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05화 (10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6화.

다행히 지난밤 공작 부인을 목격한 이들이 다수 있어 그녀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공작 부인이 탄 마차가 성벽 밖으로 사라진 것이 마지막 목격 이었다는 점이다.

아직 정황은 모르나 하루가 지나도록 공작 부인의 소식이 없자 사용인들 모두 어수선해졌다.

하녀장 줄리는 무표정에 가까운 침착함으로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들 앤시아와 가까웠던 줄리의 의연함에 의구심을 접어 두고 각자 할 일에 집중하면서도 조용한 저택 분위기에 숨 막혀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공작가는 항상 이런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게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앤시아의 존재는 공작가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고 밝게 바꿔놓았다. 그녀의 부재가 너무도 커서 다들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집사장은 줄리를 찾아와 이 일을 주인님께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하루가 지난 후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주인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다며.

이때 저택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며 익숙한 두 사람이 비틀비틀들어섰다.

어제 앤시아와 함께 외출한 전 담 하녀 엘리와 호위 기사 가일이었다.

“엘리?”

“흐윽, 줄리!”

줄리는 자신을 부르며 털썩 쓰러지는 엘리를 향해 황급히 달려 갔다.

초췌해 보이는 엘리의 뒤로 가일이 팔에 피가 배어 있는 붕대를 감은 채 서 있었다.

줄리는 황급히 그들의 뒤를 살폈으나 두 사람 외에 다른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 침착하기만 했던 줄리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님은?”

“모르겠어. 줄리, 마님이 소백작님이랑 도망간 거면 어떡하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엘리의 얼굴에 새로운 눈물길이 생겨나는 걸 보며 줄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은 아끼는 게 좋아.”

“하지만,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잠들었다가 깨니 가일 님만 쓰러져 있고 마님이랑 소백작님이 탄 마차는 사라졌는걸. 왜 두분만 사라지신 건데?”

엘리의 서러운 울음과 함께 쏟아져 나온 이야기에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엘리, 너 지금 흥분해서 너무 생각이 치우쳤어. 지금 비앙카랑 다른 호위 기사님도 안 보이는데 두 사람은 어디 있어?”

“어? 그러고 보니 비앙카…….”

당황한 엘리의 눈이 흔들리자 줄리는 손을 꼭 잡아 주며 안으로 이끌었다.

“진정하고 목욕부터 해. 이야기는 가일 님께 들을 테니까.”

“으응, 고마워.”

줄리는 항상 딱딱하게 구는 것 같아도 방을 함께 쓰는 엘리에게 제법 다정했다. 다른 하녀에게 엘리를 맡기면서도 입단속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주의를 시켰다.

그사이 집사장이 가일에게 다가갔고 묻기도 전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밤 인장이 없는 마차를 타고 야경을 보기 위해 다른 길을 이용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나가는 길을 마부가 추천해 왔는데, 저도 알고 있는 길이기도 하여 그리하라 했습니다만,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졸음이 몰려오더군요.”

호위 중이었기에 가일은 마부가 건네는 차를 받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가일이 가진 철칙이었다. 마부는 두 번 권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의심도 하지 않았다.

마부가 담배를 피우기에 귀족을 태울 때는 참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연신 굽신 거리며 아까우니 이번만 피겠다는 마부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마부가 담배연기를 뿜을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피했으나 일부는 흡입하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러워졌다.

그제야 마부가 피는 게 담배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부는 이미 해독제를 먹어 둔 것인지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가일은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앞이 돌고 의식이 날아가는 걸 버티느라 칼로 팔을 긋기까지 했으나 차라리 마부의 목을 베었어야 했다.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영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야산근처였다.

추적을 하려 해도 이미 수많은 마차와 말이 오간 길목이라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이 사실을 알려야 하기에 급히 달려 왔으나 이미 시간은 상당히 지난 후였다.

납치, 아니면 도주. 어느 쪽에 무게를 두든 뒤를 쫓아야 함은 분명했다.

말을 마친 가일은 침통한 얼굴로 깊이 고개 숙였다.

“어떤 벌이는 달게 받겠습니다.”

“이, 이를 어쩐다 말인가.”

가일의 말을 모두 들은 집사장은 이 일은 자신이 판단해선 안됨을 깨달았다. 기사단을 비롯해 사람을 풀어 공작 부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나 그 이상의 건에 대해서는 공작의 승인이 필요했다.

“알았네. 자네는 다시 부르기 전까지 잠시 쉬도록 하게. 어쩌면 마지막 휴식일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집사장은 지금까지 망설였던 것과 달리 곧바로 리샤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서둘렀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던 전령은 집사장이 편지를 쓰는 동안 단단히 옷깃을 여몄다.

“이 편지를 주인님께 최대한 빨리 전달해야 하네.”

“맡겨 주십시오.”

체구가 작아 빠르게 말을 달릴 수 있는 소년 전령은 편지를 품에 넣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

“아이고, 허리야.”

마차에서 열기를 품은 로브를 나눠 덮고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온몸이 삐걱거렸다. 식욕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제 먹다 남은 마늘 당근 맛 눈토끼 스튜로 배를 채웠다. 맛은 끔찍했지만 오래 끓인 덕에 질기지 않아 적당히 씹어 삼켰다.

오늘은 반드시 숲을 탈출하자.

나단과 앤시아는 굳은 각오를 하고 말에 올라탔다.

반나절을 달린 끝에 멀리 피어 오른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영지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은 채 내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 쓰러져가는 여관 겸 술집이었다. 대체 이런 숲속에 웬 여관이냐 싶을 만큼 뜬금없는 위치였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몇 없던 손님들의 시선이 단번에 모였다. 나단은 자연스럽게 앤시아를 가리듯 앞으로 나섰다. 이런 곳에서는 앤시아의 외모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늘어나기 전 나단이 여관 주인에게 질문을 하려 하자 먼저 흥정이 들어왔다.

“보아하니 마차도 잃고 도망친 귀족 나리들 같은데 걸치고 있는 거라도 내주면 방을 드리리다.”

주인의 뜬금없는 욕심에 나단은 챙겨 두었던 눈토끼 가죽을 내밀었다.

“여기 눈토끼 가죽은 어떠한가.”

“가죽은 우리도 많수다.”

현금은 없고, 가진 물건으로 하루 묶고 말까지 쉬게 하려니 들고 온 눈토끼 가죽으로는 부족했다.

“그럼 제 숄을 줄게요.”

“아니, 여기 동부에서 유행하는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이 있네.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 사용감도 좋으나 이리 길게 접어 활동적인 여인들의 머리띠처럼 사용할 수도 있지.”

“이런 걸 얻다 쓴다고.”

시큰둥하게 받아 들던 주인장은 손에 감겨드는 부드러움에 놀란듯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흠, 부드럽긴 겁내 부드럽네?

좋수다. 젤 저렴한 방 정도는 내어 드리지. 2층 끝 방이고, 방이 맘에 안 들면 숄을 가지고 내려 오쇼.”

손수건은 물론 필요 없다던 눈토끼 가죽까지 챙긴 주인장의 말을 뒤로하고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낄 수 있는 건 아끼는 게 나았다.

“2층 끝 방이…… 여기 방 맞겠죠?”

“문이 있으니 방으로 보이긴 하는구나.”

주인이 알려 준 방은 문부터 낡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좋게 비유하자면 창고, 현실적으로 비유하자면 헛간이나 마구 간 수준의 어둡고 지저분한 방이었다.

좁은 방에 침대 두 개가 전부였는데 엉덩이를 걸친 것만으로도 삐걱거렸다. 그나마 하나 있는 램프도 초가 손가락 한 마디 만큼밖에 남지 않아 한 시간도 못버틸 것 같았다.

침대에는 매트리스 대신 짚을 잔뜩 넣은 이불이 놓여 있어 삐져나온 지푸라기가 여린 살을 찔러 댔다.

“오라버니. 침대가 자꾸 절 찔러요.”

“로브를 깔아 주마.”

“아니에요. 이불을 하나 더 달라고 해 볼게요.”

“그랬다간 이번엔 정말로 솔까지 내놓으라고 할 거야.”

귀족을 홀대하는 여관 주인의 태도로 보아 이곳의 치안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라도 쉽게 내줘서는 안 됐다. 앤시아가 잠들더라도 나단은 최대한 버티며 경계를 설 생각이었다.

“오라버니, 그냥 숄이나 모자를 주고 괜찮은 방에서 식사까지 하는 건 어때요? 저희 어제오늘 끔찍한 눈토끼 스튜밖에 못 먹었잖아요.”

“그건 다음에 써먹자꾸나. 앤, 그보다 피곤할 테니 자 두도록해. 어쩌면 새벽에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럴게요. 오라버니도 주무세요.”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거라.”

나단의 다정한 속삭임에 앤시아는 정말로 편안히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와르르 무언가가 쏟아지고 웃음과 비명이 섞인 소음이 아래층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앤시아는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집중했다.

주인장의 고함이 점점 거세졌다.

‘공작가는 정말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거구나.’

어째 공작가 밖으로 나왔더니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이 터졌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느라 멍때리는 사이 문밖을 살펴본 나단이 급히 다가왔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손님이 강도로 변한 것 같구나. 걱정 마, 앤. 넌 내가 지킬테니.”

이전에 눈토끼를 손질했던 작은 단검을 손에 쥔 나단의 각오가 고마웠지만, 눈토끼보다 큰 생물에겐 유용해 보이지 않았다. 앤시아는 미리 봐 두었던 창문을 가리켰다.

“아뇨, 오라버니. 우리 저쪽 창문으로 도망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