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3화.
전담 시녀. 처음에는 로사의 방해로 얻지 못했으나 이후에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고 전담 하녀로 충분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전담 시녀의 존재에 앤시아는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모든 일에 예민하게 굴기 시작한 리샤르가 새로운 인물을 앤시아의 곁에 들인 게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귀족인 시녀의 등장에 먼발치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엘리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안나는 앤시아의 불편해하는 기색에 즉각 반응하며 고개를 깊이 숙여 왔다.
“남작이라고는 하나 이름뿐인 귀족을 전담 시녀로 두시기엔 부족하시겠지요. 불쾌하시다면 집 사장님께 말씀드려 전담 시녀 자리는 고사하겠습니다.”
“아, 아니. 불쾌하다니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저…… 안나도 알다시피 난 납치됐다가 몇 달 만에 돌아왔어요. 그런 시기에 새로운 사람을 곁에 들이는 걸 공작님이 허락했다는 게 의아해서요.”
“이해했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남편이 기사단에 복귀한 이상 아내인 제가 공작 부인을 모시는데 더욱 성심성의를 다할 것을 알아봐 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안나는 시종일관 정중했고 앤시아는 그녀를 밀어내기 힘들 것 같았다.
“갑작스러워서 조금 혼란스러워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엘리에게 시중을 받아도 될까요?”
“제게 미안하실 일은 없습니다.
명하시면 문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첫날이니 오늘은 편히 앉아 지켜보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앉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안나는 가일과 비슷하게 제 할 일에 충실하고 고지식해 보였다.
앉아 있으라고 해도 벽에 붙어 서 있는 안나에게 앤시아는 가벼운 불편함을 느꼈다.
“마님, 차 드세요.”
엘리가 다가와 차를 한 스푼 떠마시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응, 그거 내가 맨날 먹는 거잖아.
앞으로 혼자 쓴맛을 견디는 게 아니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약초 물과 입가심용 차를 마시고 달달한 간식을 입에 넣은 후에야 머리가 좀 돌아갔다. 이 약초 물은 항상 비앙카가 준비하던 것이었기에 앤시아는 당연한 질문을 떠올렸다.
“엘리, 비앙카는 풀려났니?”
“네, 마님. 새벽에 풀려나서 약초 물을 달여 놓고 그대로 잠들었어요. 깨울까요?”
“아냐. 힘들었을 텐데 푹 쉬게 놔둬.”
혹여나 비앙카에게 험한 일이 생길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지난밤 앤시아는 부부 침실에서 밤새 리샤르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 졸음을 버티기 힘들 때가 돼서야 사용인이 리샤르의 전언을 가지고 찾아왔다. 처리할 일이 밀려 내일 점심 식사 때 보자는 짧은 내용이었다. 아침도 아니고 점심이라는 말에 앤시아는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늦게 잠든 탓에 늦잠을 잤지만, 점심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돌아왔으니 집 안을 좀 살펴봐야겠어.”
앤시아의 말에 엘리는 곧바로 가벼운 외출 차림을 도왔다. 안나가 벽에서 눈으로만 쫓는 걸 본 앤시아는 한쪽 옷장을 가리키며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저택 안에서 걸칠 만한 가벼운 숄을 골라 줄래요?”
“예. 공작 부인께 어울릴 만한 숄을 성심껏 찾아보겠습니다.”
가벼운 대답이었으나 안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한 듯했다.
안나를 곁에 두는 게 리샤르를 안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었다.
진지한 모습이 줄리와 닮아 있기도 해서 처음의 불편함 대신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호위와 하녀, 시녀를 이끌고 저택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앤시아와 마주친 사용인들은 저마다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침착하려 애쓰면서도 앤시아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거나 고개를 푹 숙여 왔다.
사용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며 걸음을 옮기던 앤시아는 자신을 찾느라 고생했을 기사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앤시아의 걸음이 기사단 쪽으로 향하자 뒤를 묵묵히 따르던 호위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기사단을 방문하실 예정이라면 일정을 따로 잡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호위의 조언에 앤시아는 기사단의 특수성 때문인가 싶어 수긍하려는데 정작 안나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공작가 안에서 공작 부인께서 걸음 하시는데 일정을 따로 잡는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금 한창 훈련 중이라 혹여나 마님께서 보시기 불편하실 수 있을 듯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보기 불편한 건 마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정확한 설명도 없이 일정을 따로 잡으라 하니 공작 부인의 권위를 낮잡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실언했습니다. 훈련 중 간혹 과격해질 때도 있어 마님께서다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드린 조언이었습니다.”
“잠깐, 잠깐. 나는 아무 말도 안했는데 두 사람이 대화를 진행해 버리면 좀 민망하잖아요.”
여기 당사자 있어요.
앤시아의 웃는 얼굴에도 안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대신 앤시아에게 곧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여 보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저는 공작 부인의 시녀이기에 어떤 작은 불충이라도 쉬이 넘길수 없습니다. 특히 공작 부인을 조금이라도 낮잡아 볼 수 있는 경우는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했는데 두 사람이 대화를 진행해 버리면 좀 민망하잖아요.”
여기 당사자 있어요.
앤시아의 웃는 얼굴에도 안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대신 앤시아에게 곧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여 보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저는 공작 부인의 시녀이기에 어떤 작은 불충이라도 쉬이 넘길수 없습니다. 특히 공작 부인을 조금이라도 낮잡아 볼 수 있는 경우는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와 뭐랄까. 쁘띠 로사 같다고나 할까? 혹은 로사가 나에게 호의가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꽉 막힌 고집스러움에 다시금 안나가 어렵게 느껴졌다.
로사 때야 그녀의 악의가 앤시아의 계획 중 일부가 되어 줄 것 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다.
그러나 오로지 앤시아를 위해 딱딱하게 구는 안나의 태도는 태평하게 살아갈 미래에 많은 불편함을 일으킬 듯싶었다.
앞으로 사교계 활동을 할 것도 아닌데 시녀를 꼭 곁에 둬야 할까.
“앤시아!”
고민하던 앤시아는 갑작스럽게 불린 자신의 이름에 놀라 돌아보았다.
리샤르가 새파랗게 질려서는 제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만 하루 만에 보는데 리샤르의 얼굴이 더 안 좋아졌다.
“공작님? 여긴 어떻게…
꺅!”
앤시아가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리샤르의 품에 안겨 들려졌다.
“까, 깜짝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밝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리샤르의 안색이 어찌나 안 좋은지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푸석해 보이는 뺨을 쓰다듬었다.
앤시아의 다정한 손길에 리샤르가 굳어 있던 미간을 스르륵 풀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부인이 방에 없어서.”
리샤르는 호칭에 신경 쓰며 입안에서 말을 한번 굴린 듯 입을 벌린 것보다 늦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마음이 어떠하든 행동만은 그렇지 않으려는 게 섭섭하면서도 기특했다. 뺨을 쓰다듬던 손으로 그늘진 눈가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날카로워 보이던 눈매가 휘어지며 부드러워졌다.
“점심때까지 시간이 있길래 저택을 돌아보고 있었어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기도 하고요.”
“알고 있소.”
“아시면서 왜 이렇게 급히 달려 오셨어요?”
답을 알면서도 리샤르의 얼굴을 매만지며 묻자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일렁일 것처럼 물기가 어렸다. 당황한 앤시아가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서 각자 벽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을 못 참고리샤르의 손이 앤시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앤시아.”
“네, 공작님.”
“공작가는 철옹성처럼 단단하고 안전해야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지 않소.”
공작가 안에서 안전을 걱정하다니 앤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감히 북부의 공작, 그윈티드 저택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황족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황가에서 공작가 내부까지 손을 뻗칠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공작가를 견제해 오면서도 한미한 가문인 앤시아를 아내로 맞이한 후 관심을 끊다시피했다. 그나마도 앤시아와 이혼하고 새로 곁에 둔 여인이 평민인 비앙카임을 알게 된 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잠깐. 이건 원작 이야기잖아.’
원작을 떠올리던 앤시아는 이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앤시아가 공작과 이혼하지 않게 되면서 원작은 이미 틀어졌다.
평민이 아닌, 그래도 귀족인 앤시아가 계속 공작의 곁에 남아 영지를 부흥시킬 만한 소스를 자꾸 뿌려 대니 황가에서 보기에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황태자가 축제를 핑계로 직접 영지를 방문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앤시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족의 견제가 있었다면 리샤르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리샤르는 어느새 걷고 있었다. 워낙 편안하게 안겨 있다 보니 옮겨지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별채로 가는 길이기에 앤시아는 의아해하며 리샤르를 바라보았다.
“별채로 가시는 건가요?”
“그렇소.”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니 따뜻한 장소에서 하는 것도 좋겠어요.”
리샤르의 센스를 칭찬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별채로 향하는 길은 마치 삼엄한 검문이라도 하는 듯 일정 간격을 두고 병사들이 서 있었다.
게다가 별채로 들어가는 입구는 전에는 없던 두꺼운 철문이 생겨 온화한 내부의 풍경과 괴리감이 있었다.
저 못생긴 문짝은 누구 센스냐 묻고 싶었으나 묵직한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서 있는 기사들의 차가운 눈빛을 보니 농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부로 들어서는 길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너른 정원이 보였는데 지금은 안쪽으로 벽 하나를 세운 듯 비좁았다. 안쪽의 문은 두 명의 기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열쇠를 조합한 후에야 열 수 있었다.
‘나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여전히 리샤르에게 안긴 채 새로 생긴 벽과 문을 통과한 후에야 앤시아는 비로소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온실처럼 따뜻했던 별채는 여전히 따스했으나 주변에 세워진 높은 벽은 당황스러웠다. 그 가운데 높이 세워진 건물은 탑처럼 보였다. 탑 아래 유일한 출입구로 보이는 문 앞에 또 기사가 서 있었다. 보통 병사를 세워 두는데 풍기는 중압감에서부터 남다른 기사가 문지기를 자처하고 있으니 앤시아는 당혹스러웠다.
“공작님, 저 건물은 뭐고 기사 분들은 왜 이렇게 많나요?”
짐작 가는 게 있었지만, 앤시아는 지뢰를 밟고 싶지 않아 애써 밝게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