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5화.
수명을 다한 치유 마석은 쓰레기와 다를 바 없었으나 마석 관리자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무엇보다 앤시아가 뒤척이다 불편해질 수 있어 마석을 주워 들었다.
“나가자.”
조용하지만 단호한 줄리의 말에 엘리는 손에 쥔 마석을 한쪽에 내려놓고 재빨리 문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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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앙카 역시 앤시아에게 아무 일도 없는 걸 확인했기에 미련없이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소매를 잡는 미약한 힘에 비앙카는 앤시아의 곁에 도로 앉았다.
“마님?”
비앙카의 목소리에 앞서 문으로 향하던 두 사람이 놀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곱게 감겨 있던 앤시아의 눈이 가늘게 뜨여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세 사람을 지나 다시 비앙카에게 머문 앤시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반응에 비앙카는 방긋 웃으며 소매를 잡은 앤시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좋은 아침, 아니 점심이에요, 마님.”
“점심……?”
“네. 더 주무셔도 되지만, 혹시 배고프지 않으세요? 식사를 준비할까요?”
“음…… 아니.”
지나친 피로감에 좀처럼 잠에서 깨지 못하던 앤시아는 익숙한 하녀들의 기척에 천천히 깰 수 있었다.
다정하고 예쁜 목소리. 상냥한 비앙카.
“나 비앙카한테 할 말이 있는 데…….”
“네, 말씀하세요.”
앤시아는 리샤르와 밤을 보내고 난 뒤 비앙카를 보는 일이 조금은 두려웠다.
여긴 원래 네 자리인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는 걸 고백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
리샤르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고 그와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날부터 쌓여 온 비앙카를 향한 부채감이었다.
그러나 비앙카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에 앤시아는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꿈에서…… 비앙카랑 공작님은 은원래 연인이 될 거였어.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려서, 내가 비앙카 자리를 차지한 게 미안해.”
비겁하지만 꿈을 핑계로 삼았다.
“여긴 원래 네 자리인데. 비앙카, 넌 하녀가 아닌…….”
“아니에요, 마님.”
“으응?”
단호한 비앙카의 대답에 몽롱했던 앤시아의 머리가 단번에 맑아졌다.
비앙카는 자신만만하게 제 뜻을 주장했다.
“전 절 좋아해 주는 사람이 좋아요.”
그러면서 붙잡고 있던 앤시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니 마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하녀가 좋아요. 전 마님이 너무 좋…… 아야!”
찰싹 소리와 함께 비앙카의 폭주를 막은 엘리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머, 비앙카가 잠이 덜 깼나 봐요. 데려가서 찬물 세수라도 시킬게요.”
“마님께서 조용히 쉬실 수 있도록 물러가 있겠습니다.”
사이좋아 보이는 전담 하녀들의 모습에 앤시아는 마음속 불편하게 남아 있던 앙금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몇 번이고 원작과 달라졌음을 깨달았으면서 또 이렇게 마음의 짐을 덜어 내야만 안심이 됐다.
“응, 고마워. 그럼 조금만 더 잘게.”
밖으로 나가려던 엘리는 이왕 들어온 김에 사용이 끝난 치유마석을 챙겼다. 그러면서 아직 눈을 감지 않은 앤시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님, 치유 마석을 여러 개 사용하셨는데 주인님이 사용하신 거로 보고 하면 될까요?”
여간해선 마수 사냥으로 다칠 리샤르가 아니었으나 치유 마석을 이만큼 사용한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하녀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볍게 질문한 건 그만큼 앤시아와의 거리감이 적어서였다.
편안하게 건넨 질문에 앤시아는 좀처럼 답을 하지 못했다.
마석을 집어 들던 엘리는 양손으로 들기에 개수가 많아 팔에 얹어 가며 숫자를 셌다.
“넷…… 다섯. 아, 바닥에도 더 있었네요. 주인님께서 많이 다치셨나 봐요. 시트를 갈아 드릴까요?”
“아니! 괘, 괜찮아. 나중에 부탁할게.”
황급히 이불을 펼치며 도리질하는 앤시아의 얼굴이 불에 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마님, 얼굴이 새빨개지셨어요.”
“열이 오르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그런 거 아냐! 정말 괜찮으니까 일단 다들 나가!”
당황한 앤시아의 거절에 전담하녀들은 충격 받은 얼굴로 조용히 물러났다.
앤시아가 저런 식으로 격렬하게 자신들을 거부한 적이 없었기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실 밖에 옹기종기 모여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정작 앤시아는 엘리가 모아 쌓아 둔 빛바랜 치유 마석을 보고 이불을 팡팡 걷어차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저, 저것들을 내가 치워 놨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얼굴을 한 엘리의 질문에 앤시아는 도저히 답할 수 없었다.
콧구멍에 호박을 넣는 수준의 기인열전을 밤새 몸소 경험하느라 귀한 치유 마석을 썼노라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으아, 저걸 보이다니.”
리샤르의 설득과 시행착오를 거쳐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했는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을 칠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체력이 짐승 수준이라 따라갈 수가 없었고.
치유 마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몇 날 며칠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처음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즐겁기만 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밤은 다른 생각은 할
“아, 이불. 난리 났을 텐데.”
뒤늦게 떠올린 앤시아가 서둘러 이불을 들쳐 살폈다. 다행히 의식이 없는 사이 침구를 바꿨는지 깨끗했다.
무엇보다 저 세 사람이 전혀 모르는 눈치인 걸 보아 침구를 치운 건 전담 하녀들이 아닌 듯했다. 그녀들이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보이고 싶지 않아 안도했다.
“으아, 민망해.”
그리고 몸 구석구석 근육통이 느껴졌다.
치유 마석은 상처에나 효과가 있지 과도한 움직임으로 인한 근육통에는 효과가 미미한 듯했다.
“하다못해 마석을 한두 개만 썼어도 이렇게 민망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워 앤시아는 애꿎은 이불만 팡팡 두드렸다.
문밖의 하녀들은 방 안에서 작은 투덜거림조차 들리지 않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참을 서성였다.
***
“등 뒤에서 단검을 던졌습니다.
심장 아래를 찔렸을 때는 살아있었을 겁니다. 그 뒤에 여길 벤검은 흔히 사용하는 장검으로 오른손잡이입니다.”
상처를 분석한 아서는 시신에 천을 덮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죽이려면 감옥 안에서 죽이는 게 더 수월했을 텐데 발견된 장소는 정원수풀 사이였습니다.”
로사 마일의 시신을 발견한 건 순찰하던 병사였다.
사망 추정 시간은 자정쯤으로 조경용으로 심어 둔 수풀과 어둠에 가려져 새벽 순찰에서야 발견됐다.
“발견이 너무 늦었군. 지금보다 순찰 인원을 늘려 저택 구석구석 빠짐없이 경계할 수 있도록 전달해.”
“예, 각하.”
“이건 경고다. 안일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가차 없이 내보내.”
“명심하겠습니다.”
천으로 덮인 시신을 내려다보는 리샤르의 푸른 눈이 어둡게 가라 앉았다.
로사 마일. 시녀장은 아내에게 유독 혹독하게 굴었으나 그전까지는 공작가를 위해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공작가 안에서.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귀족의 시신을 처리한다고 표현한 것은 로사가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부를 노린 폭파 사건의 주범이 로사라는 확실한 증거와 증인 모두 확보한 상태였다.
이대로 마수의 숲에 내던져도 누구도 불만을 말하지 못하리라.
“각하?”
그러나 리샤르는 망설였다. 로사에 대한 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간 앤시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리샤르는 그녀가 생각하는 로사에 대한 처벌 수위가 무척 낮음에 당황했다.
나의 아름다운 아내는 타인을 미워하는 법을 모르는 걸까? 싶을 만큼.
아마 그녀는 자신을 항상 괴롭히고 미워하던 로사의 죽음도 놀라거나 슬퍼할 것이다.
“죄인이기는 하나 정식 재판 전에 사망했으니 귀족의 예를 갖춰마일 남작가로 보상금과 함께 보내.”
“예, 각하.”
“단, 죄인임을 잊지 말라 입단 속을 시키도록.”
로사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무는 일은 없을 것이나, 시녀장의 죽음이 한동안은 저택 안에 퍼지지 않기를 바랐다.
한없이 여린 아내의 하루에 괴로운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지금 가장 의심되는 인물을 찾아가야 했다.
아무리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해이해졌다 하나 중간중간 기사들도 경계를 서 왔다. 외부 침입흔적 역시 찾지 못한 것으로 보아 매우 뛰어난 암살자이거나 내 부인의 소행이었다.
전자는 경계 마석이 반응하지 않았으니 기각. 남은 건 현재 공작가 안에 머무는 외부인.
“황태자에게 가겠다.”
리샤르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를 본 아서는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면 지독하게 수상했다.
길드에서 통신구를 사용하는 바람에 황궁까지 축제 소식이 전해졌지만, 결혼식 때도 오지 않은 황태자가 갑자기 방문했다.
정확한 목적과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로 축제가 끝날 때까지 쭉 머물렀다.
고작 영지민이나 외부 용병들에게 민심을 사려고 왔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고작 시녀장 하나 죽이고자 축제가 끝난 마당에 저택에 남아 있었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리샤르는 이 일을 묻어 둘 수 없었다.
황태자가 머무는 곳에 도착하자 문 양쪽을 지키고 서 있던 근위기사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리샤르가 여럿의 기사들을 대동하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뵈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