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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12화 (112/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3화.

아내와 함께 사라진 소백작의 존재를 추궁하기 위해 찾아온 상황이었다.

백작 부부가 무릎을 꿇고 선처를 바라며 매달려도 모자란데, 돌아온 건 날 선 분노였다.

흑의 기사단이 주는 엄청난 압박감을 이곳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가운데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듯 백작 부부는 꼿꼿하기만 했다. 그들의 당당함과 힐다의 무례함에 리샤르는 차분히 대응했다.

백작 부인의 실수는 한 번 정도는 눈감아 주지.”

“실수는 누가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보름이 넘도록 나단과 앤시아는 실종 상태였다.

백작가에서는 백방으로 정보를 모으고 조사단을 북부로 보냈음에도 공작가에서는 어떤 소식도 따로 알려 오지 않았다. 그러기 는커녕 줄곧 백작가를 감시해 왔다.

힐다는 공작과 마주하자 그간 눌러 온 분노를 더는 참지 못했다.

“감히 레슬리 가문의 문턱을 넘다니.”

“감히?”

“우리 착하디착한 앤을 믿지 못하고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내는 믿고 있소. 소백작 역시 믿고 있어 문제지.”

“둘 다 믿는데 이게 웬 행패입니까?”

“나단 레슬리가 내 아내, 앤시아 그윈티드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어.”

확신을 가진 단호한 태도였다.

이에 힐다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무슨 소리…….”

“그렇기에 레슬리 소백작이 내 아내를 납치했을 수도 있음을 염두 해 두고 있소.”

그가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고 무슨 일을 벌일지 두려울 정도니까.

리샤르의 말대로 나단이 앤시아에게 여전히 감정이 있음은 힐다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걸 이유로 앤시아를 힘들게 한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레슬리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를 납치범으로 몰고 가시는 겁니까?”

“정황상 소백작이 가장 유력하니 협조해야 할 거요, 백작 부인. 내가 그대들을 아직 아내의 후견인으로 대우하는 동안.”

시종일관 차분해 보일 만큼 서늘한 기색을 풍기던 리샤르의 위협하는 듯한 눈을 마주한 힐다는 되레 분통을 터트렸다.

“지금 어디서 눈을 그따위로 뜨십니까?”

백작가 사용인들은 물론 공작가 기사들마저 놀랄 만큼 선을 넘어버린 발언이었다.

리샤르조차 이런 상황은 생각 못 했던 듯 차갑기만 하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정작 힐다는 이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검 대신 들고 온 짧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지금 내가 당신의 목을 조르지 않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내 딸, 우리 아가가 그 차디찬 북부에서 사라져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조금 전의 우아한 걸음과는 상반된 거친 걸음으로 리샤르가 앉은 테이블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갈 때마다 힐다의 분노는 점점 격양되어 갔다.

“감히. 당신이. 여길 와서 앤시아를 찾아?”

존대조차 잊고 목에 핏대를 세운 힐다는 벌게진 얼굴로 리샤르를 협박이라도 할 기세였다. 흑의 기사단이 반응하려는 듯 꿈틀거리자, 백작이 힐다를 붙잡아 리샤르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게 했다.

“내 딸을 잃어버려 놓고 잘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다니!”

“부인, 진정하시오.”

“하, 앤시아와 나단이 도망갔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오죽하면 그 착한 아이가 도망을 쳤겠습니까? 혹여나 그게 진실이고 나단에게 연락이 온다면 마지막 재산 한 줌까지 쏟아부어서라도 두 사람의 도주를 도울 것입니다.”

“부, 부인.”

가정일 뿐이나 단호하면서도 위험한 발언에 백작이 당황스러워했다.

리샤르는 단 한 번도 힐다의 말을 막지 않았다.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힐다의 얼굴에 비치는 거짓과 힌트를 찾아내려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힐다의 날 선 반응에 리샤르는 덤덤하게 지적했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는 게 좋을 텐데.”

“공작, 당신이야말로 책임져야 할 겁니다. 내 딸, 우리 앤시아를 찾지 못하면 내 모든 걸 걸고 그 대의 인생을 후회하게 만들 테니까. 여기서 생사람 잡지 말고 당장 북부로 돌아가 내 딸을 찾아!”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던 것도 잠시, 힐다는 그간 참아 온 감정이 치솟았다. 비명처럼 내지르며 다시 리샤르에게 덤벼들 듯 움직이자 백작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대신 말을 꺼냈다.

“그윈티드 공작, 이럴 시간에 더 열심히 우리 딸을 찾아야 할 거 아닙니까? 의심이 간다 한들 통신구나 서신을 이용하면 될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겁니까?”

지금까지 소파에 앉아 거침없는 힐다의 말을 모두 듣고 있던 리샤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 다.”

마치 거대한 산이 일어난 듯 묵직한 기세에 서늘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소백작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는군.”

리샤르의 지적에 모두가 긴장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힐다에게 선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비꼬는 답이 튀어나왔다.

“내 아들이 공작과 결혼한 건 아니니 책임을 물을 이유가 없지요.”

앤시아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한 공작을 향한 비난이었다. 힐다의 빈정거림에 리샤르는 불쾌해하기 는커녕 기세가 느슨해졌다.

“하……. 아내가 누굴 닮아 그리 말을 잘하나 했더니 백작 부인의 영향이었군.”

이런 상황에서는 말투에 따라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샤르의 풀어진 기세와 한결 가벼워진 말투에서는 호의마저 느껴졌다.

독이 올랐던 힐다의 시선이 흔들렸다.

힐다는 리샤르의 침입에 가까운 방문이 앤시아를 핑계로 황가와 연이 닿기 시작한 레슬리가를 견제하거나 불편하게 만들 의도라고 생각했다.

정작 사라진 앤시아를 찾기보다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건가 싶어 분하고 원통해 체면도 내버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공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앤시아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힐다의 호흡이 점차 차분해졌다. 다시 우아한 백작 부인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다소 시간은 걸렸지만, 조금 전처럼 속내를 모조리 토해내던 진심은 감출 수 있었다.

“저희 역시 후계자가 실종된 마당에 가만있지는 않았습니다. 황가의 도움을 받아 게이트까지 이용해 북부 일대를 조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공작께서도 동부에서 헛되이 시간을 흘려보내지 마시고 돌아가 공작 부인을 찾는 게 어떠신가요?”

실제로 양측 조사단이 서로를 의심하며 칼부림이 일기도 했으니 그 절박함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백작 부부의 반응을 보니 이 일은 소백작, 나단 레슬리 혼자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

힐다의 반응을 보면 나단이 벌인 일이 아닐지도 모르나 마부의 증언이 너무도 명백했다.

백작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나 단이 그간 준비해 왔을지 모를 흔적을 찾아내는 것.

“소백작의 방을 살펴본 후 돌아가도록 하지.”

“제 아들을 의심한다는 말을 대놓고 하시는군요.”

“혹시 모르지 않나. 그리고.”

다소 풀어졌던 리샤르의 분위기가 다시 냉기를 품었다.

“역대 그윈티드 공작이 북부를 떠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인 것을 잘 알 텐데.”

황제의 부름이 있거나, 공작의 자리를 내려놓았을 때.

즉 황가의 일이 아니면 죽음이 가까워질 때나 북부를 떠난다.

이렇듯 젊은 공작이 북부가 아닌 장소에 서 있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기사단까지 이끌고 황궁과 가까운 동부까지 달려온 리샤르의 존재는 황제에게 빌미를 주기 충분했다. 이 일을 트집 잡아 그윈티드를 억압하고 더욱 심한 통제를 해 올 것이다.

그런데도 리샤르는 아내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고자 직접 동부를 찾은 것이다.

결코, 순순히 돌아갈 리 없음을 대놓고 드러냈기에 힐다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방을 보여 드리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아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힐다 역시 수많은 가정을 한 후였다.

혹여나 앤시아가 이곳에 있을 때와 달라졌다면. 힘들어하거나 그늘진 얼굴을 했다면, 소외당하고 있다면, 앤시아를 아끼던 나 단은 그녀를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앤시아의 소식을 접했던 백작 부부는 그녀가 의아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은 물론 주고받는 편지에서도 그러했다. 백작가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던 앤시아의 슬픔은 점점 줄어들고 공작에 대한 사랑과 그윈티드 영지에 대한 호감으로 채워져갔다.

편지를 통해 앤시아의 변화를 지켜보며 힐다는 섭섭하면서도 안도했다.

언제든 돌아오면 기쁘게 반길 테지만, 시집간 여인이 그 가문에서 행복하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단이 앤시아와 함께 도망치는 경우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렇다 해도 모든 걸 확인하는 게 맞았다. 이미 힐다는 나단의 방을 꼼꼼히 살핀 후였다.

북부에 관한 책이 여럿 나오기는 했지만, 앤시아가 좋아하는 포도를 온실에서 재배할 수 있는지 찾아본 흔적이 대부분이었다.

온실과 과일, 포도 재배에 관련된 책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책상 위엔 최근까지 여러 번 수정한 듯 종이가 일어난 온실 도면에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아들의 엉뚱한 노력이 가상했다. 이렇게나 앤시아만을 생각하는 나단이 최근 몸이 좋아졌다 해도 연약한 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의 갑작스러운 북부 방문은 나단에게 마음을 품은 황녀의 제안임을 전해 들은 후였다. 항상 앤시아에 대한 걱정으로 곁을 내주지 않으니 차라리 걱정을 털어 버리고 오라는 의미였으리라.

황녀의 배려와 추진력이 힐다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로 인해 나단과 앤시아가 실종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우연이 겹친 탓에 공작은 이 모든 정황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믿을 때까지 파헤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얼마든지요. 단, 확인 후 곧장 돌아가 내 딸을 찾으세요.”

“그러지.”

냉랭해진 분위기에도 누구 하나 물러섬이 없었다.

*

황궁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황궁의 벽을 가득 메운 마석이 발하는 빛은 흐려질 틈도 없이 수시로 교체되었다.

대부분의 마석은 수십 년간 그 윈티드 영지에서 거두어졌다. 황실은 매년 징수하는 수량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몇 배의 마석을 요구하고는 했다. 이번에는 마수토벌 대회로 추가 마석이 발생되자 세금 명목으로 일정량을 징수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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