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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2화 (92/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3화.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에 수확한 마석은 외부로 판매해도 된다고 하셨다면서요?”

“축제에 참여한 이들이 직접 채 취한 것이니, 개인이 몰래 빼돌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이례적이지만 유통을 허가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 듯해.”

“안 그래도 황궁에 좋은 건 죄다 갖다 바치는데, 하급 마석조차 유통에 제약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웬만큼 쓸 만한 크기의 마석은 북부에 묶어 놓고, 상급 이상은 황가로 보내져 왔다. 그걸 축제한정이라고는 하나 개인에게 귀속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파격적인 처사였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축제 규모는 필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번 축제로 손실이 나 리라 예상한 부분들까지 전부 흑자로 마무리됐소. 돈이 돌기 시작하니 활기가 넘치더군.”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는 앞으로도 영지에 큰 이득을 불러올 것이다. 그렇기에 황태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당장 머리를 굴려 보려 해도 황태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걱정스러워지려는 찰나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얽혀 오는 부드러운 온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음……. 아마 이번 일로 황가에 대한 지지도가 꽤 올라갔겠죠?”

“그런 계산으로 마석 유통을 한 시적으로 풀어 준 거겠지.”

얄밉기는 했지만, 황태자의 결정은 또 다른 축제를 열 수 있는 좋은 패였다.

앤시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황태자의 꿍꿍이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당장은 잘 마무리된 이 순간을 편안히 곱씹고 싶었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앤시아가 리샤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 데, 이미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푸스스웃음이 새어 나왔다.

“공작님, 고생 많으셨어요.”

“부인이야말로, 몸도 약한데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소.”

“실은 저도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다행히 예전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아마도…….”

앤시아가 몸을 굴려 리샤르 쪽으로 향하자 자연스레 그의 팔이 등을 감싸며 끌어당겼다.

단단한 팔과 가슴에 안기자 따뜻하면서도 든든했다.

“비앙카가 제 몸에 좋을 거라며 약초 물이랑 환약을 계속 먹였거든요. 그게 효과가 있나 봐요.”

비앙카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 눈치를 조금 봤지만, 리샤르에게 선 어떤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앤시아의 건강이 좋아진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혈색이 좋아졌지.”

“그쵸? 예전 같았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누워서 쉰 것만으로도 살아났잖아요.”

“그렇군.”

리샤르의 손가락이 뺨과 눈 밑을 천천히 쓸어 만졌다.

부드럽게 풀어진 푸른 눈이 입술과 콧등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 괜스레 마른침이 삼켜졌다.

얼굴 여기저기를 가볍게 문지르던 손끝이 입술 위에 한참을 머물렀다.

‘키스하고 싶어.’

이런 앤시아의 마음을 알아챈것일까. 아니면 리샤르의 감정에 앤시아가 동화된 것일까.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따뜻한 숨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다정하게 시작한 키스가 조금씩 열기를 머금었다. 끌어안은 단단한 팔이 앤시아를 아프지 않을 만큼 옭아맸다.

점점 뜨거워지는 리샤르의 열기에 앤시아는 이대로 휩쓸리고 싶었다. 그러나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앤시아를 공주님이라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혹여나 황태자가 꼬투리를 잡을까 싶어 허둥지둥 감싸 안았다. 아이들의 입을 한 번에 막을 수는 없어 모두 끌어당긴 것뿐이었는데, 주변에서 보기엔 아이를 좋아하는 공작 부인처럼 보였는지 여기저기서 사랑스럽다는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어서 예쁜 아기님을 보시라며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자상하고 푸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중에는 리샤르도 있었다.

앤시아가 안아 든 작은 어린아이를 보던 리샤르의 눈이 얼마나 자상했는지 그는 알까.

누구도 그를 피에 미친 공작이라고 부르지 못할 만큼 포근한 미소였다.

앤시아가 결코 그에게 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미소였기에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면 확신이 필요했다.

이건 백작가의 사람들을 사랑했음에도 끝내 그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였기에.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최대한 가볍게 말을 꺼냈으나 리샤르의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부인이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어째서 이리 가슴이 덜컹거리는지 모르겠군. 황제의 부름에도 이리 놀라지는 않을 거요.”

그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공작님.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마 저는 아이를 가지지 못할 거예요.”

리샤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런데 공작님의 사랑은 놓고 싶지 않아요.”

이어진 앤시아의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리샤르의 푸른 눈이 세차게 일렁였다.

“알아요. 저 욕심쟁이라는 거.

그래서 처음부터 못되게 굴면서 모두에게 미움받고 싶었는데”

“누구에게 미움을 받으려 했다는 거지?”

“모두에게요.”

앤시아의 차분한 답에 리샤르는 어린아이의 투정을 보듯 웃음을 보였다.

“그건 애초에 실패할 계획이었군.”

“아니거든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요.”

“부인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웬만한 노력은 무의미했을 테지.”

그건 인정한다.

앤시아 본인조차 자신의 치명적인 사랑스러움에 백기를 들었다.

목욕을 마친 후 자신의 모습은 관능적이지 않을까 싶어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울 정도였으니.

좋은 분위기였으나 앤시아는 이미 입에서 나와 버린 두려움을 다시 이어 갔다.

“앞으로 죽 저와 함께하시면 후 계를 보실 수 없을 거예요. 보고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을 거고요.”

“알고 있소.”

“그리고 전, 공작님이 꽤…

많이…… 좋아졌거든요. 그래서 남하고 나눌 생각 없어요.”

“그런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여인과 공작을 나눌 생각도 없다.

결국, 후계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앤시아의 말에도 그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그의 다정함에 앤시아는 저절로 백작가를 떠올렸다.

앤시아에게 더없이 다정했던 백작 부부와 나단. 그들의 크나큰사랑에도 결국 넘지 못한 벽은 아이였다. 그렇기에 앤시아는 후사 문제가 중요한 귀족 간의 결혼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당신이 괜찮다고 한다면, 나도 용기를 낼게.”

앤시아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네. 공작가에 후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거 아닌데요.

그래도 정부나 애인, 누구와도 공작님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리샤르의 얼굴에 선명한 기쁨이 드러났다.

‘당신의 대가 끊기는 거라고,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렇게 마냥 흐뭇한 눈으로 볼 때가 아닌데.’

백작가에 있을 때는 사랑받기 위해 모습을 꾸몄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내 솔직한 모습도 받아 주니까.”

리샤르 앞에서 본심을 몇 번이고 드러냈음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 앤시아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주는 그의 앞에서는 본심을 보이고 투정 부릴 수 있었다.

리샤르의 애정 넘치는 눈을 마주하고 있자 더 경고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그의 단단하고도 온전한 사랑 앞에 뻔뻔하게 요구하고 싶었다.

“약속해 주세요. 저만 사랑할 거라고.”

“맹세하지.”

“약속이면 돼요.”

언젠가 상황이 달라진다 해도 지금 당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거니까.

약속으로 충분했다.

리샤르의 푸른 눈이 더없이 진중했다.

누워 있던 리샤르가 앤시아를 안아 함께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아 마주 본 채 리샤르는 앤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나의 아내이자 공작가의 안주인인 앤시아 그윈티드, 그대만이 나의 아내이자 연인임을 약속하지.”

양손을 붙잡아 손끝 하나하나에 입 맞추며 리샤르는 몇 번이고 앤시아를 향해 고백했다.

“그대를 사랑해.”

손등에 눌리는 부드러운 입술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대를 가지고 싶어.”

푸른 눈에 담긴 정염에 앤시아는 절로 몸이 움츠러들 만큼 오싹함을 느꼈다.

“앤시아.”

리샤르의 뜨거운 눈길만으로도 앤시아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허락을 기다리듯 몇 번이고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추며 앤시아를 간절히 불러왔다.

그의 사랑에 답하고 싶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양팔을 뻗어 리샤르를 끌어당겼다.

“저도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모든 걱정을 잊을 만큼 간절한 마음이었다.

*

공작 부부가 진심을 나누는 시각.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축제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그윈티드 저택에서 유일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은 지하 감옥에 소리 없이 그림자가 침입했다.

애초에 저택으로 침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보 장치와 기사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지하 감옥까지 외부 침입자가 오기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4명의 병사와 고문관만이 자리를 지켰는데, 고문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경비를 서던 병사들을 제압한 그림자가 유유히 감옥 문을 열었다.

감옥 안의 유일한 죄인인 로사마일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로사는 추위를 피하고자 몸을 웅크린 채로 자신의 주인인 공작을 생각하고 있었다.

고문관은 의무적으로 몇 가지를 물었을 뿐이다. 고문의 강도는 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인 공작의 남모를 배려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로사의 정신 승리였을 뿐이다. 점점 그 누구도 로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설마 공작이 자신을 버리려는 걸까. 누구보다도 공작가를 위해 힘써 온 자신을.

그럴 리 없다. 리샤르가 어릴 때부터 공작가를 위해 온 자신을 이대로 내칠 리 없었다.

로사는 끝까지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일어나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로사는 목소리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는 존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로사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기는 했으나, 고문을 당한 것치고는 제법 멀쩡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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