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8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움직인 탓이었다.
“윽,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 아내는.”
리샤르는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녀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나단 레슬리, 이자가 멀쩡한 얼굴로 앤시아를 언급하고 위치까지 말하는 걸 보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앤시아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리샤르의 무례함에 화를 내려던 나단은 그가 풍기는 어두운 분위기와 초췌해진 얼굴을 마주하고 멈칫했다.
편지가 가지 않았으니 공작은 여태 심란했을 것이다. 나단은 공작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모습이 앤시아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면 두렵기보다 안쓰럽기까지 했다.
“위치를 알려 드리기 위해 지도를 꺼내러 가는 겁니다. 같이 가셔도 좋으니 목은 좀 놓아주시죠.”
망설이던 리샤르의 손이 목에서 어깨로 이동했다. 어느 정도 나 단을 억압하면서 앞장서게 만들었다.
리샤르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백작가로 달려왔기에 앤시아와 나단의 소식을 얻는 건 절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나단이 바로 눈앞에 있지만 아직도 이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계단을 내려오던 백작 부인 힐다가 나단을 보고 반색했다. 하지만 곧 앤시아가 보이지 않자 창백하게 질렸다.
“나단! 앤시아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공작님께 지도를 그려 드리고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저는 보시다시피 무사합니다.”
나단은 앤시아의 안부부터 묻는 부모님께 가벼운 너스레까지 떤후 방으로 향했다.
책상 속에 있던 지도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니 비앙카의 말대로 눈눈 마을은 길조차 표시되지 않은 곳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대략적 위치와 길을 그려 넣고 헷갈릴 수 있는 곳에는 첨언까지 적어 넣었다.
말없이 어깨를 잡은 채 지켜보고 있는 리샤르를 향해 나단은 지도를 내보였다.
“이곳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꽁꽁 얼어 있으니 얼음길을 갈 채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지도에 없는 마을이란 말인가.”
“그러니 양측 가문이 두 달 넘게 찾지 못하신 거 아닙니까. 빨리 앤을 만나러 가 주세요.”
나단의 눈에 깃든 미미한 호의라든가 앤시아를 언급할 때 보이는 다정함 속에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의 반응은 아내의 무사함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소백작. 그대를 구금하겠소.”
“예?”
지도를 받아 든 리샤르는 나단의 어깨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뒤따라왔던 기사들이 창문과 문 앞을 가로막자 밖에서 기다리던 백작 부부가 당황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구금이라니, 갑자기 무슨 행패인가요!”
리샤르는 서늘한 눈으로 지도를 품에 넣고 돌아섰다.
“아내의 무사함을 확인할 때까지 이자, 아니 소백작의 이동을 엄격히 제한할 필요가 있소. 단, 감옥이 아닌 이 방에서 머물도록 배려하지.”
“의심하는 건 이해하지만 나는 분명 편지를 여러 통 보냈습니다. 고립된 마을을 어떻게든 빠져나와 소식을 전한 저에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물론 나단 역시 편지들의 행방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내내 함께했던 장정들이 편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걸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리샤르는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지도를 건네준 나단에게 최소한의 인내심을 보였다.
“소백작. 그대에겐 공작 부인 납치 사주, 호위 기사 살해 혐의가 있소. 다른 증거가 더 나오지 않는 이상은 당분간 가택 연금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요.”
“예?”
순식간에 멀어지는 공작과 문을 막아서는 흑의 기사단을 보며 나 단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기사단 탓에 문이 열려 있음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발을 동동구르는 백작 부부에게 나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정말 아무 편지도, 전 서구도 도착하지 않았나요?”
힐다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상정했던 최악의 일들이 모두 아님이 드러난 마당에 감출이유가 없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실은 메리가 네게서 온 편지를 들키지 않으려 급히 태웠다고 하는구나.”
“그게 무슨……. 정말이냐, 메리?”
문밖으로 보이는 사용인 중 앤시아의 전담 하녀였던 메리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울먹이기까지 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했어요.”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르는 나단이 화를 내려 하자 힐다가 나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너희는 사라졌지, 공작가 기사단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어. 갑자기 쳐들어온 기사단에 메리는 널 감쌀 생각뿐이었던 게다.”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들키는 것보다 감추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혹여나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두 사람이 도망쳤다는 내용이라면 공작가에 알려져서는 안 될 증거가 될 테니.
나단은 메리의 행동 자체는 이해했으나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 설마 제가 앤시아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쳤을까 봐 그러셨나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앤이 불행하다 면 목숨을 걸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사용 인이라 한들 몰랐을까.”
앤시아는 행복했다. 그렇기에 나단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작가 사람들은 북부에서 너무도 달라진 앤시아를 모르기에 생긴 오해였다.
하필 편지가 태워지다니 어이가 없고, 그 후 보낸 전서구의 행방마저 묘연해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양측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리샤르의 반응을 보면 아무 소식도 받지 못한 듯 보였다.
게다가 리샤르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 보면 누군가 거짓 증언을 한 것 같았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공작의 반응을 보니 북부에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것 같네요. ……속은 건지 아니면 중간에 가로채인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돌아왔으니 됐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이제 쉬도록 해. 앤시아는 공작이 구해 낼테니 걱정하지 말고.”
한숨을 깊게 내쉬는 나단을 향해 힐다가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나단은 당장 방을 꽉 채운 공작가의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언니, 나도 언니처럼 금발 머리가 되고 싶어요.”
“누나. 토미 형이 누나한테 이거 가져다주래요.”
“꼬맹이들~ 우리 언니 좀 쉬게 다들 집에 좀 가라.”
한참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팔짱을 끼며 나서는 비앙카의 행동에 아이들은 물러서기는커녕 앤시아의 치마를 붙잡고 뒤로 숨었다.
앤시아는 그런 아이들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녀 비앙카.”
“심술쟁이.”
둘 다 미인이었으나 상냥한 앤시아와 과격한 비앙카는 아이들 눈에 공주님과 마녀 수준으로 다르게 보였다. 아이들의 투덜거림에도 비앙카는 턱을 치켜들며 씩웃을 뿐이었다.
“너희들, 해라 아줌마가 파이를 구우셨다는데 빨리 안 가면 다 사라질걸?”
“파이!”
“내 거야!”
앤시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비앙카의 가벼운 협박에 우르르 몰려 나갔다.
아이들이 나가자 앤시아는 조금 지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 앞이라고 무리했음을 알아챈 비앙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섰다.
“마님, 아이들이 온다고 무조건 받아 주실 필요는 없어요.”
“아냐. 나도 심심했는걸. 뜨개질은 손이 하면 되는 거라 애들끼리 노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워.”
날이 맑아진 후 동네를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앤시아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기웃거리다가 상냥함에 반해 매일 찾아들었다.
“마님이 무리하시는 거 같아서 걱정돼요.”
“무리하기는. 나야말로 누구보다 편안한걸.”
나단이 마을을 떠난 후 앤시아는 몰라보게 밝아졌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했고 아이들이 찾아오면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저녁이 오면 쓰러져 잠들 만큼 피로해 하면서도 앤시아는 시종일관 밝게 굴었다.
자신이 조금씩 내비치던 우울함에 나단이 떠밀려 험한 길을 떠난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비앙카가 아무리 그런게 아니라고 말해 주었어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비앙카마저 무리하게 만들까 봐 앤시아는 일부러 밝게 행동했다.
그런 앤시아가 비앙카는 안쓰러웠지만, 이제 정말로 멀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함께 힘내려 애썼다.
“아. 털실이 부족하네.”
“제가 받아 올게요. 무슨 색이에요?”
“아니, 내가 갔다 올게.”
“같이 가요.”
“실 하나 받으러 가는 건데 둘이나 움직일 필요 없어. 비앙카는 좀 쉬고 있어. 아침에도 해라 아주머니네 일을 돕고 왔잖아.”
비앙카는 앤시아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 털실만 받아서 바로 오셔야 해요?”
“응. 다른 데 갈 데도 없잖아.”
“정말로요. 오늘 마을이 유난히 소란스럽거든요.”
“알았어. 다녀올게.”
여느 때처럼 유난스럽게 자신을 걱정하는 비앙카에게 앤시아는 웃음으로 답했다. 고작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비앙카는 몇 걸음을 쫓아와 자신의 로브까지 벗어 걸쳐 주었다.
비앙카의 걱정에 앤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와 함께 걸었다.
바깥에 함께 나올 때면 비앙카는 의미 없는 수다를 이어 가며 연신 앤시아를 언니라 부르고는 했다. 그녀의 이런 천진한 욕심이 귀여워 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쿵-쿵-
“아, 또 들리네요. 이 소리. 언니도 들으셨죠?”
“응. 무슨 소릴까?”
“안 그래도 남자들 몇몇이 소리 나는 쪽으로 가 본 것 같아요.
별일 아닐 테니 걱정 마세요, 언니.”
마을이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운걸 앤시아도 느낄 수 있었다. 멀리 새가 날아오르기도 하고 묘한 울림 같은 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비앙카가 꼬박꼬박 언니라 부르며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겠지.’
불안하면서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 괜스레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