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29화 (12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0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마른세수하는 리샤르의 행동에서 그가 얼마나 이 상황을 어이없어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리샤르의 반응은 힐다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경우와도 달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힐다가 예상한 경우는 문전 박대. 혹은 앤시아가 제 것인 양 구는 오만, 그마저도 아니라면 고작 안부나 묻자고 먼 길을 달려온 것에 대한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리샤르가 보인 반응은 언뜻 비웃음으로 비쳤으나 그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모두 나가.”

크지도 않은 덤덤한 리샤르의 명령에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호위를 비롯해 집사장까지 모두 응접실을 나갔다.

백작가 측 호위와 시중인은 어찌해야 하나 힐다와 나단을 바라봤다. 힐다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민하는데 리샤르의 이어진 말이 차갑다 못해 서늘했다.

“아내의 명예를 위해 애꿎은 목을 떨어트리고 싶지 않으니 내보내시오.”

“모두 나가 있도록 해. 부르기 전까지 들어오지 말고.”

앤시아와 관련된 일이란 말에 힐다 역시 주저 없이 모두를 내보냈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리샤르가 무슨 말이든 해 주길 바라며 두 사람은 침묵했다.

정작 리샤르는 힐다와 나단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인내심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걸 느꼈다.

‘살의를 참아 내는 게 고작이군.’

응접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리샤르는 나름 침착했다.

앤시아와 이들이 무척이나 친밀하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앤시아는 평소에도 자주 백작가의 이야기를 하며 그리움을 표현해 왔다.

그건 백작가 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후견인임에도 앤시아를 위해 웬만한 대귀족 못지않은 혼수품을 보낼 만큼 그녀를 아꼈다. 보내온 물품 하나하나에 깃든 앤시아를 향한 애정이 얼마나 차고 넘쳤는지 리샤르는 기억이 생생했다.

앤시아가 무사히 공작가로 돌아왔는지 잘 지내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앤시아를 보여 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들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무사하니 돌아가라. 그 한마디만 하고 돌아설생각이었다.

그러나 응접실에 도착해 나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간신히 억눌러 두었던 의심과 두려움이 속절없이 쏟아져 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임신 3개월입니다.

- 길어야 4개월 정도.

-아기님 심장 소리의 크기라든가 태동이 거의 없는 거로 보아 공작 부인께서 주장하시는 5, 6개월은 절대 아닙니다.

목숨을 걸 수 있는가 물으니 열에 아홉은 확신한다고 답했다.

어쩌면 앤시아의 체구가 매우 작고 몸이 약했던 탓에 아이의 자라는 속도가 느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그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내가 거짓말할 리 없다.

예외의 경우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런 가정하에 실낱같이 가는 희망을 붙잡고 스스로 눈을 가린채 보고 싶은 것만 보려 애써 왔다.

그런 식으로 간신히 이어 오던 리샤르의 이성은 앤시아와 마주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이후 더욱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앤시아의 거부는 안 그래도 한계에 달한 리샤르를 괴롭혔다.

아내의 잠든 얼굴을 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앤시아를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데도 그녀를 보지 않으면 의심이 쌓이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거부당할까 두려워 잠든 모습조차 볼 수 없다니. 리샤르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그런 리샤르 앞에 멀쩡하다 못해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두 사람은 앤시아를 향한 걱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게 만든 자가 감히 공작가에 들어와 선한 낯짝을 하고는 리샤르를 응시했다. 어찌나 애틋한지 순수한 사랑을 주장하는 듯해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낳은 아이의 머리카락색을 보고 데려갈 생각으로 온 거라면 포기해. 여름이나 돼야 알 수 있을 테니까.”

노골적인 말이었다.

지나치게 적나라한 말이라 오히려 바로 머리로 들어오지 않은 듯 힐다와 나단이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리샤르는 최악의 본심을 드러냈다. 입으로 내뱉고 나니 참으로 못난 말이었으나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백금발의 아이면 문제 될 것도 없고 설령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해도 선조 중 한 명쯤은 있을테니.”

“지금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아내를 놓는 일은 없을 테니까. 기웃대 봤자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얻지 못할 것이오, 소백작.”

리샤르의 날것과 가까운 감정을 정면에서 받은 나단은 겁먹기 보다 그가 가진 두려움을 읽었다.

전에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처받은 짐승이 제 것을 지키려 이를 드러냈다.

힐다의 분노에 나단이 그녀를 붙잡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오해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저 앤… 공작 부인이 걱정되어 찾았습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시퍼렇게 눈을 빛내는 리샤르를 보던 힐다가 나단을 보호하듯 앞을 막아서려 했다. 이에 나단은 소파 옆으로 나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런 행동이 당신을 자극하는 걸 아는데도 견디지 못해 찾아올만큼 어리석은 오라비의 심정을 제발 조금이라도 알아주시기를…

자비를 보여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진정 아내의 오라비라면 더 큰일 날 일이지.”

리샤르의 빈정거림에도 나단은 흔들림 없이 허리를 숙인 채였다.

“지금 소백작을 살려 두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내 아내가 무사하지 않다면. 내가 그대를 살려 둘 이유가 있을까?”

이곳에 앤시아는 없지만, 앤시아의 뜻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즉 그녀는 무사하며 리샤르가 아무리 나단을 향해 살의를 피우더라도 그뿐,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였다.

힐다는 이 상황이 억울했으나 공작이 저러는 근거가 있다면 나 단이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나단 역시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공작을 자극할 뿐임을 온전히 이해했다. 지금은 물러서야 했다.

“봄이 오면 모든 오해가 풀리겠지요. 그때 초대해 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공작가를 다시 찾겠습니다.”

리샤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나 단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동안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최소한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는 듯 불편한 마무리였다.

그러나 이 순간을 힐다는 그대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

“저는 공작 부인을 보아야겠습니다.”

“어머니!”

간신히 가라앉았던 리샤르의 기세가 다시 거세지는데 힐다 역시 만만치 않게 눈을 치켜뜨며 몸을 곧게 폈다.

“아들이야 정황상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치더라도… 하지만 저는 무슨 이유로 공작 부인과의 만남을 거절당해야 하는 겁니까?”

힐다는 당당하게 굴면서도 나단을 슬쩍 문 쪽으로 밀었다. 나단은 자신이 리샤르를 자극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멀리 떨어졌다.

“설령 거절한다 해도 앤시아가 직접 편지 한 장이라도 적어 주어야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의심받을 이유가 없는 힐다마저 거절하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라는 듯 뻣뻣하기 이를 데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일도 아니었다.

“하, 그대는 정말 목이 두 개라도 되는 것 같군.”

“제 목이 걸릴 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공작의 손이 그토록 가볍다면 이 일대가 전부 시체로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저를 내쫓고 싶으시다면 정당한 이유를 설명해 보시지요.”

단호한 힐다의 모습에 리샤르는 두통이 이는 듯했다.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고집부리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내와 닮아 있었다.

편지 한 장 정도라면. 이걸 핑계로 아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리샤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다와 나단을 지나 문밖으로 나온 리샤르는 한쪽에 서 있는 백작가 사람들에게는 시선한 줌 주지 않고 곧장 별채 쪽으로 향했다.

리샤르는 한참 두 사람과 대화 중 응접실 밖에서 거슬리는 기척을 느꼈다. 목격했을 집사장이나 사용인들에게 이렇다 할 변화가 보이지 않은 걸 보아 짐작 가는 이가 있었다. 별채로 향하는 리샤르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별채로 들어가는 묵직한 문을 걸어 잠그던 기사가 리샤르를 발견하고 다시 문을 열었다. 방금 막 이곳을 통과한 이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탑으로 올라가 앤시아의 방 앞에 섰을 때 리샤르는 응접실 문 앞을 기웃거리던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예, 마님. 나단 님이랑 백작 부인께서 마님을 보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시겠다며…… 꺅!”

리샤르는 이런 식으로 앤시아의 앞에서 거칠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과 본능이 제멋대로 뒤엉키며 비앙카에게로 손이 튀어 나갔다. 다시는 손대지 않겠다는 아내와의 약속보다 비앙카를 붙잡아 밖으로 끌어낼 만큼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왜 내 집엔 쥐새끼가 많은 걸까.”

“공작님!”

거칠게 비앙카를 잡아 밖으로 끌어내는 리샤르의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비앙카가 끌려 나가지 않으려 버둥대다 넘어지는데도 리샤르는 개의치 않았다.

“공작님, 비앙카를 놔주세요!”

“아니. 그럴 수 없소.”

리샤르답지 않은 지나친 행동에 앤시아가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대체 얼마나 교육해야 말을 알아먹는 거지? 키우는 개도 이 정도면 기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리샤르의 분노는 고스란히 비앙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리샤르에게 붙잡힌 비앙카는 겁먹기는 커녕 노려보았다. 리샤르에게 칼에 찔린 적도 있는 비앙카였다.

고작 팔을 잡혀 끌려 나가는 것 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리샤르를 좋게만 보는 앤시아가 이 일로 리샤르의 위험함을 알아채고 경계해 주면 더 좋은 일이었다.

“마님께 온 손님인데 주인님이 제멋대로 돌려보내시려고 하잖아요. 전 마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어요.”

“하… 주인을 위해 이를 드러내는 개는 나쁘지 않아. 오히려 칭찬하지.”

앤시아를 위해 용기 내는 비앙카에게 리샤르는 비틀리기는 했어도 웃음을 보였다.

“단 주인을 지키지 못하면 삶아질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