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1화.
어릴 때도 종종 며칠씩 쓰러진 적이 있어 이 상황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그보다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공작가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앤시아를 당황케 했다.
앤시아가 의식을 잃은 동안 선 장소에서 비앙카와 나단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필 이럴 때 계속 누워만 있었다니… 미안해요.”
“깨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단다, 앤.”
“열이 잡힐 듯 안 잡혀서 걱정했던 거에 비하면 마님이 이렇게 눈을 떠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요.”
정작 두 사람은 며칠간 고생에 익숙해졌는지 평온해 보였는데, 어쩐지 무언가 숨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비앙카가 상기된 얼굴로 자꾸만 나단을 찔러 대는 게 영 신경이 쓰였다.
“앤, 꼭 알아야 할 소식이 있는데 말이다.”
나단은 이상하리만치 망설였다.
앤시아가 빤히 쳐다보자 나단은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이상하게 열이 안 떨어지고 네게 쓸 약재가 부족해 의원을 불러 진찰했단다. 그간 비앙카가 네게 꾸준히 먹인 약초 덕에 정말 몸이 좋아진 게 맞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앤.”
“네, 오라버니.”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일까. 앤시아는 불안하면서도 나단에게서 걱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앤시아. 네게…….”
“축하드려요, 마님!”
참지 못하고 비앙카가 먼저 소리친 후 나단 역시 웃음을 보였다. 어리둥절한 앤시아에게 나단은 더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가 생겼다는구나.”
“네?”
“네!”
앤시아의 되물음에 비앙카가 주먹 쥔 양손을 앞뒤로 흔들며 흥분을 주체 못 한 듯 답을 했다.
앤시아의 시선이 나단에게로 옮겨졌다.
“…네?”
앤시아의 멍한 한마디에 웃고 있던 나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단의 눈물에 당황한 앤시아가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었다.
“오, 오라버니?”
“내게 조카가 생긴다니. 너무 이르다 싶으면서도 그만큼 네 몸이 회복됐다는 뜻이라 감격스럽구나.”
“아유, 나단 님 아까도 우시더니 또 우신다. 마님, 정말 축하드려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리바리하던 앤시아는 나단의 진심에 뭉클해졌다. 게다가 나단의 등 뒤에서 호들갑을 떠는 비앙카 덕에 웃을 수 있었다.
“응, 고마워. 임신……이라니 생각도 못 했는걸? 어, 음……. 일단 공작가에 소식을 알려야겠지?”
“다행히 눈발이 강해지기 전이라 급히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단다. 그러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건?’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는 말일까?
앤시아는 좁은 집 안을 불태울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장작과 창문에 겹겹이 붙은 커튼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제 몸이 낫는 대로 돌아가야 할 텐데 마차는 구했나요?”
어색한 두 사람의 웃음에 앤시아는 불안해졌다.
앤시아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하자 비앙카가 곧장 창문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 보였다.
뿌연 창문. 작게 나 있는 창이 새하얗기에 김이라도 서린 줄 알았다.
나단의 부축을 받아 창가로 다가간 앤시아는 희뿌연 창밖으로 세차게 불어닥치는 눈발을 보고 경악했다. 바깥에 사람 소리가 들리는데 보이는 건 눈 뭉치가 엉금엉금 걸어가는 모습이었고 그마저도 금세 거센 눈발에 가려졌다.
이제 보니 창틀에도 눈이 쌓여 작은 창의 절반을 가릴 정도였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잖아?
이렇게 눈이 와도 집에 갈 수 있어요?”
나단은 쓴웃음을 지었고 비앙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숲이 하얀 숲으로 변하는 계절이에요, 마님.”
검은 숲을 이룬 뾰족한 나무들에도 눈이 쌓일 만큼 쉼 없이 눈이 내리는 시기.
앤시아가 북부에 대해 글로만 알고 있던 내용이 비앙카의 경험담으로 흘러나왔다.
“특히 이 마을은 눈구름이 한번 머물면 며칠 동안 떠나지 않아 폭설이 내리기로 유명하고요. 이 일대가 사람 키만큼 눈이 쌓여서 고립돼요. 지금 밖에 보이는 사람들은 마을 안 제설 작업 중인 거고요.”
“그럼 지금이라도 떠나야 하지 않아?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아뇨. 마님은 지금 절대 안정하셔야 해요. 이제 간신히 열이 내리기 시작한걸요.”
앤시아를 만류하며 비앙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래도 아기에게 문제가 될 약재를 쓰지 않아 정말 다행이에요.”
아기라는 말에 앤시아는 덜컥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앤시아는 거의 포기했던 아이의 존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튼튼한 장정들도 여간하면 이 시기에 움직이지 못해요.”
“그럼 봄까지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거야?”
“그렇다 해도 걱정 마, 앤. 어느 쪽이든 편지만 도착하면 눈을 헤치고 구하러 올 테니까.”
“맞아요, 마님. 공작가의 마석을 전부 털어서라도 주인님은 마님을 모시러 올 거예요.”
백작 부부라면, 리샤르라면 분명 앤시아와 나단을 구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확신에 찬 두 사람의 말에 앤시아는 민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기는 해도 안심할 수 있었다. .
걱정은 조금 덜었지만, 매섭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앤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혹 찾아오는 게 늦어도 건조식량이랑 땔감 모두 한 달 치 이상 구해 놨어요. 외지인이 종종 고립될 경우 비싸게 팔려고 다들 넉넉히 갖춰 두거든요.”
비앙카는 불안해하는 앤시아를 다시 침대에 눕히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염려 말라는 비앙카의 말이 또 든든해서 앤시아는 웃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몸이 호전된 건 전부 비앙카의 약초 지식 덕이었다.
그런 그녀가 곁에 있어 주니 든든해졌다. 누구보다 자신을 위하는 나단의 존재 역시 그러했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앤시아에게 무척이나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불안함이 가시자 아직 열이 남은 몸이 가라앉았다.
“고마워, 비앙카.”
“아니에요. 제가 더 빨리 두 분을 믿었어야 했는데.”
“응?”
의아해하면서도 힘에 겨운 듯 눈꺼풀이 자꾸 감기는 앤시아의 반응에 비앙카는 미리 달여 둔약초 물을 마시게 했다.
“이거 마시고 주무세요. 일어나시면 다 얘기해 드릴게요.”
“응…… 알았어.”
물어볼 게 많았지만, 졸음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기가 생겼다니.
마거릿이 떠나기 전 검사라도 받아 볼 걸 그랬다. 깨어나면 그녀에게도 편지를 쓰자 생각하며 앤시아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앤시아는 정말로 몸이 편안해졌음을 느꼈다.
오래 누워 있어 필연적으로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전과 달리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지는 감각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라면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앤시아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조심스럽게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살살 여기저기 문질러 봤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정말 이 납작한 배에 생명이 깃들었을까?
아무런 징조도 느끼지 못했기에 앤시아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한참 배를 문질거리던 앤시아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놓여 있는 로브를 걸치고 나 단과 비앙카를 찾아 문을 열었다.
“앗, 마님. 일어나셨어요?”
“앤, 안 그래도 곧 깨우려고 했는데. 다행히 좋아 보이는구나.”
앤시아를 반기는 두 사람은 눈투성이였다. 무릎 위까지 눈의 흔적이 보여 바깥 상황을 짐작게 했다.
“두 사람, 왜 눈을 뒤집어썼어?”
“지붕의 눈을 털어 주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거든요. 나 단 님이 줄을 잡아 주셔서 안심하고 싹싹 털어 냈어요. 집 주변도 쓸고, 해가 지기 전에 한 번 더 올라가야 할 거 같지만요.”
비앙카의 무릎 위까지 푹 젖어 있는 걸 본 앤시아는 자신의 몸상태와 별개로 마을을 떠나기에는 이미 늦었구나 싶었다.
“정말 고생이 많구나.”
집 주변의 눈을 치운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흠뻑 젖어서 돌아왔다.
백작가와 공작가에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고 하니 눈 쌓인 길을 억지로 빠져나가기 보다 마을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안해.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당연히 있지.”
상냥한 웃음을 보인 나단은 주방 공간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앤시아를 앉혔다. 그러고는 온 집 안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를 듬뿍 떠 앤시아 앞에 내려놓았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먹고 건강을 되찾아 주렴. 그거면 나도 비앙카도 기꺼이 힘을 낼수 있을 테니까.”
역시 내 오라버니.
앤시아는 수프를 한 입 맛보고는 깜짝 놀랐다.
노숙하며 먹었던 끔찍한 눈토끼스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눅진하면서도 고소한 수프였다.
“맛있어요! 이거 혹시 비앙카가 끓인 거야?”
“네, 마님.”
“이 고기, 눈토끼 맞지? 이게 이렇게 맛있다고?”
앤시아의 질문에 비앙카가 어깨를 펴며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자주 먹게 될 거예요.
보관 창고는 잘되어 있지만, 보존 마석까지는 없어서 마른 식량위주로 챙기다 보니 재료가 한정돼서요. 그래도 마을 식당은 운영하니까 외식을 하셔도 돼요.”
“그렇구나. 비앙카, 알아보느라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자주 오가던 마을이라 알고 있는 것뿐인걸요.”
“숲을 헤맸는데 아는 마을을 오게 되다니 신기해. 인연이 있나 봐.”
비앙카가 자주 오가던 마을로 오게 된 경위를 모르는 앤시아는 신기해하며 수프를 떠먹었다. 마냥 해맑은 앤시아는 바깥이 궁금한지 두리번거렸다. 비앙카는 그런 앤시아에게 마을에 대해 알려 주었다.
“마님, 이 동네 사람들이 겨울만 되면 폐쇄적으로 지내다 보니 이 시기에 사고도 많이 치고 커플도 많이 생겨요.”
조심스러운 비앙카의 태도에 앤시아는 수프를 떠먹으며 귀를 기울였다.
“마님과 나단 님이 여관에 잠깐 모습을 보인 이후에 마을에 소문이 쫙 돌았어요. 마님께서 누워 계신 동안 창문으로 얼마나 많은 놈팡이…… 사내들이 기웃댔는지 덧문마저 떨어져 나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