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9화.
해라의 집에 도착하자 조금 전 앤시아의 집에서 뛰어나간 아이들이 보였다. 파이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배가 불러 여기저기 늘어진 덕에 앤시아를 보고도 달려오지 않았다.
해라는 앤시아의 방문을 반가워 하면서도 걱정했다.
“앤, 길도 미끄러운데 필요한 게 있으면 비앙카한테 시키지.”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혹시 노란색 털실 구할 수 있을까요?”
“털실이야 많지. 아, 이왕 온 김에 이것도 받아 갈래?”
해라는 종종 특이한 식자재를 앤시아에게 권하고는 했다.
해라가 커다란 주머니를 가볍게 내려놓자 앤시아와 비앙카가 함께 다가왔다. 주머니를 펼치자 안에 가득 든 까만 부스러기에 비앙카는 뒷걸음질 치고 앤시아는 반가워하며 들여다보았다.
“어머, 이거 미역이잖아요?”
“아는 거야? 진짜 앤은 귀족처럼 생겨서 별거 다 먹어 봤네.”
북부에서 좀처럼 먹지 않는 건조식품을 눈눈 마을에서는 어떻게든 소비했다. 외지인이나 상인 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숙박비대신 놓고 가는 때도 있어 다양한 식자재가 유입되었는데, 이번 것은 영 아무도 먹으려 들지 않아 내놓은 것이다.
“한꺼번에 물건을 받아 놨더니 이런 게 구석에서 나왔지 뭐야.
물에 불리면 막 커지고 미끈거려서 징그럽더라고. 아무리 나라도 이건 영 손이 안 가서 말이지.
한번 가져가 볼래?”
“감사해요. 저한테 딱 필요한 거예요.”
“어? 진짜? 잘됐다, 다 가져가.”
다른 북부인들은 매운 것도 잘못 먹고 해산물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과 달리 앤시아는 식자재 대부분에 호응이 좋았다.
해라는 드디어 떠넘길 사람을 만났다는 듯 신이 나서 커다란 주머니를 넘겼다.
“아니, 그 큰 걸 우리 언니한테 막 떠넘기면 어떡해요?”
“이거 가벼워.”
앤시아의 손에서 주머니를 넘겨 받은 비앙카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운 주머니를 어깨에 걸치며 조금 놀란 듯했다.
앤시아는 미역의 좋은 점을 알려 주려 했으나 해라는 어서 가지고 가라며 둘을 내보냈다. 혹여나 마음이 바뀌어 두고 가는 게 싫은 것처럼.
정작 앤시아는 여기서 미역을 만났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마치 임신한 앤시아를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식재료였다. 모든 게 앤시아를 위해 굴러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른 때라면 이런 착각을 정정하려 노력했겠지만, 앤시아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른미역을 불리고 참기름과 비슷한 고소한 향이 나는 기름과 마늘을 챙겼다. 비앙카는 점점 부풀어 가는 미역을 보고 놀라 앤시아를 데리고 구석으로 물러나기까지했다.
‘정말 무서워하는구나.’
스튜가 들어 있는 냄비를 비우고 그 안에 기름과 불린 미역, 육포를 넣고 휘젓자 비앙카가 무슨 괴식을 만드는 거냐는 표정으로 불안해했다.
“아, 고소한 냄새.”
기름과 미역, 마늘이 만나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앤시아는 쌀밥생각이 간절해졌다.
공작가에 돌아가면 반드시 쌀밥에 미역국을 먹을 테다.
앤시아는 입덧 없는 몸 상태에 감사하며 물을 부었다.
비앙카는 연신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지켜보다 고소한 냄새에 조금씩 다가왔다.
“마님, 맛있는 냄새가 나요.”
“응, 오래 끓이면 부드러워서 더 맛있어.”
두런두런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앤시아는 미역국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
마을 사람들을 겨우내 고립시킨 얼음길이 공작가 기사단과 병사들 손에 사정없이 부서져 내렸다. 이미 리샤르와 일부 기사단은 마을로 향한 후였다.
앤시아를 데리고 나올 때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길을 확보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얼음길을 부수고 있었다. 폭탄을 쓸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으나 양쪽 산맥에 쌓인 눈까지 불러올 수 있어 마차 한 대가 통과할 만큼의 길을 내는 데 집중했다.
그사이 단련된 말과 기사들이 신중히 얼음길을 지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은 종일 들려오던 소리에 이어 나타난 기사들과 흑마를 보고 긴장했다. 험난한 길을 지나올 만큼의 실력을 갖춘 정예 기사단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찾아라.”
“예, 각하!”
리샤르의 한마디에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뒤늦게 달려 나온 눈눈 마을 촌장이 리샤르의 앞에서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무슨 일이기에 산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을 찾으셨습니까?”
혹여나 죄인이라도 숨어든 건 아닌지 두려워하는 기색의 촌장을 내려다보던 리샤르는 말에서 내려섰다.
말을 타지 않았음에도 한참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란 리샤르를 앞에 둔 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나서서 목이 베일 것 같은 긴장감에 다리가 덜덜 떨려 왔다.
“귀족 여인을 찾고 있다. 금발에 이 정도 키인데.”
“아, 압니다. 두 달 전부터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저 없이 돌아온 답에 리샤르는 심장이 조여 듬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아무 말도 없자 촌장이 빠르게 앞장섰다.
“젊은 부부가 아주 싹싹하니 마을 사람들 모두 잘 지냈습니다.
딱히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긴장감에 말을 쥐어짜 내던 촌장은 등 뒤에서 느껴진 서늘함에 점점 말수가 줄었다. 뒤돌아보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감각이 촌장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했다.
결국, 얼마 가지 못해 촌장은 필사적으로 멀리 보이는 집을 가리키며 안내를 마칠 수 있었다.
바람처럼 스쳐 가는 거대한 존재가 멀어지고 나서야 촌장은 제목이 붙어 있음에 안도하며 허둥지둥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촌장이 가리킨 집 앞에 이미 기사 두 명이 도착해 있었다. 리샤르가 눈짓하자 기사 둘은 옆으로 비켜났다. 문 앞에 선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이곳에 오는 내내 머릿속을 뒤덮었던 많은 생각들에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앤시아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갈팡질팡했다.
정말 나단과 함께 도망간 것인가. 아니면 무슨 사건에 휘말린 것인가. 나단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마부의 증언을 믿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촌장이 젊은 부부라고 지칭한 것에 뇌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가. 어째서 젊은 부부에 그대가 포함되어 있는지. 나단과 함께 있는 동안 무슨 일은 없었는지. 여기에 그녀의 의지가 포함된 것인지.
나를 두고 떠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는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간 것도 찰나였다.
“신기한 맛이에요.”
“이건 맛있다고 하는 거야.”
앤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리샤르의 손은 주저 없이 문을 밀었다. 손잡이로 문을 열 생각도 못 하고 단순히 밀어낸 문은 걸쇠가 부서지며 그대로 넘어갔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아무 소리도 못 낸다고 했던가.
작은 식탁에 놓인 두 개의 그릇. 그릇 안에 담긴 시커먼 무언가를 앤시아가 스푼으로 떠먹으려 하고 있었다.
리샤르는 거의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그릇을 쳐 냈다.
그녀가 굶다 못해 먹어서는 안될 걸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순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벽에 부딪혀 바닥을 구르는 그릇소리가 요란스러운 것도 잠시.
“리샤르!”
항상 공작님이라 부르던 앤시아가 리샤르의 이름을 부르며 안겨들었다.
작고 따뜻한 부드러운 몸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자 리샤르의 목을 끌어안은 가느다란 팔이 있는 힘껏 당기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다. 혹여나 다시 만났을 때 차가우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익숙한 앤시아의 존재가 숨이 막힐 듯 닥쳐왔다.
“왜, 왜 이제 왔어요. 왜.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울먹이며 리샤르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 내는 앤시아가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향한 의심, 그리움, 걱정그 어떤 것도 지금은 떠올릴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원망하는 그녀에게 사죄하는 것뿐이었다.
“미안하오.”
“너무 늦었잖아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용서해. 아니, 용서하지 않아도 되니 얼굴을 보여 줘.”
리샤르는 품 안에 꽉 끌어안은 앤시아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억속 그대로의 목소리에도 잠깐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앤시아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꽉 안으셔서 얼굴을 들수가 없는걸요.”
그제야 리샤르는 자신이 앤시아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음을 알아챘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 힘을 풀어내자 앤시아가 고개를 들어 리샤르를 보았다.
눈물이 고이고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음에도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세상에……. 공작님, 얼굴이 이게 뭐예요?”
걱정과 함께 얼굴을 더듬는 앤시아의 손이 조금 거칠어진 것 같아 리샤르는 녹아내린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졌다.
“그대의 손이…… 거칠어졌군.”
“공작님 얼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다크서클 좀 봐. 입술은 다 갈라지고, 밥은 먹은 거예요?”
“그대가 먹는 거에 비하면.”
“저 완전 잘 먹고 잘 지냈거든요?”
방금까지 리샤르를 향해 울먹이던 앤시아는 금세 밝게 말했다.
그러나 리샤르의 시선은 냄비에 한가득 끓고 있는 시커먼 음식에 머물렀다.
저런 걸 먹고 버텼다니. 앤시아를 향한 안타까움과 그녀를 찾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뒤엉켰다.
“이거 봐요. 제 볼 통통해진 거.”
앤시아를 절대 놓을 것 같지 않던 리샤르의 손은 그녀에게 잡혀 순순히 끌려갔다. 앤시아의 뺨에 손이 닿자 리샤르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녀의 피부에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감정이 일렁여 넘칠 것만 같았다.
“앤시아.”
“네, 공작님.”
“앤시아, 앤……. 하아. 그대를 드디어 찾았어.”
인내하던 리샤르의 감정이 결국 넘쳐흘렀다.
당황한 앤시아가 리샤르의 뺨을 더듬으며 우왕좌왕하는데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