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7화.
“하암……. 왜 푹 잤는데도 졸릴까?”
“임신 초기에는 원래 잠이 많이 온다고 해요.”
“초기 아닌데? 6개월은 됐는 걸.”
“아, 그, 그건…… 몸이 무거우니까 쉽게 피로해지시는 걸 거예요. 주무세요, 마님.”
엘리가 허둥지둥 베개를 두드려 주며 앤시아를 편히 눕게 도왔다.
“후아암…….”
조금만 움직여도 쉬이 피로해지는 시기였다. 기분 탓인지 며칠 사이 배가 더 볼록하게 부푼 것도 같았다.
엘리는 수시로 환기를 해 주고 비앙카는 탑 안에서의 이동은 자유로워 틈틈이 간식거리를 날라왔다.
“마님, 주문하신 셔벗이에요.”
“응, 고마워.”
따뜻한 방 안에서 차가운 셔벗을 먹는 사치스러운 상황이 즐거웠다.
갑자기 먹고 싶어진 붕어빵을 요리장 하몬에게 설명하자 왜 생선에 팥을 넣냐며 동부는 그런게 유행이냐며 안색이 창백해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팬케이크에 팥을 넣은 애매한 디저트가 나왔지만 나름 맛은 있었다.
하도 앤시아가 뒹굴뒹굴하기만 하자 보다 못한 안나가 말을 꺼냈다.
“지나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계단을 좀 걸어 보시면 어떠실까요?”
“나, 방에서 나가면 안 되잖아.”
공작의 지시에 나갈 생각조차 않는 공작 부인이 안쓰러워 안나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이내 안나는 문으로 걸어가 호위에게 몇 마디 하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탑 안을 걷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어? 정말?”
방 안에 가둬 둘 것처럼 말하더니 탑 안을 돌아다니는 건 제재하지 않는 듯했다.
앤시아가 호위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쉽게 문이 열렸다.
의아해하면서도 앤시아는 오랜만에 걷는 것처럼 어색하게 계단을 밟았다.
“계단이 상당히 많은데?”
“저희가 잡아 드릴 테니 조심조심 내려가세요.”
“배가 더 나오시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힘들어지실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이 셔야 해요.”
하녀와 시녀의 조언을 들으며 앤시아는 천천히 탑 안을 돌아다녔다.
4층짜리 건물주가 된 기분으로 1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데 다리가 어찌나 당기던지.
어차피 요즘 피로가 심해져 움직이기도 귀찮으니 일단 계단 산책은 보류하기로 했다.
앤시아가 단 한 번 탑을 돌아본 후 다시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리샤르는 죄책감에 식사도 거르고 일에 매달렸다. 물론 이 사실을 앤시아는 알지 못했다.
이후로도 앤시아의 탑 생활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너무 좋아…….”
앤시아는 한 마리의 게으른 흰물범처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옆에는 호위에게 부탁해 받은 ‘이름’ 시리즈의 성인용 신간 소설이 쌓여 있었다. 하루 한 권 보는데도 아직 볼 소설이 많아 행복했다.
앤시아가 낮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안나가 태교에 좋다며 동화책을 가져와 옆에서 읽어 주었는데 얼마나 잠이 잘 오는지 수면제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자 보다 못한 안나가 각오를 굳힌 듯 진지한 얼굴로 나섰다.
“이대로는 공작 부인께서 망가지시겠어요. 공작님을 뵙고 외출허가를 받아 오겠습니다.”
하녀인 비앙카와 엘리는 24시간 함께 탑에 머물기는 하나 침구세탁이나 소소한 심부름 등으로 별채를 나갈 때도 있었다. 안나 역시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남편 가일과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게으르게 책을 뒤적거리는 앤시아의 모습을 본 안나가 이건 아니라며 나선 것이다.
“안나, 난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히 즐기고 있는걸.”
“아닙니다. 저는 그간 공작 부인께서 행하신 많은 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명한 부인을 방에 가둬 두다니요.”
존경? 현명?
앤시아는 막 입에 넣던 쿠키가 아니었다면 되물을 뻔했다.
와삭 -
심각한 분위기 속에 쿠키 씹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현숙하기로 소문난 공작 부인이 구제 불능 한량처럼 구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다 돼 가는데도 슈미즈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는 공작 부인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결국, 안나가 폭발했다.
이게 다 공작 때문이라며 방을 뛰쳐나가려던 안나는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장 줄리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하녀장, 안 그래도 전할 말이 있었는데 잘되었네.”
“죄송합니다만, 마님께 먼저 드릴 말이 있어 전한 후 듣겠습니다.”
“줄리, 오랜만이야.”
줄리는 앤시아가 반가워하자 살짝 미소를 보인 후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주인님께서 별채 정원 재정비가 끝났으니 마님께서 산책하시면 어떤지 권하셨습니다.”
“응? 방에 가둘 땐 언제고?”
따진다기보다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줄리의 무표정이 일그러지며 금방이라도 습한 기운을 불러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자 뒹굴뒹굴하던 앤시아가 놀라 일어났다.
“아니, 산책 완전 좋아. 할래.
하면 되잖아. 줄리, 우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앤시아가 숄만 걸치고 나갈 기세로 적당히 옷을 걸치자 안나와 줄리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을 나설 땐 공작 부인 다운 품위를 지키셔야 합니다.”
“마님, 호위와 병사들의 눈이 많습니다.”
아. 역시 둘이 닮았어.
앤시아가 눈매까지 휘며 환한 웃음을 보이자 두 사람 모두 어리둥절한 듯 침묵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엘리는 앤시아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비앙카가 가져온 여러 벌의 드레스는 안나의 눈에 차지 않는 귀여운 색감뿐이라 의견 충돌이 있었다.
“공작 부인답지 않은 것만 골라 오다니. 안목을 키우는 것도 전 담 하녀의 덕목이네.”
“하지만 마님께는 노랑도 분홍도 다 잘 어울리시는 걸요. 게다가 마님은 워낙 화사하셔서 뭘 입으셔도 빛나세요.”
“저도 지금은 비앙카 말에 동감해요. 외출도 아닌 정원 산책이잖아요.”
비앙카와 엘리는 한 편이 되어 영애가 입을 법한 드레스를 앤시아에게 입히려 했고 안나는 단호한 얼굴로 불만을 드러냈다. 산책을 위해 입는 옷에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던 앤시아는 안나가 들고 온 연보라색 숄을 분홍 드레스에 걸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모두가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앤시아는 앞으로 많이 부딪히겠구나 싶어 걱정되면서도, 고작 드레스 색상으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낯선 마을에 고립됐을 때에 비하면 비록 감금에 가까운 상태라할지라도 공작가 안이라는 게 무척 마음이 편했다.
‘내가 너무 긍정적인가?’
자신이 긍정적이기도 했지만, 리샤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줄리는 괜찮아? 우리는 여기서 편히 쉬고 있지만, 줄리는 바깥에 있으니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걱정했어.”
정작 갇혀 있는 건 앤시아면서 자유로운 줄리를 걱정했다. 평소에도 마음씨 좋은 주인마님인 건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사용 인을 걱정하는 앤시아를 향해 줄리는 죄책감이 치솟았다.
지난 며칠간 공작가 사용인과 기사단 할 것 없이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가족 관계부터 시작해 지난 몇 년간의 수익 내역까지 조사했다.
줄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하녀장의 업무가 있어 다른 이들에 비해 일찍 조사가 끝났다. 가족관계도 평범했고 재산 역시 평범했다. 세작이라면 황족과 관계가 있거나 뭐라도 걸려야 했는데 줄리에겐 그런 점이 없었다.
줄리는 세작이기는 하나 따로 돈을 받지도 않았고, 가족의 목숨이 인질로 잡혀 있어 심부름정도만 하는 수준이었기에 이번 조사를 통해 걸릴 게 없었다.
그렇다 해도 심란한 마음이 들었는데 편지를 전하러 간 집무실에서 리샤르가 앤시아에게 산책은 해도 좋다는 말을 전해 주라며 줄리를 보냈다. 그렇게 줄리는 불편한 마음으로 앤시아를 찾은 상황이었다.
“줄리, 안색이 안 좋아. 하녀장일 많이 힘들지?”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줄리는 업무가 밀렸다며 금세돌아갔다. 급하게 돌아간 탓에 누구보다도 엘리가 아쉬운 눈치였으나 앤시아의 단장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마님, 장식하지 않는 대신 가볍게 땋았어요.”
“고마워. 산책하는데 너무 요란하게 꾸미는 것도 좀 그랬는데 딱 좋아.”
앤시아는 앞서는 호위 뒤를 따라 하녀 둘과 시녀, 뒤를 지킬추가 호위까지 대동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너무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고작 계단을 내려가는데 벌써 힘이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여럿이 이동하니 그 소리가 탑 안을 울렸다. 오늘따라 이 소리가 거 슬리는구나 싶더니 1층에 도달할 때쯤 두통이 심해졌다. 멀미가 오는 것처럼 속도 불편해졌다.
앤시아가 몇 번 멈춰 설 때마다 불안해하던 비앙카가 옆에서 부축해 왔다. 덕분에 비틀거리지 않고 1층 입구에 도착했으나 식은땀이 날 만큼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햇빛조차 너무 강하게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으나 앤시아는 이를 보지 못하고 비앙카에게 몸을 기대야 했다.
“문을 닫아 줘.”
묵직한 문이 닫히고 햇빛이 사라지자 앤시아는 한결 숨쉬기가 편안해졌다. 앤시아가 계단에 주저앉으려 하자 비앙카가 냉큼 등을 보였다.
“마님, 제가 방으로 모실게요.”
“4층을? 그냥 올라가도 다리가 후들거릴 텐데.”
“너무 힘들면 중간에 엘리랑 안나 님께 부축해 달라고 하죠, 뭐.”
엘리와 안나는 안색이 창백한데도 앤시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배려에 앤시아는 몸이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보였다.
“그럼 부탁할게. 너무 힘들면 중간에 쉬었다 올라가자.”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비앙카가 앤시아를 거뜬히 등에 업자 엘리와 안나가 양쪽에서 손을 보탰다. 호위는 그들이 직접 옮기는 게 더 빠를 텐데도 공작부인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둘러싼 시녀와 하녀를 보며 조용히 뒤를 따랐다.
탑 앞에서 앤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리샤르는 한참을 그대로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