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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11화 (11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2화.

“하지만 창밖에 아무도 없던데?

아, 눈이 와서 그런가?”

“아뇨. 그게 아니고…… 놈팡이 같은 놈들이 많긴 해도 그래도 하나는 지키거든요. 유부녀는 건들지 않는다.”

“나 유부녀잖아.”

“하지만 남편이 옆에 없으면 무효.”

“임신까지 했는데?”

“아이까지 책임지겠다는 호탕함으로 여심을 휘어잡겠다! …라는 게 이 동네 사고방식이라서요.”

“그렇구나.”

“사정이 이래서 나단 님과 마님이 부부라고 알려 뒀어요. 그래서 다들 조용한 거고요.”

그런 동네 분위기라면 남매라고 말해 봤자 통할 리가 없었다. 비앙카의 현명한 처신에 수긍한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거짓말이네. 잘 둘러댔어.

고마워.”

“그리고 마님은 제 언니라고 해뒀어요.”

그 설정, 꼭 필요한 거야?

차마 묻지 못한 건 비앙카의 눈이 너무도 초롱초롱해서였다.

앤시아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앙카는 더욱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혹시 함께 외출할 일생기면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백 프로 사심 가득한 비앙카의 간절한 눈을 보며 앤시아는 푸훗웃음을 터트렸다.

정신을 잃고 한참 만에 깨어나서는 임신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돌아갈 길은 눈으로 가로막혀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어찌 보면 두렵고 절망적이지만, 비앙카의 철없는 애정과 나 단의 다정한 호의에 앤시아는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비앙카가 언니처럼 보이지 않아?”

“아뇨. 마님이 언니세요.”

“그래, 그렇게 해.”

“가, 감사합니다! 마님, 바깥에서만 언니라고 부를게요. 감사해요!”

저렇게 좋을까.

언니를 연발하는 비앙카의 행동을 지켜보는 앤시아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 모든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단도 환히 웃었다.

***

겨울이 깊어져 가는데도 동부의 낮은 아직 따스했다. 레슬리 백작가 정원의 꽃들은 시들기에 이르다는 듯 한껏 화사하게 피어났다.

정원사 폴은 올해 마지막 꽃을 살피며 상처 없는 꽃 몇 송이를 따로 빼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으로 들어선 메리가 바구니에 담긴 꽃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시아가 떠난 이후에도 그녀의 방을 치우고 정원의 꽃으로 향주머니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메리의 몫이었다.

더불어 이 꽃바구니는 백작가에 전달되는 중요한 편지나 쪽지를 은밀하게 들여오는 수단이었다.

메리는 자연스럽게 꽃바구니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중요한 연락책이기도 했다.

최근 백작가 주변을 서성이는 커다란 북부인들은 본인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외모나 덩치가 동부인들과 달리 억세게 생겨서 나무 뒤에 서 있어도 지나가는 행인인 척 위장해도 백작가 사용인들은 모조리 알아채고 있었다.

저런 북부인들이 마수를 도륙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어리 숙해 보였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방심하지 않고, 전부 웃는 얼굴로 그들을 경계했다.

저들이 등장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백작 부부를 통해 앤시아와 나단의 실종 소식과 그 배후로 레슬리 백작가가 지목됐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다.

‘나단 도련님이 그럴 리가 없어.

몸이 약한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이라니. 몰라도 너무 모르잖아, 저 무식한 북부인들은.’

소백작을 여전히 마음속으로 도련님이라 부르는 메리는 바구니 안을 눈으로 살폈다. 오늘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메리는 결코 저들에게 들키지 않으리라 다짐하다가 봉투에 쓰인 이름을 보고 놀라 멈춰 설 뻔했다.

나단 레슬리라는 서명이 선명한 봉투와 그리 두껍지 않은 편지에 메리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서 이 편지를 백작님께 전해야 했다. 혹여나 감시하는 북부 인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꽃을 살피듯 손에 들었다 놓기도 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메리의 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댕~ 댕~.

잔뜩 긴장하고 있던 메리는 갑작스러운 종소리에 놀라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다행히 모두의 이목이 부산스러운 저택 입구로 향한 터라 메리는 편지와 꽃송이를 재빨리 주워 들었다.

그사이 정문을 바라보던 사용인들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저, 저게 뭐야?”

“깃발이·

그윈티드 아냐?”

“감시하다 못해 아예 쳐들어오는 거야?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레슬리 백작가가 어떤 가문인데.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그간 웃음으로 답답한 속내를 감추고 있던 사용인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점차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그들의 분노는 곧 당혹감으로 변했다.

“미, 미친! 진짜로 쳐들어오잖아!”

“백작님께 알려!”

밖을 보며 구시렁대던 사용인들이 다급히 흩어졌다.

메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수많은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숨길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혹여나 이 편지가 빌미가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사이 저택 입구를 지키던 병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거칠기로 유명한 북부인, 그중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인 그윈티드 공작이 예의조차 차리지 않고 백작저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메리는 가까운 벽난로에 주저없이 편지를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메리가 근처에 꽃을 흩뿌리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저택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흩날리는 먼지와 빛 사이로 거 한의 기사들이 들어섰다. 얼마나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는지 그들이 멈춰 서자 무서울 만큼 적막해졌다. 투레질하는 말 소리와 얻어맞아 쓰러진 병사들의 끙끙대는 신음만이 전부였다.

쿵-쿵~ 쿵-.

말에서 뛰어내린 것만으로도 지축을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빛을 등져 시커멓게 보이는 이가 바닥에 주저앉은 메리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방문 서신을 보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군. 대접이 형편 없는 걸 보니.”

낮고 어두운 목소리의 압박감에 메리는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백작 부부를 만나러 왔으니 안내해.”

“누, 누구신지 말씀을 해 주셔야 주인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 흐읍…….”

메리는 상대의 기세에 겁을 먹었음에도 어떻게든 절차대로 하려 했다. 간신히 말을 꺼내며 고개를 들던 메리는 푸른 눈에 담긴 서늘함과 무감각함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를 것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리샤르 그윈티드. 내 아내를 되찾으러 왔다.”

메리는 어느새 자신의 뺨을 푹적실 만큼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부들거리며 물러 섰다.

리샤르와 정면에서 눈을 마주친것만으로도 공포심에 숨조차 쉴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메리는 앤시아를 떠올렸다. 저런 무서운 자와 지내며 그리 사랑스러운 편지를 보내 오셨다니. 아가씨를 향한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메리의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흐윽, 소, 손님이시라 하시니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이미 백작 부부를 향해 달려간 사용인들이 있었다. 메리는 최대한 리샤르와 눈을 맞추지 않고 덜덜 떨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응접실로 향하기 위해 리샤르의 앞을 지나치는 순간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온화한 음성이 작게 들려왔다.

“아내에게서 맡던 향이군.”

어쩌면 저 북부의 사신 같은 존재도 사랑스러운 아가씨 앞에서는 조금 달랐을까. 메리는 굳어버린 다리를 두드리며 두려움을 떨쳐 내려 애썼다.

이 모든 상황을 위층에서 지켜보았던 백작 부인 힐다는 평소장식용으로 두었으나 거의 매일 닦아 놓는 검을 집어 들었다. 남편이자 백작인 로건 레슬리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검을 들고 응접실로 향했으리라.

대신 백작가의 기사들을 대동한 백작 부부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응접실 복도에는 사용인들과 병사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힐다는 그들을 향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갯짓했다.

“무례한 이들이 예의를 모르고 찾아와 정원의 길이 엉망이 되었구나. 다들 힘들겠지만, 보수 작업을 시작해 줬으면 하네.”

“예, 마님.”

여유로운 힐다의 지시에 긴장했던 사용인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비쳤다.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흩어지자 힐다는 웃음을 거뒀다.

굳게 다물린 턱이 꿈틀거릴 만큼 힐다의 분노는 명백했다. 백작은 그런 힐다를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으나 이 상황에 화가 난 건 마찬가지라 일단 근엄한 얼굴을 했다.

하녀들의 손에 문이 열리자 보인 건 화사한 응접실이 아닌 시커먼 벽이었다. 새까만 갑옷을 입고 빽빽이 서 있는 기사단의 압박감에 응접실 벽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였다.

그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는 장신의 미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백작 부부의 등장에도 눈을 뜨기는커녕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요했다.

귀족의 저택에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 자리 잡은 이치고는 무척이나 평온한 모습에 힐다가 앞서 나갔다. 힐다의 사뿐한 걸음걸이로 인해 소리조차 나지 않았으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상 모를 리 없었다.

리샤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인사조차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내만 되찾으면 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할 것이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자 고요하다고 느낀 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어둠이 드러났다.

“모든 걸 용서하겠소. 그대들의 아들 역시 무사하리라 보장하지.”

그의 눈에 담긴 집착과 분노가 서늘한 기운을 사정없이 내뿜었다.

따라 들어온 하녀들은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고, 기사들은 겁을 먹는 자신들이 부끄러워 힘을 주며 버텨 냈다.

쨍그랑 -.

힐다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힘 있게 내리쳐 깨뜨렸다. 그로 인해 찻잔 조각이 리샤르의 뺨으로 튀었으나, 장갑을 낀 그의 손에 잡혀 천천히 테이블 위로 놓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힐다의 행동에 모두가 숨죽인 고요한 응접실. 힐다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용서는 공작께서 비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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