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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5화 (9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6화.

근위기사가 안에 알리기도 전에 근위기사단장 폴칸이 문을 열어주었다.

상당한 인원의 기척을 이미 눈치챈 후였기에 폴칸의 기세가 흉흉했다.

“그윈티드 공작.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 저택에서 시녀장이 살해당했습니다. 절차상 외부인의 조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지금 황가의 검이자 명예로운 황실근위대를 한낱 범죄자 취급하려는 거라면 아무리 공작이라해도 가벼이 넘길 수 없습니다.

이 판단에 후회가 없으실지 잘 생각해 보셔야 할 겁니다.”

언제라도 검을 빼 들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낸 건 느긋하기만 한 황태자 카일루스의 목소리였다.

“어차피 떠나기 전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으니 안으로 들이게.”

짐짓 평온한 말투였으나 정작 리샤르만 안으로 들이고 다른 기사들은 바깥에서 근위기사와 대치하게 두었다.

창밖을 보고 있는 카일루스를 향해 리샤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다가서자 폴칸이 따라붙었다.

리샤르가 세 걸음 앞까지 다가왔을 때 카일루스는 불쾌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의 기사들을 조사해 보고 싶다는 건가?”

“절차상 용의자에서 배제하기 위함입니다.”

“황가의 명예를 짓밟고, 황태자인 나의 앞을 가로막아서까지?”

카일루스의 앞을 가로막기는커녕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게이 트까지 가는 길을 훤히 열어 두었다.

“공작의 기세등등함을 보니 근위대를 구금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조사는 정중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겁니다.”

어차피 이 일로 범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은 단서라도 발견한다면 그때는 모든 걸 쏟아부어 진상을 파헤칠 생각이었다.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공작가 안에서 벌어진 일을 리샤르가 눈감고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카일루스에게 새겨 넣는 일이었다.

이를 모를 일 없는 카일루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황족을 의심하다니. 이 무례를 어떻게 보상하려고 그러는 건가.”

“황태자 전하께 누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기사들을 상대로 몇 가지 질문과 가벼운 신체검사를 하는 정도입니다. 그 과정에 무례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도 확신한다면 이 몸부터 조사하지 그래.”

양팔을 벌리며 뻔뻔하게 구는 카일루스의 앞을 폴칸이 가로막았다.

“전하, 차라리 공작의 만용을 꾸짖으시고 저자를 막지 못한 저희를 벌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 앤시아가 있었다면 쇼를 한다며 팝콘을 찾았겠지만, 리샤르는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카일루스의 붉은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절차상 찾아온 것일 뿐. 거절하셔도 됩니다.”

리샤르가 한발 물러서자 카일루스 역시 가벼운 웃음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떠나기 전 공작 부부와 함께 만찬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녁까지 시간은 넉넉하니 나의 기사들이 그대의 기사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반대하지는 않겠네.”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부터 먼저 확인하십시오. 황태자 전하를 지키는 데 소홀함이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

당당하게 앞서는 근위기사단장의 태도를 보아 아무래도 이번 조사는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지어질 듯 보였다.

그렇다 해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공작, 이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으어어…… 죽겠다, 진짜.”

정신을 차리고 곁에 리샤르가 없는 것에 서운함을 가진 것도 잠시, 갓 태어난 사슴처럼 부들 거리는 다리를 보며 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근육통에 끙끙대던 앤시아는 리샤르와 밤을 보낸 일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지만, 자신을 향해 넘치는 애정을 가진 하녀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결국 고백하고 말았다.

치유 마석이 공깃돌 굴러다니듯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이유를 뒤 늦게 알아챈 엘리는 앤시아만큼이나 새빨간 얼굴로 묵묵히 주변을 정리했다.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하던 비앙카는 뒤늦게 상황파악을 끝내고 짐승 공작이라며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다.

앤시아는 이 일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으나 저녁 만찬 소식에 어떻게든 이 근육통을 해결해야 했다.

“몸이 이래서 스푼도 못 들 것 같은데.”

손을 들자 손끝부터 달달 떨리는 작은 손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마님.”

“아, 고마……꺅!”

소매까지 걷어붙인 비앙카가 앤시아의 팔을 가볍게 움켜쥐는 순간 비명이 튀어나왔다.

“무식한 힘 자랑 좀 조심하라고 했지. 마님, 제가 안 아프게 마사지해 드릴게요.”

“응. 부탁할……”

엘리가 비앙카를 타박하며 솜털처럼 부드럽게 앤시아의 어깨를 붙잡자 어김없이 앓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앤시아가 너무 아파하자 어찌할 줄 몰라 하던 엘리는 근육통에 바르는 약을 가져와야겠다며 밖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연약한 앤시아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된 비앙카 역시 약초를 조합해 오겠다며 달려 나갔다.

끙끙대는 앤시아를 지켜보던 줄리는 결심을 한 듯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마님, 제가 근육통에 효과 빠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게 평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정말? 뭔데? 마사지라면 좀 아파도 참을 수 있어.”

“마사지는 아니지만, 마차를 타고 나가셔야 하는데 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차, 진동. 온몸의 근육통을 자각시킬 것이 뻔했으나 만찬 중 포크를 떨어트려 황태자의 빈축사느니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나았다.

“응, 부탁할게.”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어? 엘리와 비앙카는?”

“그 애들도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

줄리의 부축을 받으며 앤시아는 하녀들만 알고 있는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

“워터파크…….”

“예?”

“아, 아냐. 정말 멋진 장소라서 놀랐어.”

줄리와 함께 근육통을 단번에 낫게 해 줄 장소에 도착한 앤시아는 눈앞에 보인 목욕탕과 놀이 터를 합친 공간에 워터파크를 떠올렸다. 물론 규모는 작디작았지만, 몇 년 만에 보는 익숙한 풍경에 괜스레 설렜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뿌연 수증기와 약초 냄새가 확 덮쳐 왔다. 냄새만으로도 피로가 날아갈 것 같은 강렬함에 앤시아는 감탄했다.

이런 곳은 책에 나와 있지 않아 알지 못했다. 여러 개의 탕이 모여 있는 이곳은 어딜 봐도 대중 탕처럼 보였다.

“각각 효능이 다른 약재를 넣은 약초 탕입니다.”

“그래서 약초 향이 나는 거구나.”

직원의 도움을 받아 얇은 가운으로 갈아입던 앤시아는 텅텅 빈 내부를 보고 의아해했다.

줄리가 늦으면 안 된다고 서둘렀기에 손님이 없는 것이 이상해서였다. 줄리는 그런 앤시아의 의문을 알아챈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해 주었다.

“하루 한 번 물을 가는데 지금이 그 시간입니다. 이왕이면 마님께서 첫 물에 들어가시면 좋을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와, 줄리 센스 멋져.”

물론 한국의 대중탕에 익숙한 앤시아는 누가 들어가 있든 상관없었지만, 줄리의 배려가 고마웠다. 앤시아가 가까운 탕에 들어가려 하자 줄리가 더 안쪽을 제안했다.

“추가금을 내면 한 시간 정도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여 특별히 근육통에 좋은 약재를 많이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고마워, 줄리.”

손을 넣어 보니 제법 뜨거웠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담그자 어흐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까지 담그자 숨이 가빠와 살짝 상체를 탕 위에 기대자 벌써부터 몸이 노골노골 녹는 듯했다. 약초와 별개로 이 정도로 몸을 지지면 충분히 움직일 만했다.

치유 마석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올 엄두도 못 냈을 터.

앤시아는 아깝다고만 생각하던 마석의 쓰임을 인정했다.

노곤해지던 앤시아는 여전히 목까지 꽉 채운 하녀복 차림으로서 있는 줄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줄리, 덥지 않아? 바깥에서 기다려도 돼.”

“아닙니다. 호위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니 하녀인 제가 지켜야 합니다.”

“그럼 옷이라도 벗………예?”

벗고 서서 지키라는 것도 이상했다. 벗을 거라면 차라리 함께 탕을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아, 그러네. 줄리도 들어와.”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모시는 분과 한 탕을 쓰다니요.”

“에이,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랑도 쓸 생각으로 온 거였잖아.

줄리 덕에 혼자 독식하고 있지만, 더운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응?”

앤시아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 생긋 웃었다.

망설이던 줄리는 아무래도 텁텁한 공기에 옷까지 껴입고 있는 건 힘들었는지 마지못해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대신 앤시아가 보이는 다른 탕에 들어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안 좋을테니 모래시계를 뒤집어 가며 몸을 담그고 있던 앤시아는 손이 떨리지 않음을 깨닫고 놀라워했다. 혹시나 해서 물속에서 발차기를 해 봤는데 근육통이 많이 나아진 게 느껴졌다.

“와, 줄리! 여기 최고야! 벌써 안 아프기 시작했어.”

“네. 10분 정도 쉬셨다가 다시 몸을 담그시면 더 효과가 좋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줄리……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변했는데 괜찮아?”

“엘리나 비앙카가 도착했을 것 같으니 교대해도 되겠습니까?”

“응, 꼭 교대해야 할 거 같아.”

“감사합니다, 마님.”

살았다는 얼굴로 밖으로 향하는 줄리를 보며 앤시아도 잠깐 열을 식힐까 싶어 탕 밖으로 나왔다.

“와, 약초 탕이란 거 효과가 굉장하구나.”

부축을 받아 들어온 곳을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좋아졌다. 한 번 더 몸을 담그면 저녁 만찬쯤은 가뿐할 것 같았다.

젖은 가운 위로 수건처럼 도톰한 가운을 걸쳐 입은 앤시아는 신기한 듯 탕에 걸린 말린 약초들과 장식들을 기웃거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앤시아는 가벼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 시간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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