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9화.
“마거릿 그윈티드 부인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윈티드 부인이라면 앤시아 외에 단 한 명뿐이었다. 리샤르의 어머니이자, 전 공작 부인. 전 공작의 요양을 위해 함께 떠났다던 여인.
앤시아는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바싹 긴장시켰다.
줄리가 가져온 편지를 열어 본 앤시아는 몇 번이고 편지를 다시 읽었다. 위아래 필요한 만큼의미사여구를 제외하면 본론은 단 한 줄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이번 주말쯤 방문하신다고 하는데?”
“전 공작 부인이십니다, 마님.”
쓴소리도 입에 담을 줄 아는 줄리의 태도에 앤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는 구금 중 도망친 로사를 대신해 하녀장 자리를 임시로 맡았다. 귀족 신분이 아닌지라 시녀장으로 부를 수는 없었지만 하는 일과 영향력은 같았다.
앤시아는 로사의 실종 소식을 듣고 무척 놀라기는 했으나 그녀가 도망치지 않았다 해도 죄인은 다시 시녀장이 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앤시아는 그 자리에 줄리를 추천했다. 서류를 볼 줄 알고, 셈을 잘하며 침착한 성격인 줄리는 직책을 맡기에 적합했다. 줄리는 자신의 나이가 어리고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앤시아의 강력한 권유로 하녀장을 맡아 벌써 두 달째 잘해내고 있었다.
“이번 주말쯤이라는 건 벌써 출발하셨다는 거겠지? 뭐부터 해야 하지?”
“그 부분은 집사장님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청소를 해야겠어요.”
앤시아가 당황하는 모습에 줄리는 집사장을 찾아 바쁘게 사라졌고, 엘리 역시 안절부절 못하며 앤시아의 방 구석구석의 먼지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비앙카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엘리를 쫓아 걸레질을 시작했다.
앤시아는 마거릿 그윈티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일단 그녀를 아는 듯 보이는 엘리에게 물었다.
“혹시 전 공작 부인께선 어떤 성격인지 알아?”
“귀족의 귀감이세요.”
단호한 답에 앤시아는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엘리는 퍼뜩 깨달은 듯 손에 쥔 걸레를 얌전히 내려놓고 공손히 자세를 바로 했다.
“사용인의 본분을 지킨다면 더없이 완벽한 주인마님이셨어요.
공명정대하시고 우아하시며 가차없으세요.”
“완벽한 공작 부인이신 것 같은데?”
“네. 엄격하시지만 자애로우세요. 음…… 열심히 일하는 하녀가 실수하면 너그러이 기회를 주시지만, 게으름 피우는 하녀는 규칙대로 처벌하고 내쫓으시고요. 쓸데없는 지출은 허락하지 않으시나 필요한 경우엔 공작가 재산이 반 토막 나도 신경 쓰지 않으세요.”
좋은 분인 거 같은데?”
“네, 좋은 분이세요.”
말을 마친 후에 꾸벅 허리를 숙인 엘리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손을 조금 전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던 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앤시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님, 저 청소도구 좀 가지러 다녀올게요.”
“어? 응, 그래.”
전 공작 부인에 대해 좋은 평을 하면서도 엘리의 다급한 모습을 보면 어려운 사람인 듯했다. 하긴, 야매 공작 부인 급인 앤시아와 달리, 제대로 된 공작가의 안주인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앤시아도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마음먹고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밖이 시끄러웠다.
“정원사를 불러 별채 정원부터 손보라고 해.”
“알아서 하겠지. 우리는 묵은 먼지부터 싹 닦아 내야 해.”
“휘장 색상이 계절과 맞지 않아. 당장 교체하자.”
황태자가 방문했을 때보다 더 긴박해 보이는 사용인들의 모습에 앤시아마저 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앤시아는 공작가의 가계도를 외우고, 지금껏 익혀 둔 예법이 북부의 귀족들 사이에서 적합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앤시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간 앤시아에게 지적을 했던 로사는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정말 문제가 있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이런 일에는 아무래도 귀족의 조언이 필요한데 아는 이가 없다 보니 곤란했다. 하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도 엘리와 줄리 모두 각자 바빠 보였고, 집사장은 거의 혼이 나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비앙카만이 앤시아의 뒤를 졸졸 따를 뿐이었다.
한바탕 들썩이는 공작가를 지켜보고 있자니 시어머니와의 첫 만남이 벌써 걱정스러웠다. 예법공부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마거릿에 대한 정보 수집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앤시아는 마거릿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은 이를 떠올리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 도착한 기사부단장 아서는 오늘도 한가로운 분위기에 뒷목을 긁적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수 사냥을 떠났던 지난 몇 년간과 달리, 최근 두 달간은 그윈티드 영지에 머물렀다. 덕분에 항상 산처럼 쌓였던 보고서도 한 손에 쥐어질만큼 줄어들었다. 매일 보고서와 씨름하던 보좌관이 자리를 비워도 될 만큼 한가로웠다.
리샤르는 낮에는 종종 영지를 시찰하거나 업무를 보기는 했으나 밤이 되면 어김없이 저택으로 돌아와 아침까지 휴식을 취했다.
공작 부인을 맞이한 덕에 리샤르가 안정적으로 변했구나 싶어 안심이면서도, 마수를 베는 손맛을 느끼지 못하니 좀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단 분위기가 요즘 아주 흉흉했다. 다들 마수 사냥을 언제 가게 될지 물으며 안달을 했다.
마수 사냥 대회로 웬만한 개체는 탈탈 털어 낸 터라 내년 봄 번식기 때까지는 출정 계획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휴가를 주어 분위기를 바꿔 보는 건 어떨지 제안을 하기 위해 아서는 보고서를 만들어 집무실을 방문한 것이다.
“기사들에게 장기 휴가를 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번 겨울은 아예 마수 사냥이 없을 예정이니, 겨울 휴가를 주면 고향까지 거리가 제법 먼 기사들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휴가를 가지 않는 이들은 산으로 수행이라도 보내 쌓인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게 할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대에게 맡기지.”
최근 리샤르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길 때가 많았다. 이는 좋은 변화였지만, 혹여나 일이 터졌을 때 물러지시는 건 아닌지 다소 걱정도 되었다. 그런 걱정은 마음속에 넣어 둔 채 아서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공작 부인 앤시아가 아서를 보고 활짝웃었다. 저리 꽃처럼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리샤르의 분위기도 바뀐 것이리라. 아서 역시 그녀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고 지나가려 했다.
“아서 경.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곧장 리샤르에게 향할 것 같던 앤시아가 자신을 붙잡자 아서는 의아해하면서도 자세를 바로 했다.
.
“예, 말씀하십시오.”
“전 공작 부인이신 마거릿 그윈티드… 그러니까 대부인께서 혹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아서는 어리둥절했지만, 앤시아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귀를 기울였다.
“아니…… 아니야. 이런 건 겪어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건데.
붙잡아서 미안해.”
“아닙니다. 무엇이든 성심껏 답해 드리겠습니다.”
드물게 근심 어린 앤시아를 보며 아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서는 이미 집무실 안쪽에서 이상황을 눈치챈 리샤르가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챘음에도, 앤시아의 머뭇거리는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기, 대부인께 실수하고 싶지 않은데. 혹시 뭔가 조언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집사장은 너무 바빠 보이고 공작님께 물어보러 오긴 했는데… 아서 경은 공작가에 오래 있었으니까 혹시 뭔가 들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색한 듯 앤시아의 말이 점점 길어지는 사이 집 무실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앤시아가 돌아보기도 전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는 리샤르의 표정은 더 없이 부드러웠다. 그 얼굴에 화들짝 놀란 아서는 묵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공작님?”
자연스레 앤시아를 집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리샤르는 단둘이 되자마자 키스를 퍼부었다.
매일 밤을 함께 보내는데도 낮에 만날 때면 또 이렇듯 애정을 퍼부어 주는 리샤르의 행동이 기뻤다. 그렇기에 그의 가족인 마거릿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공작님, 대부인께서 주말에 방문하신다고 해요.”
“내게도 편지가 와서 알고 있소.”
태연하기만 한 리샤르의 태도에 앤시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대부인께선 어떤 타입을 좋아하세요?”
마음이 급하니 질문이 이상하게 튀어 나갔다.
“아니, 그러니까 그 뭐랄까……
며느리라면 이런 타입이 좋겠다.
그런 거요. 혹시 평소 말씀하셨던 며느릿감이라던가 이상형 아세요?”
“대대로 그윈티드 가의 공작 부인은 우리의 의견보다는 황제 측입김이 더 컸지.”
무덤덤한 답이었으나 앤시아는 아차 싶었다. 오랜 기간 황족과 그윈티드 공작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음이 급해 괜스레 리샤르를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닌지 뒤늦은 후회를 했다.
당황한 앤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리샤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을 맞췄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니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거요.”
“그건 공작님만 그러신 거고요.”
“그리고 어머님이라고 불러 드리면 더 좋아하시겠지.”
“그…… 럴까요?”
망설이는 앤시아의 이마며 콧등에 몇 번이고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누구든 부인을 보면 사랑에 빠지게 될 테니.”
사랑에 빠진 공작에겐 앤시아의 걱정이 무의미했다. 앤시아는 그의 맹목적인 사랑에 웃음을 보이며 이 고민은 바쁜 집사장과 상의해야 함을 깨달았다.
지금은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을 즐거이 받아들였다.
*
주말은 빠르게 다가왔다.
마거릿이 영지에 들어섰다는 소식에 사용인들과 공작 부부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저택 입구에 늘어섰다.
맑기만 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드는가 싶더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은 전 공작 부인이 눈한 톨 밟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빗자루를 들고 하염없이 길을 쓸었다. 리샤르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리지 않는 걸 보아 당연한 행동인 듯 보였다.
‘자애롭다며? 공명정대하다며?!’
이건 아무리 봐도 깐깐한 웃어 른을 맞이하는 태도였다. 역시 지난 며칠간 예법 복습을 해 둔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온통 새까만 마차의 등장에 비질하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마차를 보며 당황한 이는 앤시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