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2화.
“시비가 붙었거나 사기를 당한 거야?”
“그, 그게…….”
“그런 거라면 여기가 아니라 치안대로 가야지.”
당당한 기세는 어디 가고 눈을 굴리며 머리 또한 열심히 굴리는 용병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치안대가 있으니 그쪽에 신고 해.”
“그런 건 아닌데…”
“일반 문의는 저쪽 1번 앞에 줄서고, 다친 거면 앞에 천막으로 가서 의사에게 보이고, 바가지나 품질 문제라면 직원과 동행해 해당 장소로 가서 확인 후 적당한 보상을 해 줄 건데, 급한 게 아니면 2번 앞에 대기.”
이미 수없이 많은 민원을 받은 터라 앤시아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던 용병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보며 앤시아는 가볍게 팔짱을 꼈다.
“다짜고짜 시비 걸러 온 거면 기사님의 손맛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있고.”
“줄…… 서겠슴다.”
앤시아의 등 뒤로 나타난 여럿의 기사를 마주한 용병은 순한 양이 되어 민원인들 뒤로 줄을 서러 갔다.
이렇게 민원 처리를 돕다 보니 대기 인원도 빠르게 줄었다.
마지막 민원을 마친 후, 진행요원 겸 안내원들도 하나둘 축제구경을 나갔다. 저마다 오늘로 끝을 맺는 축제를 아쉬워했다.
앤시아의 하녀들 또한 시원섭섭함에 수다를 이어 갔으나, 앤시아는 깊은 한숨만 쉬었다.
“후우……. 정말로 축제 기간 내내 한 번도 못 만날 줄이야.”
마수 사냥과 축제 기간 내내 앤시아는 리샤르와 만나지 못했다.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엇갈리는 정도였으나 본격적으로 마수사냥이 시작되자 인근 영지까지 넘나드는 통에 집으로 돌아올 틈이 없었다.
앤시아 역시 중앙광장의 운영본부를 떠나지 못할 만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마수 사냥과 축제는 마지막 날이 돼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중간중간 비앙카가 따라 주는 약초 물과 환약을 에너지 드링크마냥 챙겨 먹으며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만큼 혹사당했던 앤시아가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주일이나 못 봤어.”
리샤르가 바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혼자 있으니 자꾸만 아쉬워졌다.
하지만 아쉬운 것과 별개로 축제 기간 내내 할 일은 태산이었다.
앤시아가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은 영지민과 외지인, 그리고 용병 간의 관계였다. 영지민에게 외지인과 용병의 존재는 기회이자 불편함이었다. 영지의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었으나, 자칫 잘못하면 서로 악감정만 쌓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북부인의 특징인 큰 체격과 무뚝뚝해 보이는 외모 덕에 용병과의 트러블은 예상보다 적었으나, 외지인은 그런 영지민을 오해하고 불쾌해했다. 그럴 때마다 앤시아는 어린아이들에게 꽃바구니를 들려 보내 꽃을 선물하면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노점상의 낯선 음식이 외면 받을 때면 앤시아가 나서 맛을 보기도 했다.
노점상 운영에 불만을 드러내는 가게들을 일일이 찾아가 수익의 일부를 분배하기로 한 것을 상기 시켜 주었고, 그때마다 이브 드레스숍의 신상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 하녀들도 모델로 나서 네 사람이 길을 걸어가면 시선이 한데 모였다.
뒤이은 앤시아의 지시로 이브는 축제 한정 드레스를 거리로 가지고 나와 홍보했는데, 이를 본 다른 가게들도 물품을 가지고 나와 판매율을 높였다.
앤시아는 귀족적이지 못한 행동이 민망하기도 했지만 뿌듯함이 더 컸다. 앤시아의 노력 덕분에 축제에 참여하는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정신없이 바쁜 덕에 리샤르의 부재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면 그가 무척 보고 싶었다.
“마님, 주인님께서 오늘은 돌아 오실 거예요.”
“맞아요. 사냥 대회는 오전에 끝났고, 지금은 마석 집계를 시작했다고 하니 금방 오실 거예요.”
“늦더라도 우승자 발표는 두 분께서 함께하실 테니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줄리의 말에 축 처져 있던 앤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축제 폐회사와 대회 우승자 발표는 공작부부가 함께하는 일정이었다.
‘드디어 리샤르를 만날 수 있겠구나.’
들뜬 앤시아를 전담 하녀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꾸며 주었다.
앤시아는 해가 기울 때쯤 산으로 향하는 입구 쪽 공터에 도착했다.
이미 수많은 용병과 구경꾼으로 가득한 공간에 앤시아가 호위 기사와 함께 나타나자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공작 부인이다!”
“우와, 되게 작고 예뻐”
“여기도 봐 주세요!”
“마님, 오늘도 너무 예쁘세요!”
여기저기서 들리는 환호성에 앤시아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눈에 익은 영지민도 있어 금세침착해졌다.
자신을 향한 호의에 움츠릴 이유가 없었다. 의연하게 그들을 향해 웃어 보이자 환호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높게 올린단상이 보였다. 그 위에 리샤르와 황태자 카일루스가 함께 있었다.
리샤르의 안색은 어두웠으나 그 옆에 그림처럼 웃고 있는 카일루스는 멀쩡해 보였다.
일주일 내내 황태자의 곁을 지키느라 피곤에 지친 리샤르는 앤시아를 발견하고 조금이나마 안색이 밝아졌다.
‘아이고, 얼굴 까칠해진 거 봐.’
저 신경 거슬리는 황태자가 얼마나 괴롭혔을지 안 봐도 뻔해. 오늘은 만사 제치고 무조건 재워야지.
곧 리샤르가 단상에서 내려와 그녀를 맞이하러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이런. 부인이 골이 단단히 난 것 같군.”
다. 상금과 상품이 소개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부러움과 아쉬움의 한탄이 터져 나왔다.
“준우승자를 발표하겠다. 흙의 용병, 지크!”
단상 바로 아래 서 있던 수더분한 인상의 용병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준우승자가 단상에 올라오자 황태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대가 용병 지크인가?”
“아이고, 황송하옵니다.”
단상에 오를 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황태자를 앞에 둔 용병 지크는 허리를 못 펴고 굽신거렸다.
이에 카일루스는 익숙한 듯 품위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근처에 있던 기사가 우승자에게 주기로 한 황금과 최고급 치유 마석을 건네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용병에게 카일루스는 자애롭기까지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석의 개수로만 치면 이 몸이 우승자가 될 수밖에 없으나 그건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이건 그대들, 제국민들의 축제이니 우승자 역시 그대여야겠지.”
“세, 세상에. 감히 저 같은 거에게 이런 귀한 걸…….”
준우승자 용병과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감동이 진해질 무렵, 리샤르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펴는 데 필사적이었다.
카일루스는 자신이 마석을 가장 많이 모았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처음부터 우승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는 둥 태연하게 굴었다. 마음대로 하시라 했더니 이런 식으로 제 지지도를 챙겼다.
상관은 없지만 참으로 마지막까지 제멋대로인 황태자였다.
“그대가 우승자이네. 자, 받아 가게나.”
“여, 영광입니다.”
실질적 우승자인 황태자가 준우승자인 평민 용병에게 우승 상품을 넘기는 행동은 지켜보는 이들의 호의를 사기에 충분했다.
“우와! 황태자 전하, 통도 크시지!”
“멋지세요! 잘생기셨어요!”
영지민, 외지인 할 것 없이 분위기가 최고조였다.
앤시아는 이런 분위기라면 카일루스의 돌발 행동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두가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황태자는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앤시아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됐구나 싶어 용병에게 향했다.
“용병 지크. 준우승자이자 우승자가 된 걸 축하해요.”
“헉, 고, 고, 공작 부인.”
앤시아는 순서를 제멋대로 꼬아버린 카일루스 탓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커다란 꽃다발을 준우승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용병은 황태자를 대할 때보다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피로와 숙면에 도움이 되는 꽃으로 만든 꽃다발입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신 후 편안한 잠을 기원합니다.”
평민 용병이기는 하나 그래도 첫 축제의 준우승자를 우대해 주고자 앤시아는 말을 높였다.
용병 지크가 도무지 정신을 못차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앤시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꽃다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
지크는 화사한 꽃다발을 품에 안은 앤시아를 보고 넋을 빼앗긴 듯 멍하니 바라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받아 들었다.
“마, 말씀 낮춰 주십시오. 황송해서, 저기…….”
얼굴이 벌게진 지크는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버벅거렸다. 괜스레 황태자의 관심을 끌거나 심기를 상하게 할 수도 있었기에 리샤르가 나서 그를 단상 아래로 이끌었다.
“오늘 주점의 술은 자네를 위해 풀 것이니 맘껏 즐기길 바라네.”
“우와.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화색이 도는 지크의 반응에 이어 멀리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제의 끝을 알리는 폭죽이 어두운 밤하늘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밤하늘로 향했다. 앤시아 역시 화려한 불꽃을 보며 즐거워했다.
얼마만의 부부 침실인가.
앤시아와 리샤르는 가벼운 차림으로 침대에 드러누운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꼭 맞잡은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만으로도 한동안 섭섭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만, 바로 아침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일했던 터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거기다 신경 쓰이는 점도 있었다. 곧장 떠날 줄 알았던 황태자가 아직도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