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7화.
“이 층인데 무섭지 않니?”
나단의 눈이 흔들리는 걸 본 앤시아는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이 아래 짚단 같은 게 쌓여 있더라고요. 조금 아플 수는 있겠지만, 다치지는 않을 것 같아요. .
이리로 나가면 마구간이랑도 가까울 거예요.”
점점 더 소음이 심해지고 이젠 날카로운 비명까지 들려왔다.
더는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앤시아가 먼저 창틀에 오르자 나 단이 양손을 붙잡아 주었다. 최대한 아래로 내려 준 후 앤시아의 손을 놓았지만, 발이 닿지 않아 짚단 위로 데굴데굴 굴렀다.
나단이 놀라 황급히 뛰어내려 앤시아에게 달려갔으나 이미 흙투성이가 된 후였다.
“앤!”
“으으, 다음 숙소에서 숄을 넘길까 했는데 이래선…… 어? 북터니까 깨끗해졌어요. 이래서 눈토끼들이 그렇게 하얀가 봐요.”
“그게 문제가 아냐. 괜찮니? 다친 곳은 없고?”
“없어요. 그보다 오라버니, 이층에서 뛰어내리시는데 기사님 같고 멋졌어요.”
“하아, 넌 정말…….”
앤시아의 너스레에 나단이 황당해하며 일으키는데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애써 밝은 모습을 보였던 거구나 싶어 나단은 앤시아가 원하는 대로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 갔다.
“요즘 몸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이 층 정도는 가뿐한 거 같구나.”
“그래도 식사는 꼬박꼬박 하세요. 많이 마르셨어요.”
“보기 흉하니?”
“아뇨. 문학 시인 같고 잘생겼어요.”
소곤소곤 실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마구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여관 안의 소란스러움이 여기까지 들려오자 다급히 말에 올라탔다. 그러곤 바로 말을 내달려 빠져나갔다. 등 뒤로 점점 멀어지는 소란에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던 중 유실된 다리를 만났다. 새까만 숲속보다는 달빛에 의지해 어렴풋이 보이는 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강을 따라가는 중 바위 더미를 만나 우회해야 했고 달빛에 의지해 움직이려니 필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마수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놀란 말이 날뛰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내달리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만큼 그윈티드영지에서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당장 가까운 위협에서 멀어지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계속 움직였으나 노숙할만한 곳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꾸벅꾸벅 조는 앤시아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나단은 초조해졌다.
앤시아가 지금까지 버텨 낸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백작가에 있을 때의 체력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혹여나 앤시아가 기절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지켜야 할 이를 품에 안은 나단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정신을 바싹 차릴 수 있었다.
“조금만 버텨 다오.”
거품을 물기 시작한 말을 쉬게 해야 함을 알면서도 자꾸만 들려오는 짐승 울음소리에 멈출 수 없었다. 어둠이 짙은 산 중턱에서 방향조차 찾기 힘들어지자 두려워졌다. 게다가 붙잡고 있는 앤시아의 몸이 열이라도 나는 듯 뜨끈해졌다. 급히 이마를 만져보니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앤, 괜찮니? 앤시아.”
“으음….….”
대답 대신 끙끙 앓는 소리만 내는 앤시아의 반응에 나단은 조급해졌다. 말도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멈춰 선 채 투레질만 했다.
“앤, 제발 정신 차려. 조금만 더 버텨 다오. 정신을 잃으면 안돼.”
나단이 막막해하는 사이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졌다. 사람이 지나가는가 싶어 나단은 급히 그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길을 잃었습니다! 혹시 가까운 마을로 가는 방향을 알 수 있겠습니까?”
상대가 도적일 수도 있지만, 들려온 말굽 소리는 하나였고 여차하면 말을 때려서라도 도망칠 생각이었다.
“달을 따라가세요. 제일 높은 산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목소리에 나단은 깜짝놀랐다.
어둠 속에 홀로 말을 모는 이가 여인, 그것도 저리 아름다운 목소리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달을 따르라 알려 주었음에도 나단이 움직이지 못하자 여인이 앞서 말을 몰았다. 그러자 지쳐 꼼짝도 하지 않던 말이 앞서가는 말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는 내내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고, 나단 역시 의식이 없는 앤시아를 붙잡고 말을 모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슴푸레 새벽빛이 밝아 올 무렵 나 단은 어느새 자신이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음을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여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저 길을 따라가면 나무꾼 쉼터가 있을 거예요. 좀 쉬었다가 길을 죽 따라가면 마을이 나올 거 고요.”
쉴 수 있는 곳과 마을이 있는 방향까지 알려 주는 여인 덕에 나단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단은 정체 모를 여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함을 알려 주시면 은인께 꼭 보답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눈이 오기 전에 꼭 마을을 떠나셔야 해요.
그럼 이만.”
이름도 묻기 전에 빠르게 말을 몰고 사라지는 여인은 로브로 꽁꽁 감싸 마지막까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단은 이 우연에 감사하며 여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
오랜만에 마수 토벌에 나선 흑의 기사단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의뢰받은 영지의 산을 이 잡듯이 뒤지며 토벌에 매진했다. 그 탓에 전령으로 달려온 소년은 기사단을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공작가의 깃발을 발견하고 산길을 내달렸으나 이미 그곳엔 마수의 사체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뒤꽁무니를 쫓아간 후에야 소년은 전령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막 이동하려던 아서가 전령이 매달고 온 깃발을 발견한 덕이었다. 문제는 리샤르가 마수토벌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항상 기사단과 함께하던 리샤르는 이번에는 의뢰한 영주의 접대를 받으며 마을에 머물렀다.
.
말도 안 되게 후려치는 의뢰비와 앞으로 매년 있을 축제에 한발 걸치고 싶어 하는 영주의 속셈을 리샤르 쪽에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때라면 이런 일은 보좌관에게 맡기고 리샤르는 마수 토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저택에 머물며 보고서를 꼼꼼히 확인한 리샤르는 황당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좌관은 여태껏 공작가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의뢰를 헐값으로 받아들이거나, 마수를 핑계 대고 피해 보상금을 요구하는 등의 허튼수작을 부린 보고서를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사인해 왔다.
마수의 위험성을 해충 박멸 의뢰 수준으로 우습게 보고 있었다. 보좌관이 무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상세한 내역을 확인하고 나니 황당할 지경이었다.
앞으로 이런 부당하거나 쓸모없는 일로 리샤르가 공작가를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담판을 짓기 위해 리샤르는 영주와 독대를 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며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영주와 제대로 조율을 하고 새로운 의뢰를 체결했다.
값이 싸니까 공작가를 이용하자. 이런 식의 의뢰는 이제 없으리라.
그래도 이번 의뢰까지는 기사단의 스트레스도 풀 겸 확실하게 이행할 생각이었다.
계약도 다시 했으니 리샤르 역시 기사단에 합류할 생각으로 말에 올라탔다. 마을을 가로질러 가면 곧장 산으로 향할 수 있기에 말을 달리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들고 있는 신문이 거슬렸다.
거슬림의 이유를 알아챈 리샤르는 망설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가판대에 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미모의 공작 부인, 약혼자와 사라지다.」
공작 부인이 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황족 중에도 있고 동부에도 몇 있었으나 신문에 그려진 여리여리한 여인은 흐릿하다 해도 단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앤시아는 분명 저택에서 하녀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문 속여인이 너무도 앤시아와 닮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추문인가. 당장 신문사를 찾아가 가십거리로 삼은 책임을 물어야 했다.
“공작님!”
급하게 다가온 아서를 보면서도 리샤르는 이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앤시아를 닮은 여인이 그려진 신문도 기묘하고, 사냥 중이어야 할 아서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했다. 아서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손에 든 편지를 앞으로 내미는 모습에 리샤르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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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거다. 그럴 리 없다.
편지를 뜯어 단숨에 읽어 내리는 사이 아서와 함께 온 전령이 고개를 푹 숙인 후 편지에 미처 다 쓰이지 못한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인 마거릿이 돌아간 직후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나단 레슬리. 그와 함께 외출한 앤시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사라진 정황을 포착.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하녀와 호위는 저택으로 귀가. 이후 목격자 없음.
듣고만 있는 리샤르의 푸른 눈이 너무도 어두워 겁먹은 전령의 고개가 바닥에 닿을 듯이 숙여졌다.
리샤르는 침착하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전에 호위가 아내를 놓쳤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앤시아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 앤시아를 품으며 불안감이 사라짐은 물론 그녀의 애정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떠나오기 전에도 그러했다. 어머니의 앞이라 부끄러웠을 텐데도 자신과 떨어지는 게 아쉬운 듯 눈가가 발그레해져 안겨 왔다.
다치지 말라며, 북부 최강 공작이면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와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앤시아는 코끝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울음을 참아 냈다.
그런 아내가 사라질 리 없었다.
레슬리 소백작. 나단 레슬리가 황족의 도움을 받아 게이트를 이용한 것도, 영지를 방문하자마자 앤시아와 외출을 감행한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게다가 나단은 이런 허접스러운 신문에 실린 것처럼 전 약혼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후견인의 아들이자 남매처럼 자라 온 사이일 뿐.
공교롭게도 리샤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일이 벌어졌다는 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황족이 개입했다는 것 역시.
그러니 리샤르는 공작 부인이 전 약혼자와 도망쳤다는 소문 따위 믿지 않았다.
“각하…….”
리샤르에게서 갈무리되지 못한 흉흉한 기운을 느낀 아서는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자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보였던 리샤르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기사단을. 정예 기사단에게 장거리 출정 준비를 시키도록.”
“예? 목적지가 어디기에 장거리입니까?”
“동부. 레슬리 백작가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