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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6화 (9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7화.

예상보다 순순히 조사에 협조한다 싶더니 지리멸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예로 어젯밤 몇 시에 잠들었냐는 질문에 ‘기사는 잠들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거나, 외출 기록이 있는 기사에게 어디를 다녀왔냐 물으니 ‘몸이 어디에 있는 제 심장은 황태자 전하와 함께합니다. 따위의 답을 하며 무의미한 공방이 이어졌다. 몇 번이고 질문을 바꿔 가며 시간을 들인 끝에야 제대로 된 답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고고한 척 시를 읊는 듯한 근위기사들의 턱을 칼등으로 후려치고 싶은 걸 참아 내던 리샤르는 해가 기우는 걸 보고 이를 갈았다.

이제 마지막 기사의 증언만이 남았다. 리샤르는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홀로 두고 온 아내가 걱정되어 초조함이 배가됐다.

새벽 내내 끙끙대는 아내를 살피고 보듬다가 시녀장의 사망 소식에 자리를 떠야 했다. 힘든 밤을 보낸 앤시아를 두고 나오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지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호위의 추가 배치는 물론, 하녀들까지 불러 문 앞에 대기시킨 후에야 침실을 나설 수 있었다.

당장 앤시아의 곁으로 가고 싶지만, 저택을 안전하게 유지해야 그녀의 안전 역시 확실해진다.

마지막까지 모두의 증언을 듣고 자료를 수집한 보좌관이 어긋나거나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죽 살펴 리샤르에게 넘겼다.

“성실한 기사의 표본 같군.”

마치 말을 맞춘 것처럼 빈틈없는 일정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깊이 파고들면 뭔가 나올지 모르나, 상대는 황태자와 그의 기사단이었다. 여기서 더 무언가를 얻으려면 일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황족이 언제 다시 공작가에 방문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는 더욱 경계를 강화하리라 결심하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이쯤에서 이 일은 덮어 두어야겠군. 자료는 집무실에 두도록해.”

“예, 각하.”

아쉬움 가득한 리샤르의 한숨섞인 결론에 아서와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모든 게 정리된 건 아니지만, 리샤르는 앤시아가 보고 싶었다. 침실로 향하려던 리샤르는 근위기사단장 폴칸의 방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이 이 무례에 대해 사과를 하겠다면 지금 이 적기임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어차피 만찬 때 만날 수밖에 없는데, 굳이 지금 리샤르를 불러들이는 게 석연치 않았다. 그렇다 한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현 상황에서 리샤르가 황태자의 호출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의 곁을 비우면서까지 공작을 찾아온 의미를 모르지는 않겠지요.”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황태자였다. 억지로라도 사과를 하기 위해 리샤르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뜻밖에 카일루스는 리샤르를 곤욕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조사를 충분히 했다면 더 머물 이유도 없으니 만찬을 가지지 않고 당장 떠나겠다고 했다.

카일루스가 일찍 떠난다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황족의 배웅은 공작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못마땅함을 애써 숨긴 리샤르가 아내를 부르기 위한 전언을 보내려 하자 카일루스가 이를 막았다. 급히 떠나는데 번거롭게 할 것 없다며 리샤르의 배웅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배려심을 보였다.

수상하다.

만찬을 준비하라고 하더니 갑작스럽게 떠나겠다는 행동도, 사사건건 앤시아를 불러들이려던 것과는 달라진 태도도 불길할 만큼 수상했다. 하지만 이제 와 황태자를 조사하거나 붙잡을 명분은 없었다.

리샤르는 준비된 흑마 위에 올라 아서를 불렀다.

“아서 모겐스, 아내에게 황태자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해 주게. 나올 필요는 없다는 것도.”

“예, 각하.”

아서는 혹여나 무슨 일이 있을 때 바로 대처할 수 있는 행동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리샤르가 앤시아의 곁으로 갈 수 없는 지금,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아서를 보낸 직후, 새하얀 마차를 이끄는 백마의 곁에 공작의 흑마가 나란히 함께했다.

백과 흑, 대비되는 두 필의 말이 황족의 마차를 지키듯 나아가는 모습은 영지민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장관이었다.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물론 추위에 꽁꽁 닫혀 있던 창문들이 죄다 열리며 모습을 지켜봤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고 그 속엔 황태자에 대한 호의와 공작가와의 유대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묵묵히 게이트까지 황태자의 마차를 인도한 리샤르는 그 앞에서 대기 중인 어린 황족들을 보고 허리를 숙였다.

일전, 앤시아가 황태자에게 시종 하나 정도 데려오면 안 되냐며 투덜댔을 때 했던 변명과 달리, 게이트를 통해 기사들을 이 동시킨 건 황태자가 아니었다.

황족의 핏줄을 잇기는 했으나 후 계자 근처에도 가지 못한 어린 황족들이 몇 번이고 기사들과 함께 게이트를 넘나들었던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황태자를 기다리며 추위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리샤르가 지닌 황족을 향한 절대적인 적의조차 수그러들 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어린아이가게이트를 이용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걸 뻔히 알 텐데도 후계에서 동떨어진 황족의 쓸모란 이 정도뿐이라는 듯 카일루스에겐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윈티드 공작, 즐겁게 지내다 가네. 마무리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지만, 동부의 꽃을 본 덕에 눈이 즐거운 방문이었네.”

마지막까지 앤시아를 언급하는 건 리샤르를 긁어대 기 위함임을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혹 공작 부인과 함께 황궁을 방문한다면 내 친히 아우 중 하나를 보낼 테니 사양하지 말게.”

리샤르가 대답 대신 조용히 쳐다보기만 하자 카일루스는 가까이에 있던 소년을 툭 건드렸다.

“예? 아, 예!”

어린 소년 하나가 카일루스의 손에 어깨를 잡힌 것만으로도 추위에 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열이 오를 만큼 기뻐했다.

“시, 시켜만 주시면 성심껏 모실게요.”

리샤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는 태도가 시종으로 보일 만큼 비굴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당황한 눈빛이 어디를 보아도 그 잘난 황족의 핏줄을 이은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쓸모가 없으면 아무리 황족이라도 저런 취급을 받는 건가.’

리샤르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인내하며 게이트 앞으로 향하는 카일루스를 지켜보았다.

카일루스는 아이들이 근위기사 몇 명을 데리고 간 후 다시 돌아와 안전함을 알린 후에야 움직였다. 바로 곁에 있던 근위기사단장의 어깨를 붙든 후 곧 게이트안으로 사라졌다. 황가 안에 있는 게이트를 들어섬에도 저리 신중하게 구는 걸 보아 적이 많은 듯 보였다.

카일루스가 사라진 이후 근위기사와 함께 몇 번이고 게이트를 드나드는 아이들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몇몇은 구토를 하거나 게이트를 넘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성인인 카일루스가 오간다면 저런 부작용은 거의 없을 텐데도 그런 배려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 어린 형제들의 고통에도 개의치 않는 황태자를 향해 불쾌감이 짙어졌다.

마지막 기사와 함께 아이가 게이트로 들어설 때 다급한 말발굽소리가 리샤르의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뒤돌아선 리샤르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아서 모겐스의 굳은 얼굴을 보며 불길함을 느꼈다.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간 황태자를 향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리샤르는 당장 황족 아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닫혀 버린 게이 트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선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리샤르의 눈치를 보는 사이 아서가 말에서 내려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마님께서 외출하신 지 반나절이 지났으나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중간에 호위를 따돌리신 탓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앤시아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말을 들은 리샤르는 주저 없이 말에 올라탔다.

“당장 기사단을 풀어 영지를 봉쇄하고 아내의 호위를 구금하라.”

목소리의 높낮이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짙은 분노에 아서 역시 빠르게 말에 올라탔다.

리샤르는 혹여나 침실에 남아 있을지 모를 흔적을 찾기 위해 저택으로 향했다.

단순한 외출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호위를 따돌려야 했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훈련받은 기사를 아내의 호위로 보냈기에 그녀를 놓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말을 달리는 내내 리샤르는 계속해서 후회만이 떠올랐다.

황태자를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황태자가 방문했던 날 어떻게든 되돌려 보냈어야 했다.

아내를 혼자 두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호위에게 아내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라는 명령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알량한 질투가 이런 일을 불러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를 떠올린다 해도 모든 게 후회였다.

혹여나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여나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디선가 리샤르의 도움만 기다리며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누구라도 그녀를 위험에 빠트렸다면 그 시신조차 알아보지 못할만큼 갈가리 찢어 버리리라. 모든 걸 파괴해 버리고 싶은 욕구와 미쳐 버릴 것 같은 긴장감이 리샤르를 뒤흔들었다.

앤시아. 나의 아내.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공작가 정문을 빠르게 통과한 리샤르는 저택 입구에 서 있는 마차를 발견했다. 공작 부인을 위해 준비된 마차 앞에 그녀의 전담 하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사이 누구보다도 빛나는 백금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돌아보는 앤시아를 발견한 순간 리샤르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새벽에 보았던 때보다 더욱 보송보송하고 새하얀 앤시아가 리샤르를 보고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공작님?”

앤시아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더없이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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