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2화.
동부의 겨울은 늦은 편이었다.
한낮에는 두꺼운 겉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온화한 기후에도 나단은 북부의 혹독한 겨울을 떠올리며 한숨이 늘어만 갔다.
며칠 전 도착한 앤시아의 편지에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북부는 상당히 춥지만 보온 마석부터 시작해 다양한 마석들이 생활 전반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며, 외부 반출이 엄격해 당장 백작가로 보내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그곳에서조차 백작가를 위하는 앤시아가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리움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잠시 잠잠해졌다가도 이처럼 편지 한 통 받아 본 것만으로도 파도처럼 덮쳐 왔다.
게다가 최근 황궁에선 그윈티드영지에서 열린 마수 토벌 축제와 그 아이디어가 공작 부인에게서 나왔음이 공공연히 퍼지고 있었다. 혹여나 위험한 일은 아닌지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당장에라도 말을 달려 북부로 향하고 싶었으나 또다시 한 달 넘게 일을 쉴 수는 없었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라도 들으면 이 불안감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공작가에 대한 황가의 경계를 잘 알고 있기에 섣불리 통신 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궁에선 많은 이들이 통신구를 사용하고 있어 출근 때마다 유혹이 심했다.
공작가와 백작가에 통신구가 있었다면 아마도 참지 못하고 몇 번이고 통신구를 이용했으리라.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펜을 움직이던 손이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스승이자 재무부 대신이 그런 나단에게 주의를 시켰다.
“레슬리 군, 최근 실수가 잦은 거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숫자를 다루는 곳에서 일을 그 르치면 어쩌려고 그러나. 집중이 안 되면 좀 쉬었다가 오게.”
“예, 감사합니다.”
연말이 다가오자 확인해야 할 보고서가 점점 쌓이는데도 생각이 많아져 실수가 늘었다.
잠깐 머리를 식힐 겸 분수대가 있는 온실을 걷고 있자니 어떻게 알았는지 제2 황녀가 다가왔다.
“오랜만이군요.”
몇 달간 꾸준히 나단에게 관심을 표해 왔던 황녀와의 만남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었다.
“지난주에도 여기서 마주쳤던 거로 기억합니다.”
“내게는 무척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당신께는 그렇지 않았나 보군요.”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우아하게 다가오는 황녀는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탓에 나단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황족의 특징인 금발은 물려받았으나 붉은 눈이 아닌 푸른 눈을 가진 황녀는 제2 황녀임에도 후 계자 후보조차 되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황제의 무관심 덕에 황녀의 혼사는 그녀의 뜻에 맡겨졌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는 나단을 찾아왔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전한 후, 황녀는 꾸준히 나단에게 구애를 해 왔다.
아무리 후계가 될 수 없다 해도 황족이었다.
게다가 앤시아를 잃은 슬픔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은 시기였다. 황녀가 불편하면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어 곤란해하는 나단에게 그녀는 태연하게 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요.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나요?”
“송구합니다, 황녀 전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황녀의 질문은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황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해 왔다.
“약혼녀도 아니었다면서…… 다 .
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어도 여전히 마음이 쓰이시나 보군요.”
“동생 같은 아이입니다.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군요.”
매번 말을 낮춰 달라 하는데도 황녀는 마음을 얻고 싶은 이를 하대하는 건 있을 수 없다며 존대를 해 왔다. 그녀가 말을 높일때마다 나단은 황녀의 관심을 매번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올해 마지막 연회에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아무래도 무도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 문제, 해결해 드리면 제게 파트너 신청을 해 주실 건가요?”
“무슨…….”
황녀의 의도를 알기 힘들어 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곧바로 시동처럼 데리고 다니는 붉은 눈의 소년을 나단에게 보냈다.
“제가 아끼는 동생과 다녀오세요. 당신의 고민, 망설임 모두 털어 버리고 돌아오세요.”
너무도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단이 반응하기도 전 어린 소년이 그의 손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다녀오라니. 붉은 눈을 가진 황족 아이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온실에서 멀지 않은 게이트였다.
나단은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당황하긴 했어도 점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건가?
정말로 앤시아를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건가?
아무런 준비도, 보고도 없이 훌쩍 떠나도 되는 건가?
머릿속에 떠올린 여러 가지 생각들과 달리 나단의 발은 홀린 듯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눈을 뜨기도 전 찬바람이 먼저 훅 얼굴을 스쳐 갔다.
순식간에 북부의 그윈티드 영지에 도착한 것이다.
한 달 가까이 달려왔던 길을 단 몇 초 만에 도달하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과 게이트 이용의 후유증으로 나단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환영합니다. 그윈티드 영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리자는 붉은 눈을 가진 어린아이가 황족임을 알아보고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아이는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를 받은 뒤 관리자가 방문객의 정보를 받기 위해 다가오기도 전에, 방금 나왔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단이 어지러움에 비틀거리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훌쩍 돌아가 버린 소년 탓에 홀로 남은 나단은 관리자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야 했다.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신분 증명까지 마친 후에야 추위가 엄습했다.
“이 로브라도 걸치시지요.”
“사양하기엔 날이 무척 차군요.”
게이트 관리자가 빌려준 로브를 걸친 나단은 동부와 달리 완연한 겨울을 맞은 북부의 추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다시 돌아가려 해도 게이 트를 이용하려면 황족이 있어야 했다.
준비도 없이 북부로 오게 된 나나 단은 공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면서도 얼떨떨했다.
제2 황녀, 샬롯 드미트리의 행동력은 나단이 좀처럼 따라가기 힘들었다. 처음 고백해 왔을 때도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듯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자신을 놀리는 건가 고민했을 정도였다.
황당하고 뜬금없었던 첫 고백후, 황녀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몇 마디 잡담을 주고받다가 헤어지기 전 확인하듯 감정을 고백했다.
잦은 만남은 불편하긴 했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백할 뿐 나단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간간이 샬롯에게 전해 듣는 북부의 상황이 반갑기도 했다.
샬롯의 일방적인 접근과 대화 방식은 엉뚱하기는 했지만, 그런 접근이 처음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할 테고 부모님은 아마도 흔쾌히 반기실 만한 상대였다. 정략결혼도 마다하지 않을 상황에, 나단에게 호의를 가진 황녀라면 지금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없어야 했다.
언제 올지 모를 앤시아의 편지를 기다리고 혹여나 그 안에 자신을 찾는 글귀가 있지 않을지 헛된 기대를 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끝내야 했다.
멀리 희미하던 공작가 저택이 점점 뚜렷해지는 걸 보며 나단은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나단의 다짐은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던 중 앤시아를 발견하자마자 날아가 버렸다.
“오라버니!”
그립고 그리워서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절로 반응하는 앤시아의 부름에 나단은 반사적으로 웃음을 보였다.
“앤.”
앤시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단정하게 꼬아 묶어 올린 백금발에 두께감이 있어 보이는 물색 드레스는 천진한 사랑스러움보다 귀족적인 우아함을 돋보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져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나단을 바라보는 앤시아의 눈에 그리움과 반가움이 가득해 마주한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당연하다는 듯 품으로 뛰어들 앤시아를 안기 위해 팔을 벌리던 나단은 한 걸음 앞에 멈춰 선 그녀를 보고 당황했다. 나단이 잠깐 멈칫한 사이 앤시아가 곧장 팔짱을 껴오며 여린 새가 지저귀듯 질문을 쏟아 냈다.
“오라버니, 연락도 없이 북부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마차도 백작가의 마차가 아니잖아요. 얼굴은 또 왜 이렇게 까칠해지셨어요? 재무부 일이 많이 바쁜 거 죠? 또 예전처럼 잠 온다고 점심 거르고 일하시는 거 아니죠?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미안, 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않을래? 북부의 겨울은 생각보다 더 춥구나.”
그제야 앤시아는 로브 아래 나 단의 옷차림이 매우 얇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끝에 묻은 잉크 하며 황궁 출입을 위해 셔츠 깃에 달린 배지까지 마치 황궁에서 일하다가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 게이트가 활성화된 것을 발견한 앤시아는 누군지도 모르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부랴부랴 준비를 한 상태였다. 리샤르도 없이 손님을 홀로 상대해야 하는 부담감에도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평범한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고 그 안에서 나단이 나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직 마차 안에서 나오지 않은 인물이 있는 건 아닌지 화들짝놀라 주변을 살폈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오라버니를 데리고 오신 거예요?”
“아니, 아니다. 나 혼자이니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
정말 무슨 일일까.
앤시아는 의아해하면서도 몇 달만에 본 나단이 무척 반가워 들뜬 기분이 되었다. 나단을 응접실로 이끌며 앤시아는 연신 말을 걸었다.
“게이트로 오신 거예요?”
“그래.”
“누구랑 오신 거예요? 함께 오신 황족은 어디 계시고요?”
12…… 아니, 13황자쯤 되실 것 같구나. 곧장 돌아가셨단다.”
13황자가 왜 나단을 북부로 보내 준 걸까.
앤시아는 나단의 방문이 반가우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