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0화.
혹시 전 공작 부인도 백작 부인 힐다처럼 무예에 능한 호걸 타입인 걸까? 그렇다면 힐다에게 했듯이 애교를 기본으로 앤시아의 사랑스러움을 어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앤시아는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 두었다.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귀족적인 버전, 조용하고 어른의 말씀을 경청하는 현모양처 버전, 순수함을 기본으로 서툴지만 열심히 하려는 젊은 새댁 버전, 철은 없지만 미워하기 힘든 귀여운 새아가 버전 등등.
마거릿과 첫 만남 이후 어떤 버전을 택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처음 만나는 시어머니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날것을 보여 주고 점수를 깎아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검은 마차는 순식간에 저택 앞에 당도했다. 지체 없이 달려 나간 집사장의 손에 마차 문이 열렸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내밀어진 검은 구두 끝은 보석이나 문양 하나 없이 밋밋했다.
검소한 타입이신가?’
잠시 신발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앞서 나간 리샤르가 마거릿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그제야 종종걸음으로 리샤르의 곁에 선 앤시아는 마거릿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젖혀야 했다.
북부인치고는 작은 키였지만, 앤시아에 비하면 큰 편이었다.
언뜻 본 인상은 늘씬한 냉혈 미인이었다. 새하얗게 센 것처럼 보이는 은발을 느슨하게 묶어 올려 우아해 보였고, 리샤르와 똑닮은 푸른 눈은 하얀 피부 탓에 더욱 새파랗게 보였다.
목까지 빈틈없이 채운 벨벳 드레스는 겨울의 한기를 막아 줄만큼 도톰해 보였고 실용적이었다. 카라와 소매 끝에만 레이스를 덧대어 단조롭지 않도록 꾸밈이 들어갔다. 미소 한 자락 없이 무표정했으나 세월의 흔적이 남은 주름진 얼굴은 귀족의 품위처럼 느껴졌다.
마치 얼음여왕 같다는 감상을 떠올리던 앤시아는 너무 오래 눈을 마주쳤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시선을 내렸다. 전 공작부인을 첫 만남부터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예의에 맞지 않았다.
‘드레스를 보니 가성비를 중요 시하는 타입일지도 몰라.’
앤시아는 머릿속에 마거릿에 대한 정보 하나를 채워 넣으며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려 했다.
“로사가 보이지 않는구나.”
아들이나 새 공작 부인을 향한 덕담을 주기도 전 시녀장부터 찾는 마거릿의 태도에 앤시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조건 좋아하실 거라더니. 역시 믿는 게 아니었어.
물론 아주 조금만 믿기는 했지만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으리란 희망이 파사삭 부서졌다.
앤시아는 일단 예의 바른 모습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은은한 미소와 곧은 자세를 유지하며 시선을 살짝 내리깔되언제든 마거릿이 말을 걸면 답할 수 있도록 귀 기울였다.
“로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아무 래도 한번 와 봐야 할 것 같아 들렀다.”
새 식구가 들어와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다는 말이 그리도 어려울까. 앤시아는 마거릿이 자신에게 호의는커녕 악의만 없어도 다행이겠다 싶었다.
빌런은 떠나도 흔적이 남는구나.
앤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은은한 미소는 잃지 않았다.
“어머니, 시녀장은 문제를 일으킨 탓에 공작가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오자마자 로사부터 찾은 것에 비해 담담한 반응이었다. 로사가 일으킨 문제가 어떤 건지 언제 돌아오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가볍게 사용인들을 죽 훑은 후 줄리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보였다.
“저 아이가 새로운 시녀장인가 보구나. 아직 어려 보이는데 연륜 있는 이를 소개해 줄까?”
“아내가 고른 하녀인데 지난 두달간 문제가 될 일은 없었습니다.”
“하녀인데도 두 달이나 문제없었다면 적절한 선택이었구나.”
무슨 줄타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마거릿은 불평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설명을 해 주면 곧바로 수긍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 같은데 사용인들은 왜 저렇게까지 긴장했던 걸까.
마거릿은 모두를 눈에 담는 것처럼 죽 살펴보더니 마지막에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리샤르에게서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앤시아를 가장 마지막에서야 눈에 담은 것이다. 이제야 인사할 타이 밍이구나 싶어 앤시아가 웃음을 보이자 마거릿의 고개가 기울었다.
“이 예쁜 영애는 무슨 일로 내 아들에게 이리 바싹 붙어 있는 걸까?”
말투에 조금의 질책도 없이 의문만이 가득했다. 앤시아는 마거릿이 자신을 멕이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헷갈렸다.
“아내이니까요.”
“응?”
리샤르 쪽에서 들려온 답에 마거릿의 무표정이 깨졌다.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느른하게 기운 눈꺼풀이 올라가며 앤시아와 리샤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럴 리가.”
마거릿의 부정에 리샤르의 미간이 패이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제 아내를 모욕하신다면.”
“아니, 내가 공작 부인을 모욕할 리가. 단지 여기 이 영애가 정말 공작 부인인 줄 몰랐단다.
왜냐면.”
마거릿은 앤시아를 유심히 바라본 후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로사가 보낸 편지에는 마치 내 아들을 미모로 홀리고 공작가를 파산하게 할 희대의 요부, 악녀가 공작 부인이 된 것처럼 쓰여 있었기에 이런 귀여운 공작 부인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단다.”
‘와. 로사. 전 공작 부인에게까지 저런 편지를 보냈던 거야? 정말 너무하네.’ 그러나 그런 편지의 내용을 태연하게 언급한 후 앤시아를 바라보는 마거릿의 눈은 평온했다.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했군요.
반가워요, 나는 마거릿 그윈티드.
리샤르의 어미입니다.”
양손을 내미는 마거릿의 행동에 앤시아는 당황했다. 이건 그 어떤 예법에도 나오지 않은 자세였다. 악수도 아니요, 춤을 신청하는 건 더더욱 아니라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앤시아는 곤란할 때 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 환한 웃음을 보였다.
이에 화답하듯 무표정하던 마거릿의 얼굴에도 온기 어린 옅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한 발짝 앤시아에게로 다가온 마거릿은 내밀고 있던 양손을 벌려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가벼우면서도 조심스러운 포옹에 앤시아는 놀라 눈만 깜박거렸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해요. 공작가의 식구가 된 걸 환영해요.”
*
마거릿은 앤시아에게 호의적이었다.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거릿과 함께 저택 안을 산책하며 검사받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별채 일부를 약초 탕으로 바꾼 것에는 멋지다는 칭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리샤르의 어머니, 마거릿은 예상보다 더 좋은 분이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종종 보이는 호의에 앤시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마거릿의 말 상대가 되는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별다른 일 없이 마거릿이 돌아가야 하는 날을 하루 앞두고 먼 거리의 영지에서 마수 토벌 의뢰가 들어왔다. 마수 사냥 대회 때 경계가 된 곳과 인접하여 자신들의 영지에 마수가 넘어오고 있으니 도의적 책임을 지라는 말도 안 되는 의뢰였다. 핑계에 가까운 의뢰였으나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마거릿은 오히려 5일이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놀랍다고 했다.
이것이 그윈티드 공작가의 안주인이 지금까지 겪어 온 삶의 일부였다.
리샤르는 마거릿과 앤시아의 배웅을 받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앤시아를 한참 동안 끌어안은 후에야 마거릿에게 인사하고 말에 올라탔다.
리샤르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마거릿은 부끄러움에 두 뺨이 상기된 앤시아를 보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저 무뚝뚝한 아이가 정신을 못 차렸겠지.”
“아, 아니에요, 어머님.”
대부인이란 호칭을 쓰다가 리샤르와 대화 중 어머님이라 부르는 걸 들은 마거릿은 손뼉을 ‘탁’치며 마음에 들었음을 알렸다. 리샤르에 말에 따르면 마거릿의 그런 품위 없는 행동은 처음이라고 했다.
앤시아가 종종 귀족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마거릿은 옅은 웃음을 보일 뿐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앤시아에게 제법 관대했다.
리샤르가 떠나고 나서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앤시아는 제 몫으로 준비된 약초가 섞인 미묘한 차를 마시며 마거릿이 떠나기 전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보람찰지 고민했다. 이미 지난 며칠간 변화된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많은 칭찬과 호의를 얻어 냈다. 이제는 진심으로 마거릿이 즐거웠으면 했다.
앤시아가 깊은 고민에 빠진 사이 마거릿은 한동안 말이 없었를 마시는 시간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앤시아는 제 몫으로 준비된 약초가 섞인 미묘한 차를 마시며 마거릿이 떠나기 전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보람찰지 고민했다. 이미 지난 며칠간 변화된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많은 칭찬과 호의를 얻어 냈다. 이제는 진심으로 마거릿이 즐거웠으면 했다.
앤시아가 깊은 고민에 빠진 사이 마거릿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 침묵하고 있었음을 뒤 늦게야 알아챈 앤시아가 서둘러 사과를 했다.
“앗.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생각을 너무 깊게 하느라…….”
“나를 방치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단다. 고민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워서 계속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으니.”
사실 이 집안 사람들은 플러팅스킬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마거릿은 태연하게 앤시아의 사랑스러움을 칭찬하고는 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리 고운 며느리를 봤으니, 똑 닮은 사랑스러운 손주도 보고 싶구나.”
지난 며칠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주제에 앤시아는 찻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거릿은 여전히 은은한 웃는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마거릿의 행동에 앤시아 역시 들고 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으나 미약한 소리가 났다.
이런 소소한 실수에도 마거릿은 한 번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저택 구석 잘 보이지 않는 곳의 먼지조차 찾아내 사용인에게 주의를 주던 때와 달리 앤시아에겐 한없이 무르기만 했다.
“로사가 보낸 편지에는 의사의 소견서도 함께 들어 있었단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며느님이 불임일 수 있다니. 남편의 불치병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더구나.”
이걸 위한 배려였구나.
앤시아는 그간 마거릿이 보인 호의가 이 순간을 위함임을 알아챘다. 가장 큰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 인자하게 굴었던 것이다.
마거릿은 앤시아가 별다른 반응없이 듣고만 있자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누구의 배를 빌리든지 공작가의 핏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란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