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04화 (104/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5화.

한 시간 전. 먼저 눈을 뜬 나단은 지나치게 조용하면서도 어두운 주변을 살피고 긴장했다. 자신이 잠든 건 그렇다 쳐도 앤시아까지 잠들어 있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둔 사용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창밖을 살폈으나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 나단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말의 투레질 소리 외엔 어떤 인기척도 느낄 수 없음을 확신했다.

마부도, 호위도, 뒤따라오던 다른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 달려 있던 전등 마석을 떼어 내 주변을 살펴봤지만, 온통 새까만 나무뿐이었다. 밤을 맞은 숲의 혹독한 추위에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불길한 고요함 속에 나단의 발소리만이 흩어져 내렸다.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 되짚어가니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나무 밑동을 보니 일부러 베어 낸 듯한 도끼 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 나단과 앤시아가 탄 마차를 고의로 고립시켰다. 반대쪽 길이나마 따라 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리라.

혹시나 마부나 호위가 주변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사라지자 추위가 엄습해 왔다. 앤시아에게 덮어 주고 온 로브의 온기 없이는 밤의 숲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주변을 살피느라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차로 돌아온 나단은 여전히 잠든 앤시아를 보고 당황했다.

미동도 없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껴 급히 그녀를 깨웠다. 다행히 잠들어 있던 것뿐이었는지 앤시아는 곧장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호위랑 마부는요?”

나단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앤시아에겐 잠깐인 것처럼 굴었지만, 나단은 한 시간 넘게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후였다.

앤시아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를 따라오던 마차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마부는커녕 호위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아직 어둡기는 해도 먼동이 터 오는 게 시간도 상당히 많이 흘러 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고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무엇보다 이렇게나 깊이 잠들었던 게 이상했다. 짐작 가는 게 있다면 마차에 오르며 자연스럽게 마신 차가 의심스러웠다.

나단은 생각에 빠진 앤시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애써 의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앤, 일단 마차에 들어가 있거라. 해가 뜰 때까지 주변을 더 살펴보고 오마.”

“그럼 전 반대쪽을 살펴볼게요.”

겁도 없이 뒤돌아서려는 앤시아를 나단이 급히 붙잡았다.

“아니, 혹시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마차에 있어.”

“그건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잖아요. 차라리 해가 뜨면 같이 움직여요.”

“해가 뜰 때까지 아무도 안 오면 마차를 몰고 떠날 생각이야.”

“그럼 그때까지 마차 안에 있어요. 숲에서 길을 잃으면 큰일이에요.”

나단은 자신을 걱정하는 앤시아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차에 올라탔다. 앤시아가 냉큼 로브를 벗어 나단의 어깨에 둘러 주자, 나단은 한쪽을 펼쳐 함께 온기를 나눴다.

“이거 정말 따뜻하구나.”

“마석 덕이죠. 아, 몇 개 때서 제 숄에도 넣으면 되겠어요.”

로브 밑단을 조물거리더니 마석 두 개를 꺼내 눈토끼 숄과 모자 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넉넉히 붙여 두길 잘했죠?”

“그래, 정말 잘했구나.”

밝은 앤시아의 모습에 나단은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던 걱정이 잠시나마 가시는 걸 느꼈다.

주변이 어느 정도 보일 만큼 밝아졌는데도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 결국 나단이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를 쥐었다. 그 과정에 마부석 주변의 핏자국을 발견했으나 사망자가 나올 수준은 아니었다. 애써 무시하며 나단은 말을 다독였다.

다른 시기의 숲이라면 두려웠을 테지만, 최근 마수 사냥으로 인해 눈토끼조차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숲을 빠져나가거나 누군가와 마주치기만 하면 별일 없으리라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길을 따라 달려도 검은 나무뿐이었다. 이런 곳에 마차 한 대 지나다닐 만큼의 길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나마도 중간에 길인지 아닌지 모호한 갈림길이 나와 혼란스러웠다.

해가 뜨고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까지 달리다 보니 말들이 눈에 띄게 지쳤다. 다시 길을 되돌아가야 하나 혼란스러울 만큼큼계속되는 검은 숲에 나단마저 지쳐 갈 때쯤, 중간에 심심하다며 마부석 옆자리를 차지한 앤시아가 한쪽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저쪽에서 물소리가 나요!”

그제야 나단도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길도 아닌 곳을 달리던 터라 적당히 마차를 멈추고 말을 풀어 올라탔다. 앤시아를 두고 갈 수 없어 함께 말을 타고 달리자 얼마 가지 않아 제법 큰 강물을 발견했다.

말과 함께 목을 축여 갈증을 해소하니 배고픔이 밀려왔다.

마부석 아래에 몇 가지 도구와 함께 육포나 마른 과일이 몇 조각 있기는 했으나 상태는 썩 좋지 않아 손대고 싶지 않았다.

나단이 고민하는 사이 앤시아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속삭여 왔다.

“오라버니, 저기 눈토끼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토끼를 보며 좋아하는 앤시아가 귀여워 나단은 웃을 수 있었다.

“그래, 귀엽구나.”

“보기엔 저래도 이빨이 엄청 날카로운 마수예요.”

도망치자는 뜻인가 싶어 나단이 뒷걸음치려는데 앤시아가 바닥의 돌을 죽 눈으로 훑었다. 몇 개를 들었다 놨다 하더니 길쭉하게 생긴 돌을 집어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되겠어요.”

“앤시아?”

“오라버니, 저녁은 눈토끼 스튜로 해요.”

“저녁이라니? 마수를 먹어?”

“네. 아이들이 먹는 걸 봤어요.”

당황한 나단이 말릴 틈도 없이 앤시아는 무척이나 우아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자세로 팔을 휘둘렀다.

거의 직선으로 날아간 돌은 한번에 눈토끼를 맞히고 부서져 나갔다.

‘켁!’ 소리와 함께 절명한 눈토끼를 보며 나단은 어안이 벙벙했다. 앤시아의 돌발 행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저 작은 마수를 맞힌 돌이 부서지다니 놀랍기만 했다. 대체 마수란 얼마나 단단한 개체인 걸까.

“역시! 연습한 효과가 있네요.”

…대체 공작가에서 무슨 연습을 하는 거니, 앤.”

나단의 생각보다 앤시아는 여러모로 많이 변해 있었다.

눈토끼를 잡으며 앤시아는 걱정이 컸다.

과연 눈토끼를 나단이 손질할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도 걱정과 달리 나단은 능숙하게 눈토끼를 손질했다. 손질 중 손톱만 한 마석이 나왔다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마부석에 있던 도구 주머니를 털어 나단이 불을 피우고 냄비에 물과 손질된 눈토끼 고기를 넣는 동안 앤시아는 주변을 뒤져 야생마늘을 찾아냈다. 축제 때 용병 하나가 마수 토벌하는 숲에 잡초처럼 널려 있는 마늘이 아깝다며 채집 허가를 요청했기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요리장 하몬에게 손질 전 재료를 보여 달라고 하길 잘했어.”

마늘을 챙기던 중 야생 당근까지 발견한 앤시아는 말에게 전부 뺏기기 전 하나 챙길 수 있었다.

“오라버니, 스튜는 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맛있대요.”

“그렇구나.”

나단은 앤시아가 하는 일에 의문을 표하는 대신 많이 달라진 그녀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손끝이 지저분해지는데도 개의치 않고 마늘을 손질해 물에 던져 넣고, 지저분해 보이는 육포와 말린 과일도 끓이면 괜찮다며 냄비에 넣을 때는 용병 못지않은 호쾌함까지 보였다.

야성적이 되었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나단은 칭찬을었다.

“멋있어졌구나, 앤.”

“오라버니도 최고예요. 저 혼자였으면 손질도 못 하고 불에 구워 버렸을지도 몰라요.”

피도 못 빼고 털도 그대로 붙은 채 화형식처럼 불타올랐을지도.

앤시아는 그렇게 구우면 질겨서 이가 나갔을 거라고 툴툴거리면서도 모닥불이 약하다며 마석 조각을 던져 넣는 대범함까지 보였다. 완전 북부 사람 다 됐구나 싶어 나단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웃음이 났다.

“야영하는 것 같아 나쁘지 않구나.”

“저도요. 다른 사람들이 무사한 것만 확실하면 캠핑 온 것 같고 좋아요.”

나단은 감추려 했으나 앤시아가 마부석 옆에 앉겠다며 기웃대다 핏자국을 보았다. 다행히 나단에게 치명상은 아닐 거라는 설명을 듣고 조금 안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변 사람을 걱정하는 앤시아를 보며 나단 역시 뒤늦게 부모님과 황녀를 떠올렸다.

황녀는 마음의 정리를 하라며 나단을 보내 주었다. 아마도 부모님께는 황녀가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려 주리라.

나단은 다른 걱정은 접어 두고 현재에 집중했다. 스튜가 끓는 동안 점점 기우는 해를 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이대로 강을 따라 내려갈지, 종일 달렸으나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한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달려야 할지.

마차를 버리면 기동력을 얻을 수 있으나 지금처럼 노숙해야 할 때 유일한 보금자리를 잃는 셈이었다.

나단이 차분하게 여러 방안을 설명하자 앤시아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아침 해가 뜰 때 말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정오가 돼도 인가나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돌아와요. 그 뒤로는 느려도 지금처럼 사냥하면서 숲을 빠져나가요.”

단순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기에 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비운 사이 산적이나 산 짐승에게 마차가 공격당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말을 타고 다녀도 마찬가지였다.

영문 모를 납치를 당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숲 한가운데 버려졌다. 몸에 상처 하나 없는 이상한 상황에 가진 거라곤 마차와 말, 도구 주머니의 소소한 물건이 전부였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최선에 가까운 선택을 해야 했다.

*

그윈티드 공작가는 밤이 깊어지도록 돌아오지 않는 공작 부인으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홀로 나간 것도 아닌 전 약혼자로 소문이 나 있던 나단 레슬리와 함께 외출한 후 사라졌기에 더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용인 대부분이 아름답고 배려 심 넘치는 앤시아에게 호의적이었던 만큼 걱정을 했고, 동시에 주인인 공작을 두고 사라진 공작부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