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3화.
혹시 모를 비밀 이야기가 있을지 몰라 앤시아는 응접실로 들어가 물을 생각으로 나단을 이끌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오라버니가 돌아갈 땐 마차로 가셔야 해요?”
“아니. 휴가를 잡고 온 게 아니라서. 아마도 통신구로 연락을 하면 다시 게이트를 통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응접실로 들어선 앤시아는 따라 들어오려는 하녀들을 향해 윙크를 해보이며 작게 속삭였다.
“5분만 오라버니랑 대화를 나눌게.”
여간하면 오해 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지만, 나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앤시아의 걱정과 달리 하녀들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단둘이 되자 앤시아는 가장 궁금했던 일을 물었다.
“13황자가 왜 오라버니를 이곳에 데려다주신 거예요? 친분이라도 생기신 거예요? 아니면 뭔가의 포상? 혹시 앞으로 종종 이렇게 방문해 주실 건가요?”
기대에 찬 앤시아의 질문이 연달아 이어지자 나단은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이번은 좀 특별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자주는 힘들 것 같구나.”
나단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자 얇은 옷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상에, 오라버니 옷이…….”
“일하던 중에 잠깐 머리 식히러나왔다가 이렇게 됐다.”
“그러고 다니다 얼어 죽겠어요.
잠시만요. 엘리!”
앤시아는 후다닥 문을 열고 나가 하녀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그러고는 금세 돌아와 조금 전 걸치고 있던 로브보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얇은 갈색 로브를 들고 왔다.
가벼워 보이는 데도 밑단이 묵직해 의아했는데, 앤시아가 나단의 어깨에 로브를 걸치는 순간 훈훈한 열기가 느껴져 깜짝 놀랐다.
“앤, 천에서 열기가 느껴지는데?”
“보온 마석이 달린 로브예요.
낮에 햇빛 아래 서너 시간만 꺼내 두면 하루 정도는 은은한 열을 내는 충전식 마석인데 그윈티드에선 이런 불편한 마석은 죄다버린다더라고요. 물론 영지민들 사이에선 은근히 쓰이는 듯한데 원칙적으로 외부 반출이 안 되거든요.”
나단에게 바싹 다가온 앤시아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공작가의 손님에게 내어 드린 옷에 들어간 마석까지 제한할 정도로 빡빡하진 않더라고요. 잔뜩 넣었으니 입고 가셔서 부모님 겨울옷에 나눠 붙이면 좋을 거예요.”
살뜰하게 백작가를 챙기는 앤시아가 기특하면서도 나단은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앤시아는 나단의 방문을 무척이나 반겼으나 어딘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랐다.
아련함이랄까 처연함 같은 게 사라지고 환한 웃음을 보일 때마다 기쁨이 넘칠 만큼 행복해 보였다.
“보니까 선물용으로 보낼 수 있는 마석도 제한되어 있더라고요.
그래도 오라버니 생일이랑 아버지, 어머니 생신 선물을 한꺼번에 한다 치면 치유 마석이랑 전 등 마석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나단이 느낀 거리감은 어떤 면에선 흐릿해졌으나 어떤 면에선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나단은 이제야 달라진 앤시아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언제나 아련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였던 앤시아의 분위기가 절친한 친구처럼 변해 있었다.
““앤시아, 너…… 왜 이렇게 씩씩해졌지?”
“앗, 알아보시겠어요? 최근 체력이 엄청 좋아져서 기운이 좀 넘치거든요.”
“몸이 좋아졌어? 그거 다행이구나.”
“공작가에선 치유 마석을 써서 그런지 좋은 약재가 방치되어 있더라고요. 가실 때 약재도 챙겨드릴 테니 아버지랑 어머니께 전해 주세요. 몸을 따뜻하게 해서 겨울에 특히 좋은 거래요.”
나단을 보고 아무런 동요도 없이 마냥 반가워하며 뭐라도 하나 더 챙겨 보내려는 태도는 마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시집간 누나 같은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앤시아는 비로소 나단과 가족이 된 걸지도 모른다. 남매라는 관계로 확고해진 가족.
여전히 나단에게 보이는 깊은 애정이 그러했다.
“아무리 보온 로브가 있다고 해도 지금 입으신 옷은 너무 얇아요. 오라버니, 괜찮으시면 영지구경도 할 겸 옷 사러 가실래요?
제 내탕금이 엄청 많이 남았거든요.”
마치 용돈을 자랑하는 동생 같은 앤시아의 밝음에 나단은 진심으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앤시아는 백작가에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당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 그녀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앤시아가 북부에서 머물기로 했다면 나단 역시 그에 따를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앤시아를 동생으로 대하는 건 나단이 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어려우면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우리 앤시아가 오라비를 위해 옷을 사 준다니. 기꺼이 동행해야지.”
“우리 영지에 재밌는 게 많이 생겼어요.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오라버니.”
그윈티드를 우리 영지라고 언급하는 앤시아를 보며 나단은 쓸쓸한 마음보다 안도감이 들었다.
북부를 친숙하게 느끼는 앤시아를 보니 공작가에서 지내며 행복 했음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꼭 보고 싶구나.”
“어서 가요, 오라버니.”
앤시아는 망설임 없이 나단의 팔을 잡아끌며 일어섰다. 여전히 친밀감 넘치는 행동이었으나, 그래도 제법 공작 부인다운 우아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앤.”
“네, 정말 행복해요. 오라버니가와 주셔서 너무 좋아요.”
나단은 항상 시려 왔던 마음이 이제야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녀가 북부에서 행복하지 못할 줄 알았기에 늘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과 달리 너무도 건강해진 앤시아를 따라가며 나 단은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황녀는 나단에게 이걸 확인하라고 보냈으리라.
청혼서 한 장으로 맺어진 부부라 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다잡으라는 의미였구나 싶어 나단은 황녀에 감탄했다. 무심해 보이나 이런 배려심을 보일 줄 아는 여인임을 깨닫자 불편하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쩌면 나단 자신도 앤시아처럼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여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고맙구나, 앤.”
“에이, 옷 몇 벌 사 드리는 건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나단은 앤시아와 함께 이런 식으로 외출한 적이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처음 방문한 이브의 드레스숍에서 나단이 단 5분 만에 옷을 고른 것과 달리, 앤시아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새롭게 꾸밀 생각이었다.
“마담, 오늘 오라버니께 영지구경을 시켜 드리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내가 공작 부인인걸 몰랐으면 좋겠어. 괜한 소문이 도는 것도 사람들이 몰리는 일도 피하고 싶거든.”
“어머, 잠행!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이브, 이런 날이 올거라는 믿음 하나로 완벽한 세팅을 해 두었답니다.”
숍 주인인 이브는 앤시아를 위해 만들어 두었으나 공작 부인의 품위에는 부족하여 내놓지 못한 드레스가 빛을 보게 됐다며 신나 했다.
여인의 쇼핑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던 나단은 각오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앤시아를 보고 감탄했다.
앤시아는 공작 부인이 아닌 귀족 영애처럼 꾸몄다. 젊은 영애들이 좋아할 만한 자잘한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어린 영애들이 주로 입는 옅은 분홍빛 드레스를 소화해 냈다. 눈토끼숄과 한 쌍인 동그란 털모자까지 쓰자 전체적인 의상 조화가 완벽했다. 화사한 백금발이 모자에 일부 감춰졌음에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오라버니, 저 어때요?”
“백작가에 있을 때처럼 화사하고 사랑스럽구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튀어나 오듯 나단의 칭찬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그의 눈이 잠시 흐릿해질 뻔했으나, 앤시아가 장난스레 빙그르르 도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종이에 무언가를 마구 그려 댔다.
“엘리, 비앙카. 너희도 어서 새드레스로 갈아입어.”
“정말 저희가 이런 고급 드레스를 입어도 될지…….”
“지난번에 고르라고 했더니 너무 평범한 걸 샀잖아. 화려한 건 아니지만, 옷감은 괜찮은 거로 골랐으니까 어서 입고 나와.”
“감사해요, 마님.”
하녀가 아닌 귀족 영애의 일행처럼 보이도록 적당한 드레스를 골랐다.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앤시아는 나단에게 여러 옷을 대보며 신중히 고민했다.
“오라버니에겐 물색 베이스의 오로라 천으로 만든 로브가 참 잘 어울리실 텐데.”
“아니,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과한 것 같구나.”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감색보다 환한 색이 더 잘 받는데, 저희 영지에선 그럼 너무 튀거든요.”
이미 앤시아가 입고 있는 분홍빛 드레스와 하얀 눈토끼 털모자로 인해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상황이었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 앤, 옷은 이제 충분할 거 같구나. 네가 입은 드레스도 무척 잘 어울리고.”
“그쵸? 이렇게 꾸몄으니 공작부인일 거라곤 생각 못 할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지만…… 시선은 더 모일 것 같구나.”
“아이참, 오라버니. 그건 당연하죠.”
앤시아의 너스레에 나단은 조금 놀랐다. 민망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웃는 앤시아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많이 변했다. 자유로워 보이는 앤시아의 해맑음이 나단을 웃게 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집중됐다.
그중 몇몇은 앤시아의 옷차림과 가게 간판을 번갈아 보며 금방이라도 금화 주머니를 꺼내 들 기세였다.
“그럼 가요, 오라버니. 각오는 되셨죠?”
앤시아가 먼저 손을 내밀자 나 단 역시 가볍게 붙잡았다.
“그래. 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