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4화.
로브를 쓰고 있음에도 남다른 기운을 풍기는 이가 로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던 상체를 바로 한 로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구…….”
“그리 도움을 주었건만, 눈앞의 조력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둔한 이였군.”
우아하고 위엄 있는 남자의 핀잔을 들은 로사는 곧바로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머릿속에 빛이 터진 듯했다.
“그, 그분이신가요?”
외모도 이름도 모른다.
어느 날 전해진 한 통의 편지는 영지 일에 골머리를 앓던 로사에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아 처음에는 무시하고 의심했으나, 시험삼아 몇몇 내용을 참고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편지의 지시를 따르다 보면 그게 결국 영지를 위한 이득으로 돌아왔다. 해가 갈수록 로사는 편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의 편지대로 일을 진행했으나 로사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역시 저를 도와주시는 거군요.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믿고 있었습니다.”
열린 문을 향해 기듯이 몸을 움직이는 로사의 눈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게 길을 제시해 주세요. 공작님께서는 외부인에게 홀려 제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외부인?”
공작 부인을 외부인이라 칭하자비웃음을 보이는 그분의 태도에 로사가 다급히 정보를 풀었다.
“이전에 지시하신 대로 평민 여인은 주인님의 아이를 냈습니다.
공작 부인에게는 추문을 붙이려고 애쓰고 있으니 얼마 가지 않
“아…….”
“참으로 쓸모없구나.”
“예?”
책망하는 말투임에도 품격이 느껴지는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평민 여인은 아이를 품지 않았다.”
“예? 하, 하지만.”
로사도 실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분 앞에서 좋은 결과를 알리고 싶어 모른 척 굴었다.
“공작 부인에게 추문이라. 지금 그녀가 영지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르는군.”
“그럴 리가요.”
“하…… 이토록 쓸모없는 이에게 공을 들였군. 그간 버린 시간이 아깝구나.”
로브를 입은 남자가 뒤돌아서자 검은 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검을 빼 들었다.
로사는 이대로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전 쓸모가 아주 많습니다. 뭐든,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겁에 질려서도 필사적으로 제할 말을 하는 로사의 태도에 로브를 쓴 남자가 손을 들어 검을 멈추게 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걸 증명한 것 같은데.”
“그간 당신께서 보내 주신 작은 정보들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아시잖습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이라니, 호칭에 주의하라.”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화를 내자 로브를 입은 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흐음……. 저택의 숨겨진 통로 같은 걸 알고 있나?”
“숨겨진 통로라면 …”
“모르고 있군?”
“아, 압니다. 저는 시녀장입니다. 이 저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공작의 인장을 가져와.”
“인장……을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걸로 그대의 실수를 눈감아 주겠다는 거지. 어때? 이 정도면 자애로운 제안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브를 쓴 남자가 옆으로 비켜 서자 로사는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사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고, 이들의 정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깥으로 나온 로사는 주변을 살폈다. 아직 사용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길로 들어섰다.
무거운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공작의 인장을 가져오라니.
저 남자는 누구일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이 느껴지던 남자의 구두는 먼지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살짝 보인 하얀 바짓단 역시 정확하게 몸에 맞춘 듯 조금의 부족함이나 과함도 없었다.
저런 이가 영지 일에 꾸준히 조언을 해 왔다고? 공작가의 대소사까지 참견하고?
로사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손을 들어 보이던 남자의 소매 단추 무늬. 아까는 정신이 없어 놓치고 말았지만, 제국민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을 문양.
황가의 문양이었다.
‘인장은 함정이야.’
허둥지둥 걸어가던 로사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간 공작가에 도움을 준 이가 황가의 사람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황족은 공작가와 적대 관계다.
공작의 인장을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황족의 조언인 줄도 모르고 로사는 너무 많은 일을 저질러 버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로사는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간 도움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로사는 자신이 벌인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이 일이 공작가에 큰 누가 될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님께 알려야 해.’
평생 공작가를 지켜 왔던 로사의 사명감이 두려움을 이겼다.
로사는 집무실로 가던 걸음을 바꿔 리샤르의 방으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 갈 수도 있었지만,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차라리 들키는 게 낫겠다 싶어 사용인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말을 전해야 했다.
황족이 영지에 뿌린 많은 일이 있음을. 그 기록이 있는 장소를 알려야 했다.
그때, 방향을 바꿔 멀어지는 로사의 등을 향해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단검을 던졌다.
“컥!”
로사는 등을 관통해 오는 믿기지 않는 통증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소리를 내고 싶어도 숨조차 쉴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대를 가둔 공작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었나? 그 충성심이 내게 향했다면 한동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황가의 문양을 볼 수 있도록 했음에도 로사의 선택은 공작이었다. 그 탓에 몇 시간이라도 더 보전할 수 있었을 목숨을 잃게 되었다.
“다…… 당신…….”
“그대의 헌신이 그동안 참 도움이 됐어. 덕분에 마수의 생태계 교란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 실험은 성공적이야.”
무슨 소리인가.
로사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말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먼 길 가는데 궁금증 하나 정도는 풀어 주는 것도 좋겠지. 낮은 기온에서도 잘 자라도록 계량된 열매를 추천해 줬던 거 기억나나?”
죽음의 기운이 깃들던 로사의 눈이 크게 흔들었다.
겨울이 되면 영지민들의 일감과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마석이 넘쳐나면서 공작가에 쌓여 가는 금화와 별개로, 영지민들 스스로 삶을 개선할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공작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몇 년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고민하던 공작을 지켜보기만 하던 어느 날. 겨울 열매에 대한 정보와 씨앗이 든 편지가 날아왔다. 폐기될 마석을 가루로 만들어 씨앗과 함께 심으면, 얼어붙은 땅에도 뿌리를 내리는 신기한 식물이었다. 이런 활용법은 외부로 마석을 유출할 수 없는 그윈티드 영지에서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게 마수 이상 증식과 관련이 있다고? 내가 영지를 위해 했던 일들이?
로사의 눈에는 깊은 괴로움이 깃들었다. 로브를 입은 남자, 카일루스가 손을 흔들었다.
“고통 없이 보내 주도록.”
이미 끔찍한 고통을 전부 맛보여 준 후였기에 의미 없는 자비였다.
소리도 없이 검이 휘둘러지고, 시녀장의 눈이 빛을 잃기도 전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점심을 가지고 부부 침실을 찾은 하몬은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선 하녀들을 보고 당황했다.
“아침도 거르셨는데 점심이라도 드시게 해야 하지 않은가?”
“주인님께서 절대로 마님께서 먼저 찾기 전까지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희도 걱정되지만, 주인님 명이니 따라야지요.”
저마다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는데 비앙카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몸이 안 좋으셔서 설렁줄을 못 당기시는 걸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엘리가 줄리를 돌아봤다. 줄리는 입술을 깨물며 걱정스러워했다.
“이럴 때야말로 우리가 돌봐 드려야 하잖아.”
단호한 비앙카의 말에도 엘리와 줄리는 문만 쳐다볼 뿐이었다.
두꺼운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몸이 안 좋으셔서 설렁줄을 못 당기시는 걸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엘리가 줄리를 돌아봤다. 줄리는 입술을 깨물며 걱정스러워했다.
“이럴 때야말로 우리가 돌봐 드려야 하잖아.”
단호한 비앙카의 말에도 엘리와 줄리는 문만 쳐다볼 뿐이었다.
두꺼운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작은 기척이라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간식을 가지고 다시 오마.”
하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서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을 향해 비앙카가 다가갔다. 설마 하는 순간 비앙카의 손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비앙카!”
계속 문을 노려보던 비앙카가 결국 일을 친 것이다.
문이 열리자 말릴 것처럼 달라붙던 엘리와 줄리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다. 항상 마석 조명으로 은은한 빛을 품었던 실내가 어두웠다.
“너 미쳤어? 빨리 문 닫아. 이러다 너 큰일 나.”
“난 마님이 더 중요해.”
“물론 나도 마님이 중요해. 하지만 주인님의 명이 공작가에서는 절대적이야.”
“내겐 아니야.”
“비앙카!”
비앙카가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말리던 엘리도 주춤주춤 뒤를 따랐다.
부부 침실 안은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처져 있어 아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침대 위 곤히 잠든 앤시아가 보였다. 하녀들이 침대 곁으로 다가가자 마석 조명이 자동으로 점등했다.
모두의 걱정과 달리 은은하게 비치는 빛 아래 앤시아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보아 온 사랑스러운 주인마님의 잠든 모습에 전담 하녀들이 안도했다.
약간 구겨진 이불을 잘 덮어 주기 위해 다가선 엘리는 침대 위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불투명한 마석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다 쓴 치유 마석이 왜 이런 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