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4화.
리샤르는 대답 대신 앤시아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앤시아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빈 틈을 주지 않는 절묘한 강도였다.
“저기, 저기요? 공작님?”
리샤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마도 답을 하기 곤란해서 일것이다.
별채는 전 공작 부인인 마거릿이 편안히 쉬기 위해 남성의 출입만 금했을 뿐 적당한 개방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과 어디를 보아도 눈이 마주치는 기사와 병사들의 존재로 인해 개방감은커녕 아름다운 감옥처럼 보였다.
보호, 혹은 감시.
앤시아는 이 상황이 짐작 갔지만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다.
“리샤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리샤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다 귓가에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걸음이 느려질 만큼 반응을 보이면서도 리샤르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리샤르, 절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요?”
마치 침대에서 불리듯 달콤한 울림에 계단을 오르던 리샤르가 발걸음을 주춤했으나 멈추진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늦기는 했으나 답이 돌아왔다.
“부인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곳.”
“이미 충분히 안전한데요?”
“아니. 그대가 돌아오기 전 처리해야 했는데 아직 부족해.”
이렇다 할 상세한 설명은 없었으나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는 리샤르의 목소리만으로도 심각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몇 달간 자리에 없었던 앤시아는 그런 리샤르를 어설프게 설득할 수 없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빙글빙글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앤시아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1층은 요리장 하몬이 작은 주방에서 요리를, 2층에는 하녀들의 휴식 공간이, 3층에는 드레스 룸을 정리하는 하녀가 리샤르에게 안겨 올라가는 앤시아를 보고 인사했다.
모든 구역을 감시하고자 원형 계단을 만든 걸까 싶을 만큼 비효율적이면서도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 친밀감도 느껴졌다.
4층에 도착하자 개방되어 있던 아래층과 달리 단단해 보이는 문 앞을 호위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대체 귀한 인력을 얼마나 배치한 걸까.
두꺼운 문을 여는 호위의 팔 근육이 불뚝거리며 솟아날 정도로 묵직함이 느껴졌다. 앤시아 혼자서는 절대 못 열 게 분명했다.
두꺼운 문이 열리자 그 안은 화사한 봄이 온 것처럼 밝았다. 포근해 보이는 아이보리와 귀여운 핑크가 섞인 벽지와 바닥은 아주 어린 영애나 좋아할 법한 꾸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앤시아 마음에 들지 않냐 하면 또 그렇지 않았다. 인형의 집을 실물 크기로 키운 것처럼 아기자기한 베이비핑크의 여린 색감은 손을 대 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앤시아의 눈에 깃든 호의를 발견한 리샤르는 그녀를 내려 주었다. 앤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서 자 구석에 있던 작은 문이 열리며 손에 물수건을 든 비앙카가 달려 나왔다.
“마님!”
“비앙카?”
비앙카를 본 앤시아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 환한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앤시아에게 몰렸다.
앤시아가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자 비앙카는 냉큼 손에 쥔 물수건을 내려놓고 앞치마에 손까지 쓱쓱 닦은 후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리샤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으나다들 앤시아를 바라보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우와, 마님. 저택에 돌아오신지 하루 만에 얼굴에서 빛이 나세요. 공작가 음식이 좋긴 좋나 봐요.”
“엘리의 화장 솜씨가 좋아서 그래. 푹 자기도 했고, 그보다 비앙카, 자는 줄 알았는데. 밥은 먹었어?”
눈눈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가장 많이 물었던 말이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질문이었다. 비앙카는 공작가로 돌아와서도 친밀한 앤시아의 태도에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히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싱싱한 샐러드에 건더기가 큼직하게 들어간 수프와 두꺼운데도 부드럽게 씹히는 스테이크까지. 하녀가 먹기에 과분한 식사를 했답니다.”
“와, 맛있었겠어. 나도 점심은 그렇게 먹어야지.”
“네, 마님. 마님도 그간 너무 못드셨어요. 많이 드셔야 아기님도 쑥쑥 크죠.”
두 사람의 대화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리샤르의 시선이 흔들렸다.
앤시아의 그간 식생활이 형편 없었다는 점을 직접 듣게 되어 절로 인상을 쓸 만큼 속이 상한 것에 이어 아기 이야기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 리샤르의 등 뒤로 소식을 듣고 불려 온 이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 그윈티드 공작님을 뵙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돌아보니 나이가 지긋한 여인과 젊은 여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노인은 계단을 오르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젊은 여인은 손에 든 가방이며 풍기는 약 냄새가 의사임을 짐작게 했다.
앤시아를 별채로 데려오면서 미리 대기시켰던 의사와 산파가 곧장 달려온 것이다.
“공작 부인께서 진찰이 필요하다 하여 왔습니다.”
“전 의사는 아니지만, 이 손으로 받은 아이만 수백 명이 넘기에 불려 왔지요.”
어리둥절하던 앤시아는 리샤르가 의사는 물론 아직 한참 이르지만, 산파까지 불렀다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거기, 남자들은 다 밖으로 나가 주시죠. 여인이 배를 보여야 하는데 그리들 쳐다보고 있으면 어찌합니까.”
나이 든 산파가 멀뚱히 안쪽을 바라보는 호위들에게 호통을 쳐 뒤돌게 하고 리샤르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당당했다. 남편인 데다 공작이었기에 산파는 더 뭐라하지 못하고 앤시아를 침대에 편히 눕게 한 후 캐노피를 당겨 주변을 가렸다. 완전히 감춰지지는 않았으나 천 한 장 덕에 심리적으로 앤시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의사는 앤시아의 복부에 청진기를 대 보거나 안구와 혀를 살펴보기도 했다. 산파는 진맥을 짚어 보고 앤시아의 배에 직접 손을 얻기까지 했다.
진료 과정은 별것 없었으나 한 두 번이 아닌 여러 차례 신중히 살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의사 쪽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아기님 심장 소리도 정상이고 건강합니다.”
그간 진료를 보지 못해 아이의상태를 알 수 없었던 앤시아는 좋은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산파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견을 덧붙였다.
“배의 크기도 그렇고 태동이 없는 걸 보아 삼 개월 정도? 예정일은 한참 더운 여름이 되겠네요.”
“네? 그럴 리 없는데요.”
앤시아가 단박에 부정하자 당황한 산파가 웃음을 보이며 긍정했다.
“공작 부인께서 체구가 작아 아이가 더 크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으나 심장 소리 크기도 그렇고 움직임도 거의 없어 삼 개월에서 사 개월 정도…….”
“아뇨! 삼 개월 전에 의원이 임신이라고 알려 줬어요. 여름이 아닌 봄에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요.”
앤시아의 단호한 외침에 산파가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의사 쪽에서 답이 나왔다.
“삼 개월 전이라면 아이가 생기자마자 확언을 해 주었다는 겁니까? 임신하자마자 알아챌 수 있는 의원이라면 제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네요. 신혼부부들이 아주 줄을 잇겠습니다.”
산파에게 목소리를 높인 탓에 앤시아를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앤시아 역시 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단호했다.
“다른 의사를 불러 주세요.”
“저희는 공작님의 부름에 응했고 절차대로 검사한 것뿐입니다.
검사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의사와 산파가 물러가려 하자 앤시아는 다급해졌다. 캐노피를 젖히며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리샤르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런 앤시아를 바라보는 리샤르는 미동조차 없었다.
리샤르의 무표정이 지금처럼 두려웠던 적이 있을까.
다급해진 앤시아는 그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부분을 언급했다.
“오라버니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째서 지금 소백작을 언급하는 건가.”
“당신이 오해할 게 뻔하니까 그렇죠!”
저도 모르게 앤시아가 언성을 높이자 리샤르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공작 부인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리샤르가 눈짓하자 의사와 노파가 끌려 나갔다.
“아이고, 왜 이럽니까? 제 발로 갈 거예요.”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어머니도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들이 당황하며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며 환자의 비밀은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외쳤으나 끌어내는 호위의 손길은 거칠기 그지 없었다.
저들의 안위는 이따 다시 언급하더라도 지금은 리샤르가 하고 있을 끔찍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전 삼 개월 전 의원에게 검사를 받았어요.”
“손바닥만 한 마을에 의사 비슷한 것도 없어 보이던데.”
앤시아는 이 일이 자연히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버렸다. 리샤르가 오해하기 충분했고 그의 신경을 긁어 댈 결과가 떡하니 나와 버렸으니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진실을 알려야 했다.
“납치당하고 도망 다니다 열이 올랐어요. 간신히 마을에 도착한 후에도 며칠 동안 의식이 없었고요. 그때 마을에 잠시 들렀던 의원을 비앙카가 불러왔고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알려 줬어요. 그때 임신 삼 개월이라고 말해 줬고요.”
“마침 마을에 들른 의원이라.
행운이군.”
비꼬는 것도 아닌 담담한 리샤르의 말투에 앤시아는 더욱 초조해졌다. 무슨 말을 하든 다 꼬투리가 잡힐 것 같았다.
“저도 제 배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절 의심할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부인. 몇 번이나 말했듯이 나는 부인을 믿어.”
“공작님.”
“하지만 며칠간 의식이 없었다?
의식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명할 수 있나?”
끔찍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질문에 앤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하는가. 나 단의 결백을 주장한다 한들 리샤르는 믿지 않을 텐데.
그때의 의원을 불러오고 싶어도 지나가던 외지인이었기에 다시 찾을 방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