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6화.
작은 마을이다 보니 따로 편지를 취급하는 곳은 없었고 잡화점에서 전서구와 편지를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 다소 믿음은 안 가지만, 비앙카의 소개가 있었기에 남은 돈을 탈탈 털었다.
전서구를 보내는 비용은 상당했다. 게다가 공작가와 백작가 양측에 연락을 보내려니 주머니가 홀쭉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다 해도 꼭 자신들의 무사함을 전해야 했기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한동안 날이 맑으면 어느 쪽에서는 답이 올 것이다. 설령 전서 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도 창고 가득 쌓아 둔 건조 식량을 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고작 방 두 개와 보관 창고, 부엌 딸린 거실이 전부인 좁은 집이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자꾸만 기분이 들뜰 만큼 즐거웠다.
몸을 움직여 눈을 치우거나 구해 온 식량을 정리하고, 마을 일을 도운 후 앤시아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시간이 특별했다.
비앙카는 귀족인 나단을 어려워 하지도 않고 태연히 빗자루를 넘기거나 일을 확실히 하라며 타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앤시아의 작은 변화에 열 일 제치고 달려가 그녀를 살피며 애교를 부렸다.
나단은 이런 소소한 삶도 가끔은 즐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년 거절해 온 휴가를 내년에는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황녀는 결코 이런 식으로 지내지 못하겠지만.
전 서구를 보낼 때 황녀에게도 보낼까 잠시 망설였지만, 비용은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았다. 나 단은 백작가로 보내는 편지에 그녀의 안부를 가볍게 물었다.
“이렇게 파란 하늘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한겨울에도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잔뜩 깃털을 부풀린 새가 파란 하늘을 연달아 지나갔다.
새들이 이곳의 소식을 잘 전하길 바라며 나단은 앤시아에게로 향했다.
***
북풍이 몰아치는 듯한 공작가는 매년 겨울이 그러했듯 을씨년스러웠다.
공작 부인의 방을 치우던 엘리는 무거운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 흘렸다.
엘리는 매일 방을 치울 때마다 마님의 곁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최근 검은 숲에서 마님의 마차에 함께 탔던 호위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산짐승에게 뜯긴 듯 훼손이 심했으나 남아 있는 의복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엘리는 걱정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다.
혹여나 이불에 눈물이 떨어질까 황급히 앞치마로 닦아 내고 꼼꼼히 방을 정리했다. 먼지 외에는 치울 것도 없음에도 마님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열심히 청소했다.
부부 침실의 청소도 하고 싶었으나, 매일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공작의 기행을 알고 있기에 확실히 방이 비기 전까지는 접근하지 않았다.
지금 저택 안에서 주인과 마주치고 싶은 사용인은 아무도 없으리라.
***
피폐한 얼굴로 부부 침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리샤르의 얼굴은 어두웠다.
동부에서 돌아온 이후 인원을 배로 늘려 북부를 샅샅이 뒤졌다. 숲에 버려진 호위의 훼손된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일대를 모조리 뒤져 앤시아와 나단이 탔던 마차를 발견했다.
마차는 망가진 곳 없이 멀쩡했고 눈으로 뒤덮인 바닥을 전부 파헤치자 모닥불을 피운 흔적 등이 남아 있었다.
어떤 작은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숲을 뒤집어 놓으며 전진했다.
그 과정에 산적의 은신처도 찾아내고 영역을 넘어간 탓에 다른 영지와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지나치게 쌓인 눈으로 인해 전진하기 힘든 곳까지 도달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숲을 아무리 뒤져도 그 이상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검은 숲은 너무도 넓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영역까지 뒤져 가는 동안 폭설이 쏟아지며 숲길을 덮었다.
그렇다 해도 다소 느려질지언정 멈출 생각은 없었다.
토벌은 꾸준히 나가나 함께하는 기사단의 인원수는 반도 되지 않는다. 리샤르 혼자 모두 도륙해 버리니까.
대신 아내를 찾기 위해 대륙을 전부 뒤질 기세로 모든 인원을 동원했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다.
처음에는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도망친 건 아닌지 분노하기도 했다.
걱정과 분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리샤르를 뒤흔들었다.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쉽게 보이지 않던 따스한 미소와 다정한 걱정을 해 왔다. 이 품안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아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존재하기는 했던 건가?
리샤르는 이제 앤시아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미쳐야 돌아올 건가.”
추위를 많이 타던 아내는 눈이 그치지 않는 북부의 어딘가에서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끼는 두 사람조차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 저울질한 건가.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사라진 이유가. 내가 아닌 둘을 택한 건가.
음습한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어둠 속을 바라보는 리샤르의 눈이 점점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줄리의 매일 아침 첫 일정은 쏟아져 들어온 편지와 보고서를 분류하는 일이었다.
공작 부인을 찾아다니며 수시로 전해지는 수많은 편지와 쪽지들은 밤새 쌓여 있었다. 하녀장인 줄리의 눈은 신중했고 손은 재빨랐다.
아침에는 아서가 들러 확인하기에 가벼운 분류만 해 두면 된다.
빠르게 편지를 살피던 줄리는 물에 젖어 처참한 상태의 쪽지를 발견했다. 다행히 이렇게 젖을 걸 대비했는지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 내용은 읽을 수 있었다.
(검은 숲 동쪽 눈눈 마을. 겨울 폭설로 고립. 세 사람 모두 무사. 방문 요망. -나단 레슬리) 전서구를 이용하다 보면 짧아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 내용은 충분했다.
앤시아와 함께 사라진 나단이 보낸 전서구였다.
눈눈 마을이면 비앙카가 자주 자랑을 하며 언급했던 곳이기도 했다. 지도에도 없고 상당히 멀고 깊숙한 곳이라 외지인들은 우연히 길을 잘못 드는 게 아니면 여간해선 발견하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 있으니 두 가문이 돈을 쏟아부어 가며 찾아다녀도 찾지 못한 것일 테지.
모두 무사한 것을 짧은 글로나마 확인한 줄리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줄리는 처음과 같은 크기로 접어 책상 아래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당장 아서에게 넘기지 않고 혹시 언젠가 발견되더라도 편지를 정리하다 떨어졌다고 말하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줄리의 이런 행동은 이미 예정됐던 일이었다.
앤시아의 충동적인 선택으로 전 담 하녀가 되고, 이후 하녀장이 된 줄리는 황태자가 심어 둔 세작 중 하나였다.
과거 시녀장이었던 로사와 황태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 줄리의 임무였다. 단순한 일이었기에 그간 큰 죄책감없이 해 왔으나 로사가 사라진 이후 줄리의 역할은 무의미해졌다.
쓸모가 사라진 세작이었기에 줄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그러나 앤시아의 실종이후 황태자 측에서 줄리에게 새로운 임무를 전해 왔다.
한두 번이라도 좋으니 공작 부인과 관련된 정보를 차단하는것.
임무는 단순했으나 그 속에는 공작을 향한 황태자의 뿌리 깊은 미움이 느껴졌다. 작은 것 하나부터 큰 건까지 황태자는 공작가에 영향을 끼치고 싶어 했다.
설령 책상 아래 숨겨 둔 쪽지가 며칠 뒤에 발견된다 하더라도 백작가 쪽에도 같은 내용의 편지가 전해졌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줄리는 애써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억눌렀다.
줄리는 곧은 자세로 남은 편지를 정리했다.
이 작은 일이 리샤르를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트릴지 모르는 줄리의 얄팍한 변명 같은 짐작은 바쁜 하루 속에 묻혔다.
***
“이상해.”
“네, 이상해요.”
“아무리 전서구가 종종 사라질 수도 있다고는 하나 이전에 보낸 편지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불운이 겹치면 그럴 수도 있어요. 편지를 실은 마차가 검은 숲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전서구로 날아가던 새가 사냥감이 되거나 얼어 죽는 일도 있으니까요.”
의문을 품는 나단과 달리 비앙카는 그럴 수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럼 그대는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언니의 배요.”
“비앙카. 호칭.”
우리끼리인데도 호칭에 주의하라며 나단의 시선이 엄해지자 비앙카가 삐죽거리며 정정했다.
“그때 불렀던 의원의 말에 따르면 임신 삼 개월쯤이라고 했잖아요. 이곳에 머문 지 두 달이 넘었으니 오 개월 이상일 텐데 마님의 배가 너무 작고 귀여워요.”
앤시아가 작고 귀여운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작게 부푼배조차 귀여웠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단과 달리 앤시아는 덜컥 겁을 먹은 얼굴을 했다.
“그거 걱정해야 하는 이야기야?”
그간 거의 정상 수준으로 체력이 돌아온 앤시아는 집 안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했다. 그중 하나인 해라에게 받아 온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며 불안해했다.
“아뇨. 사람마다 배가 불러오는 건 다 다르다고 했어요. 제가 알던 아주머니 중 겨우내 살이 찐건가 하시다 애를 낳은 분도 있는걸요. 전 그냥 마님은 임신하셨어도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그런 거야? 다행이야…….”
안도한 앤시아는 이제야 좀 티가 나기 시작한 부른 배를 살며시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시아는 지금 느낀 감정이나 대화를 남겨 두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몸이 조금씩 회복된 앤시아는 리샤르 없이 보내는 겨울을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 그리고 아이의 존재에 대한 기쁨을 생각날 때마다 적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