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2화.
“많은 일이 있었구나.”
엘리의 이야기를 죽 들은 앤시아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호위의 사망 소식에 앤시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나단이 벌인 일이라 증언한 자가 있다니.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대체 마부는 무슨 수작을 부린 걸까. 사례금에 눈이 멀어 지독한 거짓말을 지껄인 걸까?
납치 혐의가 씌워진 나단은 아무 일 없는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앤시아가 고민에 빠진 사이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엘리가 급히 일어났다. 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보더니 손에 과일 주스를 들고 왔다.
“마님, 목욕이 길어지시니 마실걸 가져왔나 봅니다.”
“아, 고마워.”
앤시아가 손을 내밀자 엘리는 스푼을 집어 들었다. 스푼으로 주스를 떠먹는 엘리의 행동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건네주었다.
“모든 음식은 두 사람 이상 기미를 하라는 주인님의 명이 있으셔서요.”
황족 대우야, 뭐야.
리샤르가 얼마나 앤시아의 안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몇 달간 실종되었다 돌아온 앤시아를 대하는 데 온갖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샤르의 오해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나 오해는 오해였다.
누구를 더 믿느냐를 따지기 전, 왜 마부가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밝혀야 하지 않나.
앤시아는 비앙카와의 대화를 통해 마부가 건넨 약초 차에 수면 초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부분을 언급하면 나단을 향한 오해가 풀리지 않을까.
“공작님을 만나야겠어.”
“네, 마님의 목욕이 끝나시면 침실로 모시라고 하셨으니 바로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다행히 리샤르를 금방 볼 수 있는 듯했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엘리의 말대로 호위가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서 있었다.
본격적으로 단장하는 동안 요리 장 하몬이 방을 찾아왔다. 하몬은 눈가가 부어 있었으나 의연하게 앤시아의 방으로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마차에서 멀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빈속에 부드럽게 드실 수 있도록 야채수프와 상큼한 레몬차를 준비했습니다.”
“고마워. 안 그래도 상큼한 게 먹고 싶었는데.”
앤시아가 찻잔으로 손을 뻗자 하몬이 먼저 스푼으로 한 입 맛보고 엘리에게 넘겼다. 엘리까지 새 스푼으로 맛을 본 후에야 앤시아에게 넘겨졌다.
정말로 두 사람이 기미를 보는구나.
어차피 만든 사람은 요리장일텐데 그가 직접 맛봐야 할 음식에 무슨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공작가 안에 있는 사람조차 믿지 못하는 리샤르를 어디서부터 설득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응, 고마워.”
지적하기에는 따져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소소한 건 일단 넣어 두고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은은한 향이며 세련된 맛이 반가웠다. 비앙카는 요리는 잘했지만, 차를 끓이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게다가 뜨거운 물을 그냥 마시지 않기 위해 적당히 넣는 찻잎에 맛을 따질 수도 없었다.
“하아…… 집에 돌아왔구나.”
찻잔을 손에 든 앤시아의 온화한 한숨에 하몬은 벅찬 감동을 느낀 듯 숨을 들이켰다.
엘리는 이런 주인마님을 잠시나마 오해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게 못내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느새 앤시아 쪽을 향하고 있던 호위의 시선도 부드럽게 풀렸다 이내 단단해졌다.
수프는 물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도 하나둘 올려졌다. 그때마다 기미를 보는 게 번거로워 앤시아는 차라리 다 같이 먹자며 호위까지 끌어들였다. 처음엔 단호하게 거절하던 호위조차 엘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두 명은 맛봐야 한다며 앤시아가 권하는 쿠키를 거절할 수 없었다.
“요리장 솜씨가 더 좋아졌나 봐. 아주 부드러워.”
“푸딩이 부드러운 건 당연한 겁니다. 그간 마님께서 대체 어떤걸 드시며 버티셨길래…
흡!”
열심히 차곡차곡 음식을 나르던 하몬은 평소 입이 짧던 앤시아가 모든 걸 맛있게 먹는 모습에 마음 아파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찬 앤시아가 포크를 내려놓은 후에도 하몬은 다른 간식을 가져오겠다며 부산스러웠다. 그러나 갑작스레 많은 요리를 먹었다간 다시 속이 불편해질 수 있었다. 요리장을 물린 앤시아는 두둑이 찬 배를 문지르며 안도했다. 마차를 타는 것만 아니면 몸은 평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며칠을 먹기만 하면 토해 내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배가 든든 해지니 의욕이 샘솟았다.
단단히 오해한 리샤르에게 비앙카나 나단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집무실에 모인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그들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황실에서 보내온 전령이 두고 간 경고 장과 같은 편지들이었다.
북부의 기사단을 이끌고 백작가로 향한 것은 황궁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 것과 진배없다면서도, 아내가 도망친 상황에 이성이 흐려진 공작을 동정한다는 글귀는 당장에라도 편지를 불쏘시개로 써 버리고 싶을 만큼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기사단이 동부에 머무른 것을 허용했던 황가의 배려를 잊지 말라는 글귀에 기사부단장 아서가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디까지 제멋대로 빚을 지우는 건가 싶습니다.”
“그러나 황실에서 공작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서도 동부로 쳐들어간 건 사실이잖습니까?”
능력도 없고 눈치도 없는 보좌관의 지적에 맞은편에 서 있던 아서는 저거 언젠가 갈아 치워야지 않나 눈으로 욕을 했다.
혹여나 이 일을 빌미로 과한 걸 요구할지도 모르니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과 황가에 사죄를 드리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리샤르의 눈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에겐 이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앤시아의 생사조차 알 수 없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나은 상황이었다.
앤시아. 그녀는 고작 몇 달 만에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여인이 되었다.
리샤르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억울한 눈빛을 보였을 때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대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대의 말을 믿지만, 그대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진 일은 다를 수 있음을 알아달라고.
“각하, 황태자 전하께서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답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리샤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공작 부인을 찾는다는 이유로 많은 일이 미뤄진 상황이었다. 하나라도 일을 줄여 둬야 했다.
아내를 떠올리니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비앙카에 대한 심문은 끝났나?”
“예. 저희가 마을에서 알아낸 정보와 일치했습니다. 신상 역시 재차 확인했으나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앤시아와 재회했을 때 비앙카가 보인 반응은 감동과 안도였다.
그렇다 해도 사라진 앤시아와 함께했던 이를 마냥 믿을 수만은 없었다. 돌아오는 동안은 앤시아가 비앙카를 의지하기에 내버려 두었으나 저택에 도착한 후에는 달랐다.
철저하게 비앙카를 조사하고 심문했으나 그녀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했다. 전서구와 편지를 몇 번이나 보냈는데 이제야 나타났냐며 원망까지 해 왔다.
열악한 환경 속에 앤시아를 모셔야 했다며 억울해했다. 고문관앞에서 겁도 먹지 않고 오히려 저택에 돌아온 앤시아가 안정을 되찾았는지 걱정했다.
비앙카가 남성이었다면 나단이 아닌 그녀를 의심할 만큼 앤시아를 챙기고 걱정하는 모습에 의심은 한풀 꺾였다. 애초에 비앙카가 이번 사건을 꾸몄다는 증거나 증언은 없었다.
“레슬리 백작가에 연락해 나단 레슬리의 구금을 해제하도록.”
여기서 조사를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한발 양보하는 것 정도는 해 둘 수 있었다.
마부의 증언 외엔 증거가 없었고, 그 증언을 한 마부는 어느 순간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증언일 수 있었다. 게다가 앤시아가 무사할 수 있도록 지킨 것 또한 그들이었으므로 리샤르는 아내가 신경 쓸만한 일을 먼저 정리하고자 했다.
향긋한 허브티에 고약한 약초냄새가 섞인 오묘한 향. 공작가 저택에서의 아침은 항상 이 오묘한 향과 함께 시작됐다.
폭신한 침구와 따사로운 햇살.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단지 약초 물을 내미는 이가 비앙카가 아닌 처음 보는 사용인이었다는 게 의문이었지만.
“누구?”
“처음 인사드립니다, 공작 부인.
저는 그윈티드 공작가의 기사인 로프 남작의 아내, 안나 로프입니다.”
엽게 웃는 안나의 외모는 앤시아에게 익숙했다. 까만 머리카락과 갈색 눈에 동양적인 이목구비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을 불러올 만큼 친숙했다.
“안나 로프? 로프면가일경?”
“예,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가일이라면 납치 사건 때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앤시아의 호위였다. 앤시아와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호위는 살해당했기에 한 끗 차이로 생사를 달리했다.
앤시아는 안 그래도 무거웠던 마음이 더욱 묵직해졌다.
“안나, 이번 일로 걱정이 많았죠? 가일 경은 잘 지내나요?”
“친숙하게 불러 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근신 중이었으나 다시 복귀하였습니다.”
앤시아의 일로 여럿이 피해를 봤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이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미안해요. 가일 경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호위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남편의 잘못입니다. 저야말로 이 자리를 빌려 감히 공작 부인께 용서를 빕니다.”
검소해 보이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오는 안나의 행동에 앤시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혹시 절 도우러 오신 건가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앞으로 전담 시녀로서 공작 부인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