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6화.
기사부단장 아서 모겐스는 침통한 얼굴로 리샤르를 찾았다.
집무실에서 며칠째 떠나지 않는 리샤르의 안색은 공작 부인을 되찾기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지난 며칠간 세작을 찾기 위해 공작가를 발칵 뒤집는 통에 사용 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빠짐없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몇몇 드러난 이들은 가족과 주변 관계까지 확인하였으나 소득은 없었다.
황족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면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진즉에 감추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공작가에서 지급하는 급료 외에 다른 수익이 발견된 이도 없었다.
사용인들 대부분 조사가 끝나다들 업무로 돌아갔으나 측근들마저 조사 대상이 되자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저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리샤르를 따르던 기사들의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황궁에서 온 편지는 달갑지 않았다.
“각하, 황궁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서가 리샤르에게 넘긴 건 밀봉조차 돼 있지 않은 성의 없는 종이 한 장이었다.
리샤르가 받아 드는 대신 턱짓을 하자 아서가 한 줄 한 줄 힘을 주어 읽어 내렸다.
“황궁에서 반나절 거리에 북부의 기사단이 허락도 없이 머물다 갈 만큼 인력이 남아돈다니 올해 기사단 입단은 불허하겠다. 현재 인원에서 십 퍼센트 이상 기사단의 규모를 줄일 것을 권고한다.
아까운 인력은 황궁으로 보내도 좋다……. 각하, 이건 이번 일을 핑계로 우리 기사들을 빼내려는 수작입니다.”
황궁의 편지는 통보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런 일이 있었다.
그간 납작 엎드려 황제의 무리한 요구를 따른 덕에 한동안은 이런 식의 간섭은 없었다.
그러나 리샤르가 앤시아를 찾기 위해 동부까지 기사단을 이끌고 달려간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황태자의 간섭이라면 설득이라도 하겠는데 황제 측에서 나온 이야기라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안 그래도 기사단을 별채로 보낸 터라 인원이 부족하던 차였다. 마수 토벌에 투입할 인원도 부족해 용병을 고용할 예정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사의 숫자가 줄어들면 타격이 제법 컸다.
몇몇은 이 기회를 통해 황실 근위기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하나 대부분은 허드렛일에 동원되는 말단에서 머물 뿐이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실력 자를 데려가 방치하는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짐작은 갔다.
공작이 가진 무력이 점점 커지는 건 방해해야겠고, 황제의 곁에 두기엔 세작이 아닐지 의심스러울 테지.
“신입 기사의 채용은 불가하나 이미 영지를 찾은 기사 지망생에게 종자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하지. 그 정도 눈속임은 황제도 참견하지 않을 테니.”
“예, 각하.”
“황궁에 보낼 기사들은 내가 따로 뽑아 두겠다.”
“예? 그 정도 일은 저에게 맡기셔도 되는데…….
할 일이 쌓여 가고 있기에 리샤르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정작 리샤르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황제가 보낸 편지를 대충 책상 위에 던졌다.
“세작으로 의심돼도 곁에 두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준수한 이들로 보낼 생각이다.”
“그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작으로 쓸 생각 없으니 위험할 건 없다. 황제만 의심하며 손에 쥐지도 놓지도 못하겠지.”
그렇기야 하겠지만, 공작가에 귀한 전력이 빠져나가는 일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이런 신경전을 지나치지 않는 리샤르의 예민함에 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서가 나가고 보좌관이 새로운 보고서를 가져와 몇 가지를 묻고 작업하다 다시 나간 후에도 리샤르는 내내 집무실에 앉아 일을 처리했다.
집무실을 방문하는 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밤이 돼서야 새로운 보고서를 집어내던 리샤르의 손이 멈췄다.
“앤시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불과 몇 분 거리에 앤시아가 안전하게 있다는 걸 수시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그녀를 눈에 담고 싶었다.
처음 앤시아를 잃게 될까 두려움을 느낀 건 축제 준비를 위해 방문한 건물의 폭파 사고였다.
폭발에 휩쓸리지 않았음에도 기절해 버리는 약한 아내를 보며 리샤르는 그간 앤시아의 건강을 걱정했었다. 그래도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점점 건강해졌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앤시아가 사라진 이후 리샤르는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를 되찾는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쉽게 잃을 수 있으리란 공포가 뿌리 깊게 내려앉았다.
앤시아를 찾는 데 전력을 기울 이면서도 그녀를 찾게 되면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보호하리라 결심했다. 그에 적합한 별채를 개조하고 누가 접근하는 쉽게 알수 있도록 탑을 쌓았다. 예정대로 앤시아를 되찾은 후 시간을 들여 탑의 존재를 알리려 했으나 그녀가 잠시라도 눈에서 보이지 않자 이성이 흐려졌다.
게다가 영지에서 유명한 의사와 산파를 통해 듣게 된 임신 3개월이야기에 리샤르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앤시아를 굳게 믿고 있음에도 모든 정황이 그녀의 부정을 가리켰다.
리샤르는 모든 위험에서는 물론 자신에게서조차 지켜내기 위해 앤시아를 그곳에 가둘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 모르나 지금의 리샤르는 한계에 내몰린 듯 힘겨웠다.
리샤르 홀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앤시아의 상황을 알려 주는 전령이 다가왔다.
“각하. 마님께서는 죽 숙면을 취하고 계십니다.”
“식사는?”
“오늘도 그 검은 수프를 드셨다고 합니다.”
“후…… 그렇군.”
앤시아를 탑에 가둔 이후 검은 수프를 주로 먹는다는 소식에 리샤르는 괴로웠다.
마치 공작가에 속한 것은 최대한 거부하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며칠이 지나도록 앤시아는 내보내 달라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아내를 설득할지 걱정이었던 리샤르는 앤시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초조해졌다. 리샤르의 행동을 말없이 질책하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앤시아의 얼굴을 보는 게 더더욱 두려웠다.
진실이 무엇이든, 앤시아가 자신을 거부하는 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앤시아에 대한 그리움은 깊은 밤 그녀가 잠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잠든 얼굴이라도 봐야겠군.”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차마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앤시아를 볼 수 없어 며칠째 일에 매달렸던 리샤르가 별채를 향해 움직였다.
밤이 깊어 오가는 사용인은 거의 없었으나 별채에 가까워질수록 병사와 기사가 적절히 간격을 두고 보초를 섰다. 리샤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자세를 꼿꼿이 하는 이들을 지나쳐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걸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며칠 사이 다시 화사하게 꾸며진 작은 정원이 한밤중임에도 조명 마석 아래 반짝였다.
탑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밤에도 반짝거려 보는 재미를 주었기에 비싼 값을 치르고 심어 둔 빛나는 꽃도 있었다.
정원을 지나 탑 입구를 지키는 기사를 눈으로 격려하고 계단을 두어 개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몇 개의 문과 보초를 지난 후에야 당도한 방에는 앤시아뿐이었다. 옆방에 하녀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기에 리샤르는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약한 조명 아래 앤시아의 곤히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은 몇 번을 망설이다. 앤시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며칠 못 본 사이 음식을 거부한 건 아닌지 살이 오르고 보송보송해진 앤시아는 더 아름다워졌다.
입고 있는 잠옷 역시 무척이나 부드럽고 가벼웠다. 이대로 끌어 안으면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얇은 잠옷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리샤르는 앤시아가 뒤척이자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앤시아가 깨어나 원망의 눈빛을 보인다면 리샤르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어질 것이다.
혹은 당장 그녀를 본채로 옮기고 탑을 부숴 내리라. 그대를 가둔 자신을 벌해 달라며 매달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앤시아의 원망이나 자신을 향한 미움 한 조각을 덜어 낼 수만 있다면 뭐든지 상관 없다고 생각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그렇기에 리샤르는 앤시아와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뒤돌아섰다.
오늘 아내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며칠은 버틸 수 있으리라.
편안하다.
무기한 휴가를 받은 것처럼 할 일이 사라진 앤시아는 이 기회에 실컷 뒹굴뒹굴했다.
물론 처음에는 오해를 풀기 위해 몇 번이나 다른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강제로 끌려 나가다시피 했던 의사와 산파가 매일 들러 의무적으로 앤시아를 살피고 조용히 물러났다.
저들이 무사한 건 다행이었다.
앤시아는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보는 걸 원치 않았다.
아마도 다른 의사를 부르지 않는 건 앤시아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했다. 혹여나 이게 추문이 된다면 아는 이가 적은 편이 입단속을 시키기 쉬워서 이리라.
일이 이렇게 되어 아이와 앤시아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처음 검사를 한 의사를 상주시켰다.
앤시아와의 관계는 서먹했으나 종종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수다 속에서 의사가 하녀들의 잔병을 치료해 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짐을 알 수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사용인에게도 친절한 좋은 의사 같은데 상황이 좀 안 좋게 꼬인 거지.’
의사와 산파를 경계하기보다는 편안히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산달이 되고 아이가 태어나면 이 모든 오해는 풀릴 테니 시간문제였다.
“이번 기회에 푹 쉬면 좋지.”
“마님, 저도 푹 쉬어서 너무 좋아요. 주방도 바로 아래라서 먹고 싶은 걸 금방 가져올 수 있고요.”
청소할 곳도 앤시아의 방뿐이니 엘리와 비앙카 모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눈눈 마을에서 고립됐을 때 앤시아는 뭐라도 해 볼까 싶어 뜨개질이라도 했으나, 저택으로 돌아와선 비앙카와 함께 게으름을 피웠다. 엘리는 두 사람이 그간 고생했던 것을 알기에 비앙카의 등을 때리는 대신 푸근한 눈으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