워 두려움을 줄이고, 많은 용병의 참여를 도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리샤르의 태연한 반응에 카일루스는 웃음을 보이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황궁으로 보내지는 마석에 비하면 이런 건 쓰레기일 뿐. 가치 있는 게 아니면 손에 쥘 이유가 없지.”

카일루스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진 마석들은 수풀 사이로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카일루스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양 느긋하게 말을 몰며 리샤르를 쳐다보았다.

“아주 가끔은 돌멩이인 줄 알았더니 귀한 보석이었던 경우도 있지만.”

리샤르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카일루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공작 부인에 대해 듣고 싶군.”

굳이 보석에 이어 공작 부인의 이야기를 꺼낸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황제께서 이어 주신 인연입니다. 제가 아는 것 역시 황태자께서 아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공작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황족인 내 앞에서도 대범하게 구는 여인이 고작 몇 달 전까지 남작의 성을 가진 여인이었다니.”

리샤르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빠르게 몰아치던 카일루스의 말투가 다시 느긋하게 변했다.

“나의 흥미를 끌어도 지나치게 끄는 여인이 공작 부인인 게 참으로 아쉬워서 그러네. 이야기 정도는 들려주어도 좋지 않겠는가.”

리샤르는 대놓고 앤시아를 탐내는 카일루스를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리샤르는 빠르게 침착함을 찾는 이였다.

“아내의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무엇이든. 그녀의 영특함에 대해서나.”

“그런 것이라면…….”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대해서도 흥미가 있지.”

카일루스의 단어 선택은 리샤르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앤시아가 없는 지금이라면 평소처럼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하고 무뚝뚝한 그윈티드 공작답게 적당히 대꾸하고, 적당히 말을 삼키며 황태자를 상대했다.

차라리 몇 날 며칠 사냥을 하는 게 나을 정도로 피로한 대화는 마수 사냥 대회 내내 계속되었다.

***

“여기 책임자가 누구야!”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부술 기세로 걷어차며 들어오는 무뢰배들 때문에 문을 떼어 냈더니, 이번에는 성난 용병 하나가 마룻바닥이 부서져라 쿵쾅거리며 걸어들어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넌 뭐야? 책임자 나오라고!”

용병은 원활한 민원 처리를 위해 입구에 서 있던 안내원을 무시했다.

축제 기간 고용된 진행 요원 겸 안내원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중인 앤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온 용병 역시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만만한 평민이나 하위 귀족이라면 덩치로 찍어 누르겠지만, 힐끗 봐도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앤시아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란 것이다. 용병은 앤시아의 아름다움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을 찾는 거라면 난데. 책임자는 왜 찾는 거지?”

“헉. 귀, 귀족이 왜 여기에”

사람 가리면서 시비를 걸러 들어왔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이번에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진상이구나 싶어 앤시아는 느긋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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