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0화.
앤시아를 찾기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리샤르는 자신이 들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앤시아를 챙겼다.
“무사해서 고맙소.”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윽, 흐윽, 으흑…….”
비앙카는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비앙카와 나단 앞에서는 해맑게 웃기만 하던 앤시아가 리샤르를 보자마자 투정을 부리며 매달리는 행동이 그간 얼마나 참아 왔는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한참을 서로만 바라보며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아서가 나타나자 그제야 움직였다.
“각하, 두어 시간 내로 길이 열릴 것 같습니다.”
“아서 경, 오랜만이에요.”
아서와 눈이 마주친 앤시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아는 척을 하자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앤시아가 사라진 몇 달간 리샤르를 보필하며 걱정했던 터라 낡은 드레스를 입고도 빛이 나는 안주인의 무사한 모습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예,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꾸벅 묵례하고 고개를 든 아서는 리샤르가 손끝으로 앤시아의 뺨을 살며시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겨 눈을 맞추는 걸 보고 헛기침을 했다.
곁에서 지켜보기 무서울 정도로 공작 부인을 지독하게 그리워했던 리샤르 였다. 앤시아의 시선이 아서에게 잠시 향한 것조차 용납하기 힘들 만큼 그의 집착이 어마어마하게 커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서는 눈치 없게 구석에서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도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이 못 박혀 있는 비앙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짐작도 되지 않았기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단둘만 남은 후에도 리샤르는 앤시아를 내려놓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내려 달라 했을 앤시아조차 리샤르의 뺨과 머리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애정이 어린 모습에 리샤르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심과 걱정을 모조리 잊었다.
그저 눈앞의 아내가 사랑스럽고 감사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오.”
“공작님도 참, 몇 번째 말씀하시는 거예요?”
“몇 번이라도. 그대가 답을 해주는 게 기뻐.”
“어리광쟁이가 되셨어요.”
“보고 싶었소.”
“저도요.”
“다시는 보지 못할까 두려웠소.
그 어떤 강한 마수를 상대할 때 보다도.”
“걱정이 너무 많으세요. 무사히 마을에 도착해서 집도 구했다고 편지를 보냈는데.”
리샤르는 받지 못한 편지를 말하며 그래도 보고 싶었다 끌어안는 앤시아를 마주 안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리샤르는 앤시아를 믿었다. 그녀의 애정과 다정함 모두를 믿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건 그녀의 주변인이었다. 조금 전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감격한 얼굴을 한 비앙카도 리샤르와 마주치자 반가워하던 나단도 리샤르는 믿지 않았다.
그들이 아내를 속였을 경우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앤시아.”
“자꾸 이름 부르지 마세요. 부끄러워지니까요.”
이름은 침대에서 주로 불렀던지라 대낮에 듣자니 민망해졌다.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앤시아를 보며 리샤르는 웃을 수 있었다.
“말재주가 없는 게 한탄스러워.”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데요?”
“사랑해, 앤시아.”
격식조차 없는 가벼운 고백이었으나 그 어떤 때보다도 묵직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거칠어진 리샤르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앤시아는 웃음 지었다.
“그건 말재주가 없어도 충분해요, 공작님.”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대에게 불리고 싶었소.”
“저도 사랑해요, 리샤르.”
리샤르를 부르며 사랑을 말하는 앤시아의 미소는 햇살이 쏟아지 듯 화사했다.
그녀의 맑은 웃음 하나에 그간의 고통이 모두 씻기는 듯했다.
설령 그녀를 믿지 못하는 날이 온다 해도 리샤르는 결코 이 손을 놓지 못할 것을 다시금 확신했다.
***
급히 수배해 온 마차는 공작가의 것보다 여러모로 불편했다.
게다가 높이 쌓인 눈이 얼음이 된 길을 마차가 지나갈 공간만큼 부식 냈을 뿐,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마차에 탄 앤시아는 필연적으로 멀미했다.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버티던 리샤르는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 걸 왜 몰라 주냐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앤시아의 진심이 담긴 투정에 한 발 물러서 밖으로 나왔다.
말에 올라타 뒤를 따라가 보니 밖에서 보기에도 마차의 흔들림이 심했다.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앤시아를 공작가로 데려가야만 했다.
지금도 앤시아를 품에서 놓자마자 불온하고 음습한 감정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리샤르를 대신해 앤시아를 보살피러 마차에 탄 비앙카의 존재 역시 불쾌했다. 또다시 앤시아의 곁에 비앙카가 남아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하.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서는 리샤르가 마차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마을에서 알아낸 내용을 보고했다.
「-비앙카와 자매이며 나단과부부로 알려짐.
-두세 달 전부터 마을에 머뭄.
-보온 마석을 다수 보유, 판매, 물물 교환함.
- 편지 2회, 전서구 4회 이상 사용.
-고립으로 인해 겨울 동안 집을 대여.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아 보임.」
“그리고…….”
아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미 나단과 앤시아가 부부로 소문나 있는 것에서부터 리샤르의 미간은 깊게 패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차를 바라볼 때면 살기를 가라앉히는 리샤르를 보며 아서는 가장 알리기 두려웠던 내용을 언급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님께서 임신 중이십니다.”
뜬소문이라 해도 아서조차 충격받을 만한 내용이었다. 앤시아의 몸 상태에 대해 공작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측근인 아서 역시 앤시아가 임신하기 힘든 몸임을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연약함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샤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차분히 열린 리샤르의 입에선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 부인의 명예에 흠집이 날만한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마을을 없앤다면 화를 낼까?”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하기 전 가늠해 보는 것뿐임을 아서는 알고 있었다. 그의 결정에 조금이라도 자비가 섞이길 바라며 아서는 조사한 내용을 최대한 덧붙였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님께서 마을 사람들, 특히 아이와 부인들과 무척 살갑게 지냈다고 합니다. 마님이 워낙 몸이 약해 주변에서도 많이 배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죽을 먹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아내를 배려했다 할 수 있겠는가?”
리샤르의 이어질 명령이 유독두렵게 느껴져 아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겨우내 추웠을 테니 불을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각하, 아직 증언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이 납치이고 누군가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면 작은 증거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마님을 되찾았으니 즉결 처분보다는 신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서의 충언에 리샤르의 서늘하던 시선에 미약한 온화함이 어렸다. 앤시아를 되찾았음을 상기했기 때문이리라.
“맡겨도 되겠나?”
“예, 각하.”
얼음길을 빠져나가는 마차를 보며 리샤르는 곁으로 말을 몰았다. 여전히 후방을 지키던 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한발 빨리 저택에 이 소식을 알린 덕분에 모든 사용인이 일을 멈추고 공작 부부를 기다렸다.
멀리서 공작가의 깃발이 보이고 마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평소 침묵으로 맞이하던 사용인들에게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간 사용인 대부분은 점점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기에 앤시아의 귀환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차 뒤를 지키듯 쫓는 흑마와 리샤르의 모습에 모두 기대감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정확한 위치에 멈추고 기다렸던 집사장이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리샤르 역시 말에서 내려 마차 옆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아…….”
“오오…….”
마차에서 내민 발끝만으로도 모두 소리를 참지 못했다.
리샤르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마차에서 내린 앤시아는 허름한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평소 고개를 숙인 채 주인을 맞이하던 사용인들이 저마다 참지 못하고 앤시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그리움과 걱정을 비롯해 여러가지 감정들을 마주하자 앤시아의 마음도 흐트러졌다.
익숙한 얼굴 중 엘리와 줄리도 있었다. 그중 엘리는 거의 통곡을 하고 있었기에 앤시아는 모두를 향해 최대한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잘 지냈어?”
“마, 마님.”
“주인마님…….”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공작 부인의 귀환에 사용인 중 몇몇은 울음까지 터트렸다.
앤시아가 그들 사이로 한 걸음 내딛기도 전에 리샤르의 품에 안기듯 들어 올려졌다.
“모든 일정은 차후 알려 줄 테니 평소처럼 지내도록.”
“예, 주인님.”
울먹이면서도 재깍 허리를 숙이고 동시에 답을 한 사용인들은 리샤르가 앤시아를 안고 사라지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부부 침실에 들어선 리샤르는 하녀들을 물리고 직접 앤시아를 안은 채 욕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 욕조에 앤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와, 오랜만에 몸을 푹 담글 수 있겠어요.”
기뻐하며 따뜻한 물에 손을 담가 본 앤시아는 못 참겠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리샤르를 돌아보았다.
“공작님, 하녀들을 불러 주시겠어요?”
“내가 도와주지.”
“아, 아뇨. 몸을 씻으려는 거라 서요.”
“그걸 돕겠다는 거요.”
“예?”
부부끼리 알몸을 보이는 게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몸을 씻는 일은 또 달랐다. 게다가 앤시아는 마차에서 멀미를 하느라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앤시아가 망설이는 사이 리샤르의 손이 낡은 드레스에 닿았다.
“앗, 자, 잠시만.”
앤시아가 허둥지둥 리샤르를 밀어낼 틈도 없이 드레스의 단추가 풀어졌다. 리샤르의 손이 닿을 때마다 드레스며 속옷이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손재주가 마술사 수준으로 빠르고 정교했다.
그렇다 해도 이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앤시아가 옆에 놓인 수건으로 황급히 몸을 가리자 리샤르의 손이 수건 아래로 들어왔다.
아무리 오랜만이고 반가웠어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손을 대는 이가 아니었기에 앤시아의 눈빛이 당황한 듯 흔들렸다.
“공작님?”
“배가 부풀었군.”
복부를 뭉근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앤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었기에 앤시아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보다 빨리 리샤르에게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게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