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9화.
신뢰가 느껴지는 나단의 반응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러는 그대는 왜 처음부터 합류하지 않은 건가?”
대화 중 비앙카가 로브의 여인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챈 나단의 질문이었다.
비앙카는 호위의 죽음에 나단이 개입해 있을 수 있어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저했었다. 그 일과 나단이 관계없다면, 굳이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나단 님을 의심했거든요. 그리고…… 마님의 진심을 몰라서 고민했어요.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도울게요.”
“고맙네.”
둘은 곧장 앤시아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비앙카가 거침없이 앤시아의 상태를 살피자 나 단이 물었다.
“그대는 의원인가?”
“의원은 아니지만, 마님의 건강관리는 제가 책임지고 있어요.”
나단은 비앙카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앤시아를 최우선으로 두고 있음을 알아챘다. 비앙카가 앤시아의 상태를 살피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침묵했다.
“역시, 약초를 구해 와야겠어요.”
비앙카는 급격하게 나빠진 앤시아의 상태를 보고 그간 꾸준히 먹인 약초 물과 환약의 효과를 확신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공작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라 매일 먹어도 될 만큼 양이 넘쳤으나 이곳에서는 다르다. 게다가 폭설이 내리면 약재를 포함한 모든 소비품의 값이 두 배 이상 오르기 일쑤였다. 마을 사람들이야 매년 준비하기에 충분하겠지만, 외지인은 필연적으로 손해를 볼수밖에 없었다.
“으음……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는 앤시아의 모습에 비앙카는 조급해졌다.
“나단 님, 아까 핫팩 꺼내셨죠?”
“핫팩?”
“앗, 마님께서 보온 마석을 종종 그렇게 부르셔서 실수했네요.
보온 마석이요. 몇 개 가지고 계세요?”
“로브에 대략 열 개 정도 붙어 있더군.”
“……역시 마님이시네요. 세 개만 주세요.”
“이 집을 빌리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그 정도는 한 개면 충분해요.
어차피 사람이 안 들면 망가질 빈집인걸요. 두 개는 돈으로 바꿔 올 거예요.”
비앙카의 답에 나단은 다섯 개를 넘겨주었다.
“세 개면 된다니까요?”
“시세란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나 정도는 여유로 가져가야지.
그리고 하나는 그대가 쓰고.”
선심 쓰는 기색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보온 마석을 넘기는 나 단의 태도에 비앙카에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사라졌다.
비앙카는 공작가에서 지내며 앤시아의 호의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관대함인지 배웠다. 이런 귀족은 어디에도 없다며 사용인들의 칭찬이 입에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 나단도 앤시아와 비슷했다. 하녀가 춥지 않을까 염려하며 값비싼 보온 마석을 선뜻 내어 주었다.
여러모로 경계했던 게 무안할만큼 두 사람의 성품은 닮아 있었다.
“감사해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마님께서 주셔서 지금도 잘쓰고 있거든요.”
나단과 앤시아만 두고 나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비앙카는 이제 가뿐해진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하늘을 보니 조만간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이 시기에 내리는 눈은 몇 날 며칠 내려 작은 마을을 고립시켰다. 이미 수십 년째 반복되는 일이라 마을에 비축된 식량은 차고 넘쳤으나 외지인들은 서둘러 떠나야 할 시기였다.
공작가에서도 앤시아를 찾고 있을 테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깊은 숲속 작은 마을까지 찾아올리 없었다. 편지나 전서구를 이용해 소식을 알린다 한들 그들이 올 때쯤이면 눈이 쌓이기 시작할터.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마님을 빨리 회복시켜야 해.”
우선 집값부터 치르고 식료품이랑 약초를 조달해야 했기에 비앙카의 걸음이 빨라졌다.
나단은 앤시아의 곁을 지켰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색색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에 나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쉴 곳을 찾아 헤매며 품안의 뜨거움이 차가움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괜히 앤시아를 찾아와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후회도 했다.
혹 앤시아를 노린 일이었다면 그나마 자신이 곁에 있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분통이 터졌다.
로브 밖으로 나와 있는 앤시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은 나단은 손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고 부드러운 손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작은 손으로 눈토끼를 잡았지. 북부에 시집와 고생한 건 아닌지 걱정했단다, 앤.”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이 손이 나단을 구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아팠다.
비앙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쉴수 있었을까.
나단은 그녀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을 보필하는 것은 하녀의 본분이나 지금 같은 때에 비앙카 혼자서만 일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앤시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한들 그녀의 열이 떨어지는 것도, 갑자기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님을 알기에 나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없는 가구와 나무 바닥에 쌓인 뽀얀 먼지는 앤시아에게도 좋지 않을 터. 나단은 좁은 집을 살피며 걸레인지 수건인지 애매한 천을 몇 개 찾아냈다. 녹슨칼은 위험해 보여 한쪽에 치워두고 의자나 테이블의 상태도 확인했다. 몇 년 방치된 것치고는 쓰기에 무리는 없어 보였다.
천만다행하게도 설비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 간이 수도 역시 사용 가능했다.
나단은 찾아온 천 중 가장 깨끗한 천을 적셔 앤시아의 이마에 얹어 주고, 다른 천으로는 주변의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 보니 비앙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등에 짐을 가득 메고 나타난 비앙카는 테이블과 바닥에 우르르물건을 쏟아 놓았다.
약재와 식재료는 물론 장작까지 수북하게 쌓였다. 도저히 한 사람이 들고 올 만한 양이 아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짐을 혼자 들고 왔나?”
“제가 힘이 좀 세서요. 어? 나 단 님이 청소하신 거예요?”
나단의 손에 들린 걸레를 보며 비앙카가 놀라워하자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청소라기엔 어설프지. 먼지만 좀 닦아 낸 것뿐이네.”
“솔직히 꼼짝도 안 하실 줄 알았거든요. 온종일 혼자 뛰어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
대놓고 말하는 비앙카의 투명한 태도에 나단은 옅게 웃었다.
“은혜를 입고도 몰염치하게 굴수는 없지.”
“그러시다면 좀 도와주세요. 화덕에 불 지피고 냄비에 물 담아서 올려 주시고요. 그다음엔 여기 식재료를 닦아 주세요.”
동공 지진을 일으킨 나단의 눈을 보며 비앙카는 다시 문으로 향했다.
“전 두 분이 갈아입을 옷이랑 마차가 있는지도 알아보고 올게요.”
“아, 그대 것도 사도록 해.”
나단은 서둘러 보온 마석을 하나 더 내밀었다.
“비앙카예요. 그리고 돈은 충분해요.”
나단은 그제야 자신이 하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미안하네. 고마워, 비앙카.”
“별말씀을요. 저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장난스럽게 윙크까지 한 후 달려 나가는 비앙카를 보며 나단은 황당했다. 귀족에게 윙크를 날리는 하녀를 남들이 보면 무어라 생각할까 싶으면서도 유혹은커녕 장난기만 가득했다.
앤시아와 전혀 다른 행동이나 반응임에도 묘하게 닮아 있어 유쾌했다.
비앙카의 활발함은 침울해지려던 나단에게 무척 도움이 됐다.
“어디 보자. 먼저 불부터 지펴야겠지?”
나단은 비앙카가 시킨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검은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비앙카와 나단이 이곳에 머문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앤시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간신히 죽과 약을 먹이는 게 전부였다.
비앙카는 그동안 공작가의 귀한 약재를 배합해 앤시아의 기력을 끌어 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어린아이보다 못한 체력을 차근차근 늘려 왔건만, 일주일간 고역을 겪은 탓에 앤시아의 몸이 견디질 못했다.
다행히 어제 길을 잘못 든 무리 중 의원도 있다는 소식을 물건을 사며 주워들었다. 비앙카는 그들이 떠나기 전 찾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으, 추워.”
튼튼하고 추위를 별로 안 타는 비앙카조차 몸을 움츠릴 만큼 바람이 차가웠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차 한낮임에도 어둑했다. 곧 폭설이 내릴 징조였기에 외지인들은 서둘러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비앙카는 창문 앞에 기웃거리는 두 장정을 발견하고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왜 남의 집을 훔쳐봐요?”
“후, 훔쳐본 건 아닌데.”
“어? 오랜만이네, 비앙카.”
비앙카가 힘이 세기는 하나 두장정을 이기기는 무리였다. 다행히 한 명의 얼굴이 낯익어 비앙카는 코웃음을 쳤다.
“별로 반갑게 인사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데? 아직도 여자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니?”
“너도 알다시피 마을에 여자가 너무 적잖아. 이건 당연한 구애행위라고.”
이 마을 사내들은 하나같이 아랫도리가 가벼웠다. 아무래도 산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마수를 직접 정리할 만큼 거친 성정의사내들이 대부분이었다. 외지인 중 여인이 보이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껄떡대기 일쑤였다.
개중에는 진심으로 신붓감을 찾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연이 아니고서야 잠시 마을에 들른 이들이 이런 작은 마을의 남성에게 관심을 줄 리 없었다.
귀족인 앤시아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이 두 녀석은 특히 머저리였다.
“토미, 너희 아버지가 우리 언니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어.
그래서 난 너한테도 감정이 안좋아.”
“언니? 너한테 언니도 있었어?”
“응.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아서 몰랐을 거야. 보다시피 우리 언니가 워낙 여리고 사랑스럽잖아.”
“그보다 귀족 같은데…….”
“응, 맞아. 귀족이랑 결혼했으니 귀족이지.”
비앙카는 능숙하게 준비해 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덩치는 커도 어리숙한 토미는 어릴 때부터 자주 봤던 비앙카의 말을 쉽게 믿었다.
“아, 역시 그 허여멀건 귀족이랑 부부였구나.”
“거봐. 다들 그럴 거라고 했잖아. 헛물만 켰네.”
툴툴거리며 먼저 돌아서는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를 토미가 마지못해 쫓았다.
아무래도 앤시아의 존재가 특별하긴 해서 그나마 자기들끼리 도전자를 선별해 온 듯싶었다.
거짓말로 둘러댔지만 유부녀라해도 남편이 없으면 들이댈 놈들이라 저 둘로 끝이 아닐 수 있었다. 비앙카는 창문의 덧문이 떨어져 나간 걸 보고 의원을 만난 후 커튼을 사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