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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7화 (9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8화.

그 누구도 귀가한 리샤르를 반겨 주거나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엄격한 귀족가가 흔히 그렇듯 그의 부모조차 적절한 거리감을 두고 리샤르를 후계로 대해 왔다. 의례적인 마중이나 배웅은 있어 왔지만 선연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볼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곁에 있어야 했는데 혼자 고생 많으셨어요, 공작님.”

리샤르는 그녀를 잃을까 봐 느낀 두려움과 상실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며 인내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삼키려 애쓰는 사이 앤시아가 먼저 리샤르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앤시아가 리샤르에게 바짝 다가서 속삭이듯 물어 왔다.

“혹시 못된 황태자가 괴롭혔어요? 저 때문에 혼나신 거예요?”

그런 거라면 앤시아는 억울했다. 애초에 만찬이 있는 줄 알고 몸을 운신할 수 있게 만들어 온건데 그사이 카일루스가 훌렁 돌아가 버릴 줄이야.

리샤르의 나쁜 안색과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로 보아하니 카일루스가 아주 박박 긁어 놓은 게 분명했다. 고생했을 리샤르를 다독이고자 앤시아는 더욱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러자 돌덩어리처럼 꽉 쥐어져 있던 주먹이 스르륵 풀리며 앤시아의 손을 맞잡았다.

“황태자도 떠났으니 이제 푹 쉬어요.”

순한 눈으로 걱정하는 앤시아를 추궁하고 싶지 않아 리샤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이 호위를 따돌렸다고 들었소.”

“네? 호위를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앤시아의 반응에 리샤르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하녀들에게로 향했다. 하녀들은 주인 부부의 친밀한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지켜보며 흐뭇해하던 중 공작의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뒤로 서 있는 호위들만이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책임감을 느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가 리샤르에게 바짝 다가서 속삭이듯 물어 왔다.

“혹시 못된 황태자가 괴롭혔어요? 저 때문에 혼나신 거예요?”

그런 거라면 앤시아는 억울했다. 애초에 만찬이 있는 줄 알고 몸을 운신할 수 있게 만들어 온건데 그사이 카일루스가 훌렁 돌아가 버릴 줄이야.

리샤르의 나쁜 안색과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로 보아하니 카일루스가 아주 박박 긁어 놓은 게 분명했다. 고생했을 리샤르를 다독이고자 앤시아는 더욱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러자 돌덩어리처럼 꽉 쥐어져 있던 주먹이 스르륵 풀리며 앤시아의 손을 맞잡았다.

“황태자도 떠났으니 이제 푹 쉬어요.”

순한 눈으로 걱정하는 앤시아를 추궁하고 싶지 않아 리샤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이 호위를 따돌렸다고 들었소.”

“네? 호위를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앤시아의 반응에 리샤르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하녀들에게로 향했다. 하녀들은 주인 부부의 친밀한 모습을 티 나지 않게 지켜보며 흐뭇해하던 중 공작의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뒤로 서 있는 호위들만이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에 책임감을 느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리샤르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면서 앤시아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작게 놀란 소리를 내면서도 살며시 머리를 기대며 안겨 오는 앤시아의 몸이 평소보다 따뜻했다.

“열이 나는 거 아니오?”

“아, 오늘 아주 좋은 약탕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몸에 열이 돌고 상태가 아주 좋아요.”

“약탕?”

“서민 여성들만 이용하는 앗, 이건 여자끼리의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며 윙크하는 앤시아의 천진한 웃음에 리샤르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의심과 걱정이 씻겨 나감을 느꼈다.

“어머.”

리샤르는 앤시아를 안아 올렸다.

앤시아는 익숙한 부유감을 느끼며 사용인들이 본다고 투덜거리는 대신 리샤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단단한 어깨의 감촉에 앤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긴장하셨어요?”

장난스러운 질문에 리샤르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아니. 이젠 괜찮아.”

근처에 있던 아서 역시 굳은 얼굴로 지켜보다 앤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혹시 큰 문제가 있나 싶어 앤시아는 조심스레 리샤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실은 여성들만 이용하는 목욕탕에 다녀왔어요. 들어가는 길이 좁고 복잡해서 근처를 잘 알지 못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라고 하더라고요.”

호위에게 벌을 내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변명 같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리샤르는 사실 여부를 알아보도록 지시하리라 마음먹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리샤르의 반응이 긍정적이라 여긴 앤시아는 비밀이라고 한 것도 잊은 듯, 오늘 들렀던 목욕탕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얼마나 다양한 탕이 있었는지, 하녀의 배려로 독탕을 쓸 수 있었던 점, 덩치가 엄청 큰 세신사의 솜씨가 훌륭해서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것 같다는 말에 리샤르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으나 보송보송 발그레한 팔을 내밀어 보이며 안심시켰다.

동부에선 보지 못한 세신사의 존재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리샤르에게 나쁜 인상을 주기라도 하면 손해였다.

앤시아는 추위에 움츠러든 몸을 따뜻하게 데워 준 목욕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북부 끝자락의 그윈티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면이 많았다.

축제 내내 민원인을 상대하면서도 그들이 보이는 무뚝뚝함 속에 담긴 순박함과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새삼 그윈티드 영지의 장점이 눈에 들어와 앤시아는 솔직히 칭찬했다.

“저 그윈티드가 좋아요.”

“평민들의 목욕탕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것도 그렇고요. 축제 때 보니까 다들 무섭기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무서웠나?”

“아무래도 다들 덩치가 크고 무표정하니까 조금?”

“그건…… 그렇소. ”

“그래도 이젠 알아요. 다들 기회가 생기면 무척 열성적이고 작은 배려에도 크게 기뻐해 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그런가.”

빠르게 걷던 리샤르의 걸음이 느긋해졌다. 앤시아가 자신의 영지를 칭찬하니 저절로 귀를 기울 이게 되고 기분도 좋아졌다.

리샤르는 제 품 안에서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앤시아가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자신의 마음을 흉포하게 또는 포근하게 만드는 이 작고 가벼운 여인의 존재가 문득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리 무겁고 두렵다 해도 결코 이 손에서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샤르는 술렁이는 감정을 주체 하기가 힘들었다.

리샤르의 웃는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는 걸 보며 애써 발랄하게 분위기를 이끌던 앤시아의 속삭임이 잦아들었다.

“저기…… 공작님?”

“부인.”

“네, 공작님.”

“앤시아.”

두근. 심장이 크게 울렸다.

리샤르가 깊이를 알기 힘들 만큼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앤시아 그윈티드.”

“네, 네.”

앤시아의 빠른 답에 리샤르의 일그러진 얼굴이 천천히 평소와 같은 무뚝뚝함으로 돌아왔다.

뭐였을까. 리샤르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리샤르는 앤시아를 안은 채 침실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마석관리실에 들렀다. 그 앞을 지키던 기사 네 명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리샤르는 관리인이 말을 걸기도 전 자물쇠가 걸려 있는 치유 마석 보관함으로 다가갔다.

“주인님, 제가 꺼내 드리겠습니다.”

열쇠를 꺼내던 관리인은 리샤르가 한쪽 팔로 앤시아를 안은 채 손의 악력으로 보관함 문짝을 뜯어내는 걸 보고 좀 더 튼튼한 자물쇠로 교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리샤르는 상자 안의 치유 마석을 헝겊 주머니에 옮겨 담고, 다시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앤시아가 그런 리샤르의 팔뚝을 찰싹찰싹 두드리는 걸 본 관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오히려 리샤르는 덤덤히 세 번째 상자까지 챙겼다.

상자 하나당 열 개의 마석이 들어 있었기에 관리인은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토벌하러 가시는 거라면 보급품으로 넉넉히 넣어 두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쓸 거다.”

“예?”

태연한 리샤르의 말에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앤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연신 어깨며 팔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무표정하던 리샤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드는 걸 본 관리인은 자신이 지금 뭘 본 건가 의심해야 할 만큼 놀랐다.

“앞으로 매일 한 상자씩 가져다 놓도록.”

어디에 두냐고 물을 틈도 없이 리샤르는 빠르게 마석 관리실을 벗어났다.

공작가가 보유한 치유 마석의 개수를 생각하면 매일 한 상자씩 길에 내다 버려도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관리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올해의 마지막 달이 되자 그윈티드 영지는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공작가의 사용 인들은 두툼한 안감을 덧댄 의복을 착용했지만,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저택 안 어디를 가도 추위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간이 난로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이 자주 오가는 길에는 온열 마석이 즐비하게 놓여 훈훈하기까지 했다. 그나마도 앤시아가 낭비라며 난리 친 끝에 절반으로 줄이긴 했으나 일을 하는 사용인들에게는 충분히 따뜻했다.

평민 여인들이 쉬쉬하고 이용하던 약초 탕으로 향하는 길목이 정비되어 손님이 부쩍 늘고, 영지민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아졌다. 마을에는 허브티와 족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약초 가게도 생기면서 추위에 떨던 몸에 온기를 주었다. 그윈티드 영지에 온탕 문화가 자리 잡힌 것이다.

새로운 유행 덕에 축제가 끝난 후 바닥을 치던 영지의 경제 상황에도 활력이 돌았다. 추위가 극성일 때는 오지 않던 방문객이 조금씩 늘어났고, 외부에서 들어온 물품이나 장식들이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년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른들 역시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에 여유를 얻었다.

이 모든 일에 앤시아가 개입되어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정작 앤시아는 리샤르가 별채에 약초 탕을 만들어 주어 변화된 약초 탕을 방문하지 못했다. 앤시아는 세신사 언니의 찰진 손맛을 아쉬워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마련된 약초 탕을 즐기고는 했다. 엘리와 비앙카도 종종 시간을 내 이용하기도 했다.

리샤르는 지난 두 달간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 마수 사냥을 톡톡히 해 둔 덕에 이웃 영지까지 출정을 나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즉, 앤시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유 마석을 탈탈 털어 가며 리샤르와 뜨겁고도 힘든 밤을 보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적응되지 않을까 기대 하기도 했지만, 지치지 않는 체력과 남다른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리샤르로 인해 곧 무리임을 파악했다. 이제 조용히 침실 한쪽에 치유 마석 상자를 두고 가는 관리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백작가에서 날아온 백작 부인과 나단의 편지에 슬픔보다 반가움을 느낄 만큼, 공작가에서의 생활은 앤시아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매일 반복되는 평화로운 일상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렇게 앤시아가 행복에 익숙해 지고 있을 때, 전 공작 부인 마거릿 그윈티드의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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