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4화.
해가 저무는데도 영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쇼핑이 이어졌다.
귀족 영애처럼 꾸미기는 했으나 가게를 돌아다니는 내내 앤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영지민은 없었다. 호위까지 뒤를 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앤시아가 차림새에 맞게 철없이 행동할 때마다 다들 알아보지 못한 척해 주었다.
“오라버니, 한 군데만 더 들러요.”
“하하……. 그래.”
앤시아와 하녀들의 끊임없는 쇼핑과 참견에 녹초가 된 나단은 자신의 각오가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쇼핑하는 여인의 체력은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지친 나단이 백기를 들려는데 앤시아는 백작 부인에게 어울리는 브로치를 고르자며 이끌었고, 그마저도 더는 못하겠다 싶을 때 카페에 들러 한숨 쉬어 갔다.
하녀들은 옆 테이블에서 편히 쉬도록 배려하고, 나단의 몫으로 나온 음료를 한 모금 마셔 보더니 자신의 잔과 슬쩍 바꾸고는 배시시 웃는 뻔뻔한 모습도 보였다.
앤시아는 정말 많이 변했다. 순수하기만 하던 소녀는 능수능란하게 남자를 다루는 숙녀처럼 보이면서도 아직 한참 어린 개구쟁이 같기도 했다.
앤시아를 이토록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든 건 아마도 공작일 것이다.
나단은 그윈티드 공작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라버니, 이제 마지막 코스예요.”
“아직도 봐야 할 게 더 남아 있니?”
“네. 지난번 축제 때 설치한 조명이 아직도 밤이 되면 빛나거든요. 밤이 되면 영지가 굉장히 예뻐져요. 마차를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서 야경을 구경하는 거라 외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그런 거라면 안 볼 수 없지.”
앤시아는 오랜만에 만난 나단의 분위기가 여유로워진 걸 보고 안심했다. 그가 북부에 좋은 인상을 받고 또한 많은 걸 가져갈 수 있었으면 했다.
나단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앤시아는 그의 온화해진 분위기가 무척 반가웠다.
서로의 긍정적인 변화에 안심하며 마지막 일정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야경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마차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연인끼리 이용하는 작은 마차부터 여러 명을 한꺼번에 태운 대형 마차, 천장이 없는 개방형 마차까지 다양한 종류의 마차가 줄을 이었다.
충동구매 한 물품들로 가득 채워진 공작가 마차로는 바깥을 보기 힘들었기에 앤시아와 나단은 다른 마차를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손님들로 꽉 찬 분위기에 대기 번호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야경은 다음에 보는 게 어떻겠니?”
“하지만 언제 또 오실지 모르잖아요. 꼭 꼭 보여 드리고 싶은데…….”
앤시아의 작은 고집을 들어주고 싶은 나단은 무리에서 벗어난 마차 두 대를 발견했다. 나단과 눈이 마주친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님을 반기는 신호를 보냈다.
“앤, 저쪽에 빈 마차가 보이는거 같은데.”
“아, 저기 있는 마차들은 운영허가를 받지 않았어요. 정식 마차가 아니면 바가지가 있을 수도 있고, 불편 신고를 받아 주지 않아요.”
하지만 바가지를 걱정할 만큼 금전적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편하다 한들 마차가 덜컹거리거나 마부가 불친절한 정도였다.
망설이는 앤시아의 손을 이번엔 나단이 붙잡아 이끌었다.
“내게 야경을 보여 주고 싶은 거지? 어서 구경하고 저택에 돌아가 쉬자꾸나.”
쇼핑이 즐겁기는 했어도 앤시아역시 상당히 지쳤다. 나단의 권유에 앤시아는 못 이긴 척 정식 인장을 받지 않은 마차로 향했다. 하녀들과 호위 역시 그 뒤를 쫓았다.
“어서 오십시오. 연인을 위한 2인용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연인이 아닐세.”
“어이쿠, 제 입은 지금부터 국다물겠습니다.”
앤시아는 공작 부인인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영지민이 있다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나단은 앤시아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모르기에 태연히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 의자는 푹신한 솜과 가죽이 덧대어져 편안했다. 내벽까지 보온에 신경 쓴 것으로 보아 하니 겨울철 마차 운행을 위해 공을 들인 듯 보였다.
이 정도면 정식 마차와 별다를게 없었다.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차입니다. 아무래도 밤 기온이 차니까요.”
요즘 마차 간의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다양한 서비스가 생겨났는데 그중 하나가 약초 차였다.
약초 가게의 유행이 이곳에까지 영향을 끼친 듯 보였다.
“흠흠, 제가 유행 시킨 거예요.”
“그래. 대견하구나.”
앤시아의 의기양양한 얼굴에 나 단은 그녀가 귀여워 웃음으로 칭찬했다.
마차 내부를 아늑하게 꾸민 탓에 두 사람 이상 타기엔 힘들어 보였다. 마차는 다행히 두 대가 있어 다른 마차에 하녀들과 호위가 올라탔다.
외부로 떠나는 마차였다면 모든 호위가 무조건 동승했을 테지만, 정해진 코스를 도는 마차이기에 한 명만 마부 옆에 자리했다.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달리는 듯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마차가 가는 길을 따라가느라 속도가 줄어들었다.
주변을 살피기엔 이 정도 속도가 딱 괜찮았다. 앤시아는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창밖의 영지 풍경을 가리키며 설명을 덧붙였다.
“오라버니, 저기 간판 아래 작은 깃발이 보이시죠? 저 깃발 개수에 따라 공식적으로 추천하는 가게인 거예요. 예를 들면 저 작은 빵집에 깃발 세 개는 공작가의 요리장이 인정한 맛집이란 뜻이에요. 그 옆에 깃발 두 개인 양장점은 재봉사들의 인정을 절 반 이상 받은 곳이고요. 중앙 안내소에 가면 관련 소책자를 받을 수 있어요.”
미슐랭 가이드를 떠올리며 앤시아가 낸 아이디어는 곧바로 반영되어 영지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택되지 못한 가게들의 항의도 있었으나, 미흡한 점을 알려 주고 개선 방법을 제안하자 대부분 수긍했다.
나단은 레슬리 영지에서 발간되는 소식지에 실리는 가게들을 떠올리며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챘다.
“재미있는 발상이구나.”
“아무래도 외지인들이 와서 적당히 들어간 가게에 실망하게 되면 인상이 나빠지니까요. 공식 추천 가게를 선정하고 알리면 다른 가게들도 다음을 기약하며 더 열심히 하지 않겠어요? 대신, 계 계절별로 심사를 다시 하고 그 과정을 작은 축제처럼 진행하려고요.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선정에는 영지민 투표도 받을 거예요.”
눈을 반짝이며 영지의 일을 설명하는 앤시아에게 나단은 감탄했다.
백작가에서 지내던 시절의 앤시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그 가냘프고 사랑스러웠던 앤시아가 북부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얻은 듯 적극적으로 변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해 나 단은 몇 번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재잘재잘설명하는 앤시아의 말이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나단은 오늘 자신이 상당히 무리했다는 걸 자각했다. 게이트를 넘어온 일부터 추위에 떨며 공작가에 도착해 장시간 쇼핑까지.
나단은 피곤한 눈가를 누르며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느려진 마차가 아예 서 버렸을 때, 나단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앤시아는 그런 나단을 보고 그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게 민망해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너무 들떠 있었나 보다. 몇 달 못 본 사이 살이 빠진 나단의 잠든 얼굴은 수척하기보다 수려 해 보였다.
‘크, 어째 더 잘생겨졌어.”
이 사람이 내 오라버니다 동네 방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더 돌아다닌 것도 있었다. 아직 이런 어린애 같은 욕심이 남아 있었나 놀랄 만큼 앤시아는 나단 앞에서 자꾸만 고집을 부리게 됐다. 아무래도 마거릿과의 대화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보상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했다.
나단과 함께하는 동안은 모든 걱정을 잊고 즐겁게 보냈으나, 조금만 빈틈이 생겨도 아이 문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늘 쇼핑의 강행군도 거뜬히 견뎌 낸 앤시아는 제 몸 상태가 무척 좋아졌음을 다시금 확신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수준은 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의 앤시아라면 임신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몸이 좋아지고 있다 보니 의사를 보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조만간 검사를 받아 보고 앞으로의 일을 고심해 봐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앤시아는 완전히 잠든 나단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나단이 바로 돌아갈까 봐 걱정했는데 하루 묵고 간다니 다행이었다. 부모와 같은 백작 부부에게 보낼 편지를 쓸 시간이 생겨 기뻤다.
야경을 보여 주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나단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또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앤시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마차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밖이 소란스러웠다. 앤시아는 마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더그 영지에서 귀족분들이 단체로 야경을 보러 왔으니 길을 양보하라며 생떼를 부리고 있습니다.”
아니 무슨 양아치 같은 소리야?
귀족 신분으로 치면 앤시아 쪽이 여기선 최고였다.
“저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야말로…….”
“아가씨, 혹시 조금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실은 성벽을 따라 반대편으로 가면 명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야경을 보면 영지가 보석처럼 빛나 아름답거든요.”
보는 것보
“정해진 코스에서
다?”
“장담합니다.”
즉각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저들을 치워 낼까 발끈했던 앤시아는 마부가 굽신거리며 조심스럽게 제안해 오는 말에 마음을 바꿨다. 이 이상 소란스러워지면 잠든 나단이 깰 수도 있고, 기왕이면 더 멋진 야경을 보여 주고 싶었다.
마부가 호위에게 갈 곳을 알리자 괜찮은 방법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멈췄던 마차가 움직이고 앤시아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창문을 닫았다.
마차 벽에 기댄 나단은 편안해 보였다. 앤시아도 좀 피곤해져 벽에 머리를 기대니 푹신하니 기분 좋았다. 잘 정비된 도로의 일정한 흔들림은 안 그래도 피로한 몸을 쉽게 잠들게 했다.
하품은 옮는다지만 잠도 옮는 걸까.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앤시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
***
“앤, 일어나.”
“음……. 좀 더 잘래.”
“눈을 떠, 앤시아!”
“네, 넵!”
좀처럼 듣기 힘든 나단의 단호한 부름에 앤시아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단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앤시아는 잠이 덜 깬 눈을 깜박이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좁은 공간. 알록달록하지만 푹신해 보이는 벽. 나단의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게 보이는데도 몸은 따뜻했다.
그제야 앤시아는 자신이 보온 마석이 붙은 로브를 걸치고 있다는 것과 이곳이 마차 안임을 깨달았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새까만 나무들이었다. 놀란 앤시아는 다시 나단을 보았다.
“오라버니, 여긴 어딘가요?”
“주변을 살펴보긴 했지만, 나무 밖에 보이지 않아 숲이라는 것밖에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