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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0화 (130/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1화.

백작가의 방문을 앤시아에게 알리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비앙카는 앤시아를 위해 움직였다.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한들 정작 공작 부부의 사이를 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낸다면 그건 충언이 아닌 이간질일 뿐이었다.

그제야 비앙카의 눈이 흔들렸다.

“공작님, 비앙카를 놓으세요. 내 하녀예요.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해도 내 사람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쥐새끼처럼 훔쳐 들은 말을 옮기는 이를 내가 뭘 믿고? 발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기 힘들 정도더군. 세작인지 다시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의심될 만큼.”

“공작님!”

“부인의 말대로 나는 공작이고 이곳은 공작가요. 내가 못 할 일은 없소. 오히려 하녀 하나 치우는 건 일도 아니고, 이 일을 본보기로 삼을 수도 있지.”

“그건 공작 부인인 제가 판단할 일이에요. 절 위하신다면서 제 권한을 쓰레기처럼 만드시려는 건가요?”

앤시아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웃음을 지은 채 당당한 얼굴로 리샤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절 걱정해서 이 탑에 가두셨죠. 제한된 사람만 출입하기에 탑에서 지내는 사용인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공작님이 절 위한다는 핑계 하나만을 믿고.”

“핑계가 아니오.”

부정하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다가섰다.

“그만큼 충실한 하녀이기에 제가 알아야 할 이야기를 전달한 것뿐이에요. 그게 개처럼 끌려 나갈 만큼 끔찍한 잘못이란 말인가요?”

리샤르는 앤시아의 비난 어린 시선을 받는 게 힘겨웠다. 차라리 집채만 한 돌연변이 마수를 맞닥뜨렸을 때가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단이 공작가에 있음을 쪼르륵 달려와 알린 비앙카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사용인은 우리를 위해 애써 주는 사람들이에요.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공작님.”

보다 못한 앤시아가 리샤르의 손목을 붙잡자 거짓말처럼 비앙카를 붙는 손에 힘이 풀렸다. 앤시아가 비앙카에게 떨어지라는 듯 눈짓을 하자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러섰다.

넘어진 비앙카에게 앤시아가 손을 내밀자 리샤르는 못마땅하다.

는 듯 이를 갈았다.

“그 누구라 해도 부인을 흔드는 이는 용서 못 해.”

“제가 무엇에 흔들린다는 건가요?”

“그야….”

“절 믿는다더니 거짓말이었나요?”

앤시아의 맑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리샤르는 두려움과 분노로 일렁이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나는 그대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절 지키실 수 있어요.”

앤시아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지난 몇 달간 고립되어 있지도, 자신을 위해 나단과 비앙카가 매일 기절하듯 잠들 만큼 고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인이 다른 이를 눈에 담게 두고 싶지 않소.”

“나단 오라버니를 보지 않길 원하시는 건가요? 평생?”

“평생은… 아니오.”

앤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핑계가 있기는 했으나 가장 두려운건 다른 일이었다. 앤시아가 낳게 될 아이가 혹여나 나단을 기라도 한다면, 황실에서 어떤 추문을 붙여 압박해 올지 눈에 보이듯 훤했다.

앤시아는 리샤르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리샤르 역시 앤시아의 부드러운 손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공작님의 강함은 외부로 향했으면 해요. 마수나 공작가를 위협하는 외부의 존재 말이에요.”

“그러고 있소.”

“절 예측하지 마시고 직접 물어봐 주세요.”

“…무엇을 말인가?”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냐고.”

리샤르는 대답 대신 애원하듯 흔들리는 눈으로 앤시아를 응시했다.

“제 대답은 네.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긴 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앤시아의 손이 굳어 있던 리샤르의 뺨에 닿자 미약하게나마 힘이 풀렸다.

“공작님이 이렇게나 두려워하신다면 저 역시 지금은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샤르의 굳었던 얼굴이 천천히 풀어지자 앤시아 역시 옅은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뵙고 싶어요.”

“부인.”

“저는 이곳에 있을게요. 공작님이 불안해하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요. 그저 가까운 곳에 어머니가 있으니 뵙고 싶은 것뿐이에요.”

리샤르 역시 백작 부인인 힐다가 앤시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앤시아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탑을 본다면, 이 방을 보게 된다면 힐다가 무슨 마음을 먹게 될지 신경이 쓰였다. 설령 앤시아를 빼앗으려 든다면 자비 없이 치워 낼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한다면 아내의 마음을 영영 잃게 될 수 있었다.

마수를 토벌하면 그만인 단순한 삶에 앤시아가 나타나면서 복잡해졌다.

리샤르의 대답이 늦어지자 앤시아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백작 부인을 이곳으로 불러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나가겠어요.”

호위 한 명, 아니 하녀 한 명만 가로막아도 옴짝달싹 못 할 만큼 약한 앤시아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단호했고, 무슨 짓을 해서든 힐다와 만날 거리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임을 알기에 리샤르는 앤시아를 이길수 없음을 알았다. 여전히 맞잡은 손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별채의 정원과 이 방. 어느 쪽이 좋겠소?”

앤시아의 안전에 집착하던 리샤르치고 파격적인 제안에 가까웠다.

별채의 정원에서 만나는 편이 힐다의 오해를 사지 않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앤시아는 최근 몇 번이고 탑을 나가려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의사를 불러 검사를 받았으나 당시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는 점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너무 움직임이 없어 운동 부족일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숨만 찰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로지 탑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열 때만 몸에 이상이 생겼다.

의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앤시아는 자신이 외출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샤르가 이렇게나 경계해야 할만한 무언가가 바깥에 있다는 생각이 앤시아를 탑 안에 틀어박히게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앤시아는 누구보다도 현 상황에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앤시아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아이.

이 아이의 존재로 인해 앤시아는 이곳에서 온전한 제 삶이 이어지 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폭발 사건에 휘말린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고, 나단과 함께 안전한 영지 안을 돌아다니다 납치 당했던 일 역시 선명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비앙카를 보고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앤시아는 험난한 사건을 넘고 넘어 이 아이를 가지게 됐다.

아이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3개월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더디게 자라는 아이에게 미안했고 걱정스러웠다. 태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에 앤시아는 밤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이건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리샤르가 안전을 보장했음에도 이 탑을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앤시아는 리샤르의 제안에 짙은 미소로 답했다.

“방으로 모셔 주세요. 감사해요, 공작님.”

***

나단을 두고 앤시아가 머물고 있다는 탑으로 향하는 내내 힐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거쳐 온 기사의 숫자와 철저한 보안 상태를 보면 마치 황실의 보물이라도 숨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앤시아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엄지라도 척 치켜들고 싶었으나 호위의 배치를 보면 보호와 감시를 동시에 하기 위함임이 드러났다.

작고 아담한 정원은 보기 좋았으나 뜬금없이 위치한 탑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저기에 앤시아가 있다니. 힐다는 제 다리가 휘청거릴 만큼 기가 막혔다. 할 말은 많았으나 힐다는 앞서가는 리샤르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꾹 눌러 참았다.

단숨에 탑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숨조차 가빠하지 않던 힐다는 문의 빗장을 푸는 동안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건 누가 봐도 감금이었다. 충동적으로 공작에게 결투 신청을 하지 않기 위해 힐다는 문 뒤에 있을 앤시아만 떠올렸다.

문이 열리자 바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다행히 안은 화사했고 온화한 공기로 가득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제법 넓은 방 한가운데 앤시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

“어서 오세요, 어머니.”

달려들듯 다가간 힐다는 조심스럽게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앤, 아가.”

“어머니.”

“고생했다, 앤. 정말 애 많이 썼어.”

“…흑… 흐윽….”

힐다의 품에 안긴 앤시아는 의연하게 그녀를 맞이했던 것과 달리 감정이 복받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런, 못 본 사이 울보가 됐구나.”

“저 원래 잘 울었… 흐윽, 어머니.”

“그래, 그래. 보고 싶었지? 나도 우리 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단다.”

힐다는 앤시아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살살 닦아 주며 소파로 이끌었다. 눈치 빠르게 안나가 주변을 물리고 엘리는 차를 내려 주었다.

힐다는 사용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앤시아를 살폈다.

“다행히 살이 빠지진 않았구나.

입덧으로 고생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기가 순한가 봐요. 배 속에서도 얼마나 얌전한지 가끔 걱정될 정도예요.”

앤시아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담아 둔 걱정을 털어놓자 힐다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는 듯 앤시아가 힐다의 손을 잡아 배에 가져다 댔다. 힐다는 조심스럽게 앤시아의 작게 부푼배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보였다.

“나단도 무척 얌전한 아기였지.”

“오라버니가요?”

“그렇단다. 오죽하면 기사단 겨울 훈련에 참여하려고 준비하다가 살이 찐 거 같아서 요리장과 상담을 했는데, 혹시 임신 아니 냐는 말을 들었지 뭐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앤시아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힐다는 나단을 임신했을 때 이야기를 줄줄 읊어 주며 앤시아를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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