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5화.
“저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도 비앙카는 손을 들며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공작님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집은 좁아서 방이 두 개뿐이었거든요. 당연히 제가 마님과 항상 함께 있었죠. 낮에는 나단님이 저랑 같이 일하느라 바빴고요.”
“한시도 아내를 떠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나?”
“화장실은 갔지만…… 나단 님이 새하얗게 질려서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마님에게 손댈 만큼 파렴치한이었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았어요.”
비앙카는 앤시아의 등 뒤에 바싹 붙어 리샤르를 향해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 질문을 마님께 하는 공작님도 제게는 경계 대상 1호고요.”
모두가 긴장하는 상황에서조차 비앙카는 거침없었다.
저리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니 리샤르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앤시아를 이곳에 머물게 하려고 그녀가 아끼는 비앙카를 데려다 두기는 했지만, 당장에라도 목덜미를 잡아 밖으로 내던지고 싶을 만큼 불안한 요소이기도 했다.
리샤르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앤시아가 한발 나섰다.
“공작님, 저는 공작님의 불안을 이해해요.”
이 일에 대해 왈가불가할 것도 없었다. 제대로 검사를 해 줄 의사를 계속 불러올 수도 있고 일기인지 일지인지 모호할 만큼 노트에 남겨 둔 기록을 통해 리샤르를 향한 마음을 보여 줄 수도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증거가 되지 못하더라도 봄에 아이를 낳으면 모든 오해가 풀릴 테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리샤르를 향한 섭섭함은 접어두고 앤시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단지 이렇게 일을 벌이시기 전에 저와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거예요. 공작님께서 정말 절 의심하신다면…….”
“아니. 의심하지 않아.”
얼굴에 물음표가 백 개쯤 떠 있는 거 같은데도 리샤르는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그저 그대를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 못 할 뿐이지.”
“네? 아니에요, 공작님. 그런 식으로 납치당할 거라곤 누구도 몰랐을 거예요.”
“내 영지에서 벌어진 일이니 내 책임이야.”
리샤르가 자책을 이어 가자 앤시아는 서운함보다 그를 달래려는 마음이 앞섰다. 고개 숙인 리샤르의 뺨을 붙잡으며 눈을 맞추려 애썼다.
“제 잘못이에요. 외부에서 들어온 마차를 탄 건 저인걸요.”
앤시아의 다정한 속삭임에 리샤르는 잠시 망설이다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소백작이 보낸 편지는 며칠 전에 찾았다고 하는군. 이미 그에게 부인의 위치를 들은 후에야 발견되었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고, 그대를 찾았으니 철저히 조사해 찾아낼 것이오.”
공작가 안에 세작이 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이번 일로 더욱 확신했다.
“그 전까지는 그대를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물러 주었으면 해.”
“공작가는 안전하잖아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공작가는 안전하지 않아.”
“안전해요. 기사단이 저렇게 많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안전하지 않아요?”
“저택 안에서 로사가 살해당했으니까.”
갑작스러운 진실에 앤시아의 사고가 정지했다.
로사가 살해당했다니? 로사는 실종된 거 아니었어?
크게 당황하는 앤시아의 반응에 리샤르는 곧장 문밖으로 향했다.
앤시아가 따라오자 리샤르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저지했다.
호위의 손에 문이 닫히는 사이로 리샤르가 단호하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대는 이곳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해. 내가 용납하지 않아.”
“공작 님!”
“지난 석 달간 부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찾아 헤맸소. 내 심정이 어땠는지 그대가 알까?”
“그건…….”
리샤르와 앤시아의 입장은 달랐다. 앤시아는 리샤르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렸을지언정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리샤르에게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리움뿐이었다.
그러나 리샤르에게 앤시아의 부재는 영원한 이별을 상상하게 했으리라.
하루 이틀만 연락이 끊겨도 걱정이 될 텐데 무려 석 달이 넘어 가도록 앤시아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리샤르가 미치지 않은 건 나단이 그녀를 납치했다면 무사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납치했다면, 그래서 그녀가 안전하다면 소백작의 목을 베는 대신 용서를 택하리라 각오할 만큼.
최악을 상정하고 최상의 결과가 나왔음에도 리샤르는 아직 그녀를 잃게 된 정황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단이 납치한 게 아니라면 모든 증거는 무의미했다.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든 리샤르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배후를 찾는 동안 앤시아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때보다도 맹렬하게 달려 들 생각이었다.
리샤르를 향해 복잡한 얼굴을 한 앤시아를 이렇게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날 원망해도 좋소. 하지만 이것만은 양보 못 해. 이제 그대를 잃고 싶지 않으니.”
앤시아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리샤르의 단호한 얼굴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문이 굳게 닫힌 후, 앤시아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방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로사가 실종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녀의 깐깐함을 떠올리면 어디서 든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언제 살해당한 걸까. 그것도 공작가 안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은 덕에 오히려 앤시아는 현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앤시아와 리샤르의 입장이 달랐다.
앤시아는 공작가로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리샤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앤시아의 안위를 알 수 없어 고통받았다.
이 탑을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냈을 리 없었다. 리샤르는 처음부터 앤시아를 다시 찾는다면 이곳에 가둘 생각으로 쌓아 올렸을 것이다. 로사를 살해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를 저택 안에서 앤시아를 완벽하게 보호하려면 공간을 줄이고 인원을 선별해야 했다.
‘보아하니 그간 보냈던 모든 편지와 전서구가 대부분 도착하지 못했고.
백작가 쪽에서도 구하러 오지 않은 걸 보아 마찬가지일 터.
게다가 앤시아의 작게 부푼 배는 주변에서 보기에도 의아할 정도였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고는 하나 하필 의사와 산파가 보이는 대로 말해 버린 후라 리샤르의 의심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마수 토벌을 나간 리샤르가 갑자기 사라졌고 삼 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옆에 임신한 여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것도 본인은 오 개월이 넘었다고 하지만 육안으로 보기엔 삼 개월. 딱 리샤르가 사라진 그 시점에 임신한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면?
“밑장 빼기냐고……. 손모가지 날아간다, 진짜.”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짜증이 치솟았다.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만큼 순간적으로 분노했다. 리샤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 속 가정에 발끈하고 말았다.
제3의 여인으로 떠올려도 분통이 터지는데 리샤르가 봤을 때 앤시아와 무척 사이가 좋은 나단과 함께 사라졌으니 별별 상상을 다 했으리라.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화가 많이 났구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화날 수 있는 상황이지.
암, 이해함. 나라도 반대 입장이면 화나.
근데, 그렇다고 해서 별채에 감금은 아니지 않나?”
배 속의 아이를 의심당한 상황에서 안전을 이유로 방 안에 갇혔다. 그것도 원래 머물던 방도 아닌 별채에 새로 지어진 탑에.
“마님, 마음은 복잡하시겠지만진정하셔야 해요.”
앤시아가 한참 동안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자 보다 못한 엘리가 나섰다. 비앙카 역시 언제든 앤시아를 부축할 수 있도록 손을 내민 채 대기 중이었다.
“일단 앉아서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요?”
“소파가 굉장히 푹신하더라고요. 마님, 이쪽이에요.”
혹여나 앤시아가 흥분할까 봐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소파로 앤시아를 이끌었다. 소파에 앉고 나서야 앤시아는 방 안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걱정 어린 얼굴을 한 엘리와 비앙카, 문 앞과 창가에 서 있는 호위, 그리고 멀찌감치 벽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안나 로프까지.
이들 중 안나의 존재가 가장 의아했다.
믿을 만한 사람만 둔다면서 새로운 사람을 들인 저의가 무엇일까.
생각에 잠겨 있던 앤시아의 의문 어린 시선에 안나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해 왔다.
“저는 3명의 자녀를 두었기에 임신과 출산에 어느 정도 익숙합니다. 게다가 저는 체구도 작지요.”
그제야 앤시아는 안나의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마님을 곁에서 면밀히 돌봐 드리고 유모를 선택하실 때도 도와드릴 수 있기에 공작님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아, 그런 거였어요? 태어날 아이를 위해 안나를 불러 준 거였군요.”
리샤르가 의심할지언정 아이에 대해 적의를 가진 건 아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잠깐, 아이가 셋? 안나, 제 또래 아니에요?”
“부끄럽지만, 공작 부인보다는 나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제외하더라도 전담 시녀로서 부족함 없이 보필할 것입니다.”
시종일관 침착한 안나의 태도에 앤시아는 머릿속이 복잡한 것과 별개로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음……. 내 생각에 한동안 탑에 갇힌 신세일 텐데 너무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안나.”
“그렇기에 더욱 저희가 힘내야 할 때입니다. 공작 부인께서 우울해지지 않도록, 공작가의 후계 자 교육에 대한 계획 역시 함께 살피겠습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열의를 불태우는 안나를 보며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그렇다 해도 리샤르가 출산과 아이를 위해 들인 사람이었다. 호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일단, 우리가 앞으로 지낼 탑에 대해 알아볼까요?”
이 방에 갇힌 것인지, 탑 안은 돌아다닐 수 있는 건지 알아봐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