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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20화 (120/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1화.

“숨기다니요?”

누구보다도 리샤르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앤시아였다.

리샤르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놀라움과 기쁨, 서러움이 앞서 말하지 못했으나 공작가로 돌아 오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임신한 몸으로 마차를 타니 상상도 못 할 만큼 심한 구토감이 몰려왔다.

멀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으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앤시아의 의지는 강했다. 먹은 것도 없이 몇 번이고 속을 게워내다 거의 기절하다시피 마차에 실려 왔던 앤시아였다.

이제 단둘이 되었으니 기쁜 소식을 전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리샤르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임신 소식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기에 지나가듯 툭 털어놓고 싶지 않아 시간이 걸린 건 사실이었지만, 이런 날 선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는 리샤르의 태도가 황당했다.

서운함과 억울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마차에서 토하느라 대화할 틈도 없었는데 제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이쪽은 순식간에 홀딱 벗겨져서 민망한데도 남편이라 화조차 내지 않았는데, 심문하는 듯한 저 말투는 뭐란 말인가.

“그대가 숨기려는 게 아니라면…….”

“아뇨, 공작님. 뭘 물어보셨어야 숨기죠. 오는 내내 대화라곤 ‘식사하겠소?’ ‘아뇨, 토할 거 같아요. 이것 뿐이었는데.”

말하고 나니 더욱 억울했다.

휴식 시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려 리샤르의 얼굴이라도 볼라치면 주변을 경계하느라 자리를 뜨는 통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웠던 남편의 얼굴은 돌아오는 내내 마차 창문 너머로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요, 저 임신했어요.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축하해 주실 줄 알았는데 추궁하듯 험악한 분위기는 대체 뭔가요?”

화를 내던 앤시아는 문득 그의 이런 태도가 마을에서 들은 소문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안 그래도 나단을 경계하던 리샤르였다.

그가 불안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그 불안이라는 게 설마 지금 임신과 관련된 것인가 황망해졌다.

“아. 설마.”

설마 정말로 그걸 의심하는 거라면,

“제가, 오라버니와 뭔가 있다고…….”

리샤르의 침묵은 긍정을 뜻했다.

이에 앤시아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겨우내 몸이 약한 앤시아를 위해 잠을 줄여 가며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두 사람이었다.

귀족인 나단마저 비앙카가 하는 모든 일을 함께했다.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 나단을 리샤르가 저런 식으로 오해하는 게 너무도 화가 났다.

“오라버니와 비앙카는 저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어요. 전 그들에게 짐이었는데, 단 한 번도 눈치 주지 않고 절 지키려 애썼어요. 지금 그런 사람들을 의심하는 거예요?”

만에 하나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단 하나만은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 매일 눈물흘리면서도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믿음 하나로 웃을 수 있었어요. 그런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의심하지 않아.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대를 의심하지 않소.

“그럼 나단 오라버니는 의심한다는 거잖아요. 저와 부정을 저질렀다고.”

리샤르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앤시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다른 건 오해하거나 착각할 수 있었다. 일부러 마을에 그렇게 소문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리샤르와 앤시아는 깊은 교감을 해 왔다. 부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충족감과 신뢰가 있었기에 앤시아는 그와 떨어져 있는 동안 리샤르를 그리워했다.

어떤 이유가 있던 이건 의심해선 안 되는 거였다.

“제 배 속의 아이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너무도 충격받은 앤시아의 얼굴에 리샤르는 그간 모아 온 증언과 증거를 모두 폐기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무사한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더 철저히 파헤쳐야 했다.

눈앞의 앤시아만 보기에는 그녀의 부재가 가져온 지옥 같은 시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앤시아의 임신 소식은 리샤르에게 크나큰 혼란이었다.

앤시아가 실종된 지 4개월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작게 부푼 배는 기껏해야 임신 3~4개 월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리샤르의 아이라고 여기기엔 수개월 관계했음에도 임신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었다. 하필 나단과 함께한 시점에 임신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마부의 증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차라리 증언을 듣지 않았다면 나았을까.

그러면서도 리샤르는 앤시아를 믿었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뻗어 오는 앤시아를.

그것만이라도 말해 두고 싶어 리샤르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그래서 계속 그대라고 부르신 거였나요? 제가 공작 부인으로 부적절해서?”

리샤르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부분을 앤시아가 지적했다.

리샤르는 나단을 만난 이후로 주변에는 앤시아를 부인이나 아내라고 언급했으나, 앤시아 앞에서는 그리 부르지 않았다.

친근감을 담아 이름을 부르거나 그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내가 그랬나?”

당황한 리샤르의 눈이 흔들렸다.

리샤르는 자신이 앤시아를 믿는다 하면서도 은연중에 믿지 못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무의식이었단 말이지.”

이름을 불러 주기에 친근하다고만 느꼈다.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은 앤시아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절 믿지 않는군요.”

“아니, 그대를, 부인은 믿고 있소.”

리샤르가 호칭을 정정하는 걸보는 게 더 상처였다.

욕실의 온기에도 드러난 피부가 점점 식어 몸이 떨려 왔다. 앤시아가 입을 다문 채 몸을 떨자 리샤르 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앤시아는 그런 리샤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나단과 비앙카의 보호 아래 잘먹고 잘 지낸 앤시아와 달리 푹꺼진 리샤르의 뺨과 시커멓게 어두워진 눈 밑이 안쓰러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오로지 앤시아만 바라보는 리샤르의 간절함에 지난 몇 달간 그가 겪었을 괴로움을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샤르의 오해는 무척 화가 났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내 앤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검사를 받을 테니 의사를 불러 주세요.”

임신 5개월임을 확답받으면 그의 오해도 풀리리라. 그때 오늘의 섭섭함을 아주 배로 쳐서 받아야지.

“그리고 전담 하녀를 불러 주세요.”

“앤시아.”

“부르지 마세요.”

좋게 리샤르를 내보내려던 앤시아는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울컥화가 치밀었다. 아직은 앤시아도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기엔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머리로는 리샤르를 이해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제 이름을 듣는 게 괴롭네요, 공작님.”

퉁명스럽게 나가는 목소리를 다 잡기가 힘들었다.

“나가 주시겠어요? 저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수건을 꽉 쥐고 있던 앤시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지금은 힘들었다.

여전히 멀뚱히 서 있는 리샤르를 향해 투정 섞인 원망이 튀어 나왔다.

“아니면 제 몸을 더 확인하셔야 하나요?”

“……하녀를 불러 주지.”

뒤돌아서는 리샤르의 커다란 등이 오늘따라 작게 보여 속이 상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리샤르를 무조건 받아 줄수만도 없었다. 이 일은 나단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었기에 더 더욱 확실히 해야 했다.

홀로 남은 앤시아는 으슬으슬떨리는 팔을 문지르며 욕조로 향했다.

“하아…… 피로가 싹 풀리는 거 같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물에 몸을 담그니 절로 신음이 나올 만큼 좋았다.

“마님!”

“아, 엘리. 잘 지내…… 지는 못했나 보구나.”

눈물 자국이 그득한 얼굴로 달려 들어온 엘리는 욕조 옆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마님, 마님께서 잘못되신 줄 알고…… 흐윽, 흑…….”

“나도 엘리가 탄 마차는 어떻게 됐나 걱정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녀의 마음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져 앤시아는 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엘리는 그런 앤시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우리 마님 손이 이렇게 거칠어 지셔서 어떡해요. 제가 잘 관리해서 다시 보들보들하게 만들어드릴 거예요.”

“고마워, 엘리. 그런데 비앙카는 어딨어? 아, 쉬고 있으려나?”

전담 하녀의 부재를 묻는 말이었는데 갑자기 엘리는 입을 꾹다물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자 눈치를 보던 엘리에게서 작은 목소리로 답이 흘러나왔다.

“저기……. 비앙카는 지금 조사를 받는 중이에요.”

“비앙카가? 아니, 왜?”

다시 엘리의 입이 꾹 다물리자 앤시아는 욕조의 물이 넘칠 만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 마님.”

“내가 가 봐야겠어. 비앙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조사를 받아?”

“잠시만요, 마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엘리는 필사적으로 앤시아에게 수건을 둘러 주며 다시 앉히려 했다. 자신을 막는 엘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앤시아는 고집스럽게 버텨 냈다. 그러자 엘리가 문 쪽을 힐끗거리더니 갑자기 앤시아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마님께서 아셔야 하는 이야기가 많아요. 차분히 몸을 씻으시는 동안 다 알려 드릴게요.”

앤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엘리는 더욱 작게 속삭였다.

“문밖에 호위가 있어서요. 저도 감시당하는 중이에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앤시아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엘리가 자신의 편에 서 있음을 확신하고 다시 얌전히 욕조에 앉았다.

“물이 식었네요. 따뜻한 물을 섞을게요.”

온열 마석으로 상시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도를 틀자 욕실이 물소리로 가득 찼다.

엘리는 다시 앤시아의 머리맡으로 와 머리를 만져 주며 조곤조곤 그간의 일을 전해 왔다.

납치된 후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함께 납치된 호위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앤시아와 나단을 태운 마부가 어떤 증언을 했으며 그에 리샤르가 백작가로 향한 이야기를.

최근 누락된 전서구가 발견되었으나 그것조차 만일을 대비한 수작일지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까지 엘리는 그간 있었던 일을 앤시아에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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