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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00화 (100/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1화.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누구의 배를 빌리든지 공작가의 핏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란단다.”

마거릿의 고백에 앤시아는 리샤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전하기로 했다. 아이가 없더라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 역시 솔직해질게요. 어머님께서 아시다시피 제 몸은 아이를 갖기에 부족해요. 하지만…….”

“부족하다니. 그런 말 하지 말려무나.”

앤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거릿이 그녀의 양손을 꼭 붙들었다. 마거릿은 언뜻 보면 표정이 적어 차가워 보이지만 그 눈빛이나 행동에는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앤시아는 고마움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꼈다. 차마 친근하게 손을 붙잡기까지 한 마거릿에게 그녀가 싫어할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입술만 달싹였다.

차분히 이어진 마거릿의 목소리가 더없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걱정할 거 없단다. 누가 뭐래도 네가 공작가의 유일한 안주인일 테니. 그러니 후계만 생산한다면 그 상대가…… 비앙카? 그 튼튼해 보이는 아이라도 상관없단다.”

이게 본론이구나.

앤시아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비앙카는 마거릿 앞에서 종종 실수를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마거릿은 우아한 웃음을 지은 채 건강해 보여 보기 좋다며 쉽게 용서하고는 했다.

후계를 낳을 만한 튼튼한 여인으로 비앙카를 고려한 듯싶었다.

지금까지 보인 마거릿의 호의는 이 말을 꺼내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나 보다.

“공작 부인인 네 생각은 어떠니?”

싫어요.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한 말을 삼켰다.

솔직한 게 답이 될 수도 있으나, 지금은 독이 될 확률이 더 높았다.

마거릿은 지난 일주일 동안 앤시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게 진심이든 가식이든 마거릿이 보인 감정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진심이라해도 지금 대답 여하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호의였다.

“어머님.”

앤시아는 오랜만에 본심을 감추고 상황에 맞는 모습을 꾸며 냈다. 적당한 미소에 약간의 처연함을 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작가에 온 후로 제 몸 상태가 상당히 좋아졌어요.”

이미 의사를 통해 알아봐 두었는지 마거릿의 온화한 미소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물론, 아직은 힘들지 모르지만, 아직 결혼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어요. 좀 더 노력한 후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요. 당분간은 지켜봐 주셨으면 해요.”

아무리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라지만 진심이 아닌 말을 입에 담기가 힘들었다.

마거릿은 앤시아의 손을 꼭 잡은 채 지금까지와 달리 다소 감정이 섞인 간절함을 담아 말을 꺼냈다.

“전 공작인 내 남편의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단다. 다행히 일찍 요양을 간 덕에 몇 년 정도는 버틸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아가.”

마치 백작 부인처럼 마거릿은 앤시아를 ‘아가’라고 다정하게 불렀으나 그 무게와 의미는 다르게 느껴졌다.

“남편을 잃게 될 내게 손주의 희망조차 꺼트리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니?”

이런 순간이 언제고 올 거라는 걸 예상했다.

적당히 시간을 벌 생각이었던 앤시아는 마거릿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마 시아버지인 전 공작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과 빗대어 아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이런 마거릿 앞에서 리샤르와 이미 이야기를 했다거나, 아이가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거라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앤시아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마거릿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난 말이다, 공작가의 안주인이 평민이든 외지인이든 상관 안 한단다. 귀족인 네가 와 줘서 정말 기쁘지만, 내 남편의 피를 이은 내 아이가 자식도 없이 살아가는 걸 원치 않을 뿐이란다.”

마거릿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녀 역시 황제의 입김이 닿은 혼사였을 텐데 전 공작을 사랑하는 게 보였다.

리샤르를 지칭할 때도 ‘내 남편의 피를 이은’이라고 표현하며, 제 자식이기 이전 남편의 피를 이은 것을 중요시 여겼다. 거기서 마거릿의 남편에 대한 애정과 공작가의 핏줄에 대한 집착이 드러났다.

하지만 앤시아는 리샤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곁에 서 있고 싶었다.

‘그가 다른 여인을 품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나보고 기르라고?’

앤시아는 자연스럽게 꾸며 냈던 처연한 웃음이 깨질 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런 앤시아를 지켜보던 마거릿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가능하다면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손주를 안겨 주고 싶구나.

혹시 또 모르지. 그이에게 희망을 준다면 좀 더 오래 버텨 줄지도 모르잖니.”

“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래.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을지 모르겠구나. 물론, 현명한 공작 부인이라면 미래까지 전부 생각해 두었겠지만. 괜한 참견을 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차마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어색한 웃음을 보였으나 마거릿은 훨씬 더 고수였다. 마거릿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앤시아를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내년에는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고 싶구나. 약속해 줄 수 있겠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니 내년을 기약하며 약속까지 요구하는 마거릿에게 앤시아는 너무 빠르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전 공작이 시한부임을 들었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앤시아가 무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답을 했음에도 마거릿은 지금까지 보이던 우아한 웃음이 아닌 눈가에 주름이 질 만큼 깊은 웃음을 보였다.

“역시 공작가에 제대로 된 안주인이 들어왔구나. 고맙구나, 아가.”

마거릿이 연신 고마움을 표현하며 앤시아를 보듬었다. 그럴 때마다 앤시아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떨릴 정도로 불편한 속내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마거릿은 끝끝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다음 날 영지를 떠나기 전까지 마거릿은 앤시아에게 임신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물품을 방 한가득 채울 만큼 선물했다. 이 많은 물건이 갑자기 튀어나올 리는 없으니 이미 준비해 온 것이리라.

비앙카에게도 하녀가 가지기엔 다소 과한 선물들을 건네주었다.

그 과정에 마거릿은 앤시아의 손을 다시금 꼭 잡고 가까운 사람이 후계를 대신 낳아 주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마거릿은 앤시아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녀와 가까운 하녀가 리샤르의 눈에 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거릿은 계속해서 앤시아에게 다른 귀족들의 경우를 이야기 해주었다.

코르티잔이나 성품도 핏줄도 전혀 알 수 없는 이와 외도하다 얻는 사생아보다 가까이서 봐 온 하녀에게서 아이를 보면 믿을 수 있지 않겠냐며 앤시아를 설득했다.

앤시아가 가진 상식으로는 친한 이를 남편의 첩으로 보내는 게 말도 안 되지만, 마거릿이 보기엔 오히려 친한 하녀이니 더욱 적당하다 보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로 언젠가는 그런 미래가 올 수도 있었지만, 되도록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고작 하루 동안 마거릿은 지난 일주일 본 것보다 더 오래 앤시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공작가를 떠나는 순간까지 마거릿은 앤시아와 뒤에 서 있는 비앙카를 번갈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안주인의 넓은 아량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잘 대해 주렴.”

“하하…….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사이좋게 잘 지내고, 또 보자꾸나.”

앤시아가 노력한다고 말했던 것은 마거릿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모양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마거릿을 배웅하는 내내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앤시아는 그녀가 완전히 공작가를 떠나자마자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런 앤시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하녀들은 연신 제 주인을 살피며 걱정스러워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엘리, 주방에 가서 디저트 있는 대로 다 가져다 줘. 비앙카, 너도 같이 가서 잔뜩 골라 와.”

“네, 하나도 빠짐없이 다 털어 올게요.”

엘리와 비앙카가 방을 나가고, 혼자가 되자 앤시아는 침대 위를 마구 뒹굴다 베개를 팡팡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 정말 스트레스! 답답해!”

다른 것도 아니고 전 공작이 시한부라니. 부담감이 지나치게 컸다.

“아, 진짜 심란해 죽겠네.”

한참을 침대에서 좌우로 데굴데 굴 구르던 앤시아는 하녀들이 가져다준 차와 디저트 앞에서도 한숨만 쉬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 크 귀퉁이를 포크로 조각조각 낸 후 결국 혼자 있고 싶다며 모두를 내보냈다.

답답한 마음이 영 풀리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가 활짝 열고 찬바람을 쐬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시원해 지는 것 같아 이불까지 끌고 와창문 앞에 앉았다.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앤시아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아……. 아이 문제로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날이 올줄이야.”

그래도 리샤르가 괜찮다고 했다. 그가 아이를 원하면 또 모를까 다른 여인의 배를 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시 또 모르잖아? 요즘 체력도 좀 붙었고.”

아무래도 비앙카가 꾸준히 먹이는 약초 물과 환약 등의 효과가 대단한 듯했다.

지금처럼 건강이 좋아지면 내년쯤엔 뭐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요즘 앤시아의 체력은 부쩍 좋아졌다.

“그래. 고민은 내년에 다시 하자. 스트레스 받아선 될 것도 안돼.”

애써 밝게 결론 내며 창문을 닫으려던 앤시아는 못 볼 것을 본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저 멀리 게이트가 활성화됐음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최소 몇 년간은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상황을 목격한 앤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리샤르도 없는데 그놈의 황태자가 또 게이트를 통해 방문한 건가 싶어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윈티드 영지의 게이트 앞은 최근 연달아 방문한 황족으로 인해 긴장감이 돌았다.

지난번엔 소식도 없이 황태자가 근위기사단을 이끌고 게이트에 나타난 터라 비상이 걸렸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준수한 청년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어느 쪽이 황족인지 고민할 것도 없이 붉은 눈을 지닌 어린아이를 향해 모두 허리 숙였다.

“방문객님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이가 대답하지 않자 함께 게이트를 통과한 청년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동부의 레슬리 소백작, 나단 레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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