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2화.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리샤르는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힐다는 리샤르를 대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다정한 손길로 앤시아를 보듬었다. 둘의 관계를 모르는 이가 보면 모녀 사이로 보일 만큼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자연스레 소소한 수다가 이어지며 몇 달간 보지 못한 공백 따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이 어둑해질 때까지 손을 붙잡은 채 이야기를 주고받던 힐다는 앤시아의 몸이 기운 걸 보고 아차 싶었다.
“이런, 낮잠을 좀 자야 했을 텐데 깜박했구나.”
“앗, 아니에요. 요즘 자꾸 잠이 쏟아지더라고요.”
“아이를 가지면 예전과 몸이 많이 달라져서 그래. 졸음이 오면 자야지.”
힐다의 눈짓에 안나가 다가와 앤시아를 함께 부축했다. 앤시아는 혼자 움직일 수 있는데도 힐다의 손을 꼭 잡은 채 침대로 걸어갔다.
“어머니,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아요.”
“안단다.”
“가시면 싫어요….”
“아가. 언제든 널 보기 위해 올거라는 거 알잖니.”
그러기엔 너무도 먼 거리였다.
이대로 힐다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기에는 지켜보는 리샤르가 신경 쓰였다.
리샤르는 자신이 지켜볼 수 없을 때 힐다와 앤시아가 만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힐다를 지켜보는 내내 몇 번이고 보좌관이 급한 서류를 들고 달려왔다. 지금까지 지켜봐 준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상당히 배려한 것 이리라.
“어머니.”
“그래, 아가.”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그렇단다, 앤. 앞으로는 종종 통신구로 연락해 다오.”
통신구라는 말에 앤시아의 졸음가득한 눈이 잠깐 반짝였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하지만 대화 내용이 전부 황궁에 알려지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황궁에서 우리의 대화를 알게 된다 한들 뭐 문제가 될 게 있겠니?”
힐다의 당당한 말에 앤시아는 그제야 공작가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 아니라면 황궁이 통신구를 감시하더라도 상관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앤, 가끔 얼굴이나 보여다오.”
“네, 그럴게요.”
침대에 누운 후에도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으나 점차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힐다가 곁에 있어 준 것에 감사해야 함에도 앤시아는 지금 잠들면 그녀를 보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애써 잠을 쫓으려 했다.
그런 앤시아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는 힐다의 행동은 어린 자녀를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이 듬뿍 묻어나 지켜보는 이마다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정도였다.
작게 종알거리던 앤시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기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앤시아가 잠들고도 힐다는 한참 동안 붙잡은 손을 보듬고 바라보다 아쉬운 듯 손등에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눈가가 붉어진 힐다는 방 안에 있던 하녀와 시녀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앤을, 공작 부인을 잘 부탁해요. 이미 잘 보살피는 것 같지만.”
사용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데 익숙한 백작 부인다운 인사였다.
방 안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앤시아의 잠든 모습을 확인한 힐다는 문 옆에 서 있는 리샤르를 보고 표정을 지웠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힐다는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도는 계단에 한숨이 나왔다.
‘감금이라니. 미친 공작 같으니라고.’
하지만 여기서 힐다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리샤르는 나단을 위해서냐며 비꼬아 들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잘못을 따지더라도 아이를 낳은 후에 해야 했다.
게다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본 앤시아의 배는 5, 6개월이라 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리샤르처럼 앤시아와 나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힐다가 애써 묻어 두었던 끔찍하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해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실은 조금 전 앤시아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는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나단이 아닌 둘째를 임신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과거, 임신 사실을 모르고 철없이 겨울 훈련을 따라갔던 힐다는 이상하리만치 피로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 앓다 몇 주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배는 납작했지만 이미 4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5개월이 돼서야 살짝 부푼 배는 나단을 가졌을 때와 너무도 달랐다. 결국, 개월 수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너무 작았다.
핏덩이와 다를 바 없는 작디작은 아이는 몇 시간도 채 살지 못하고 떠났다.
‘너무도 기다렸던 내 딸.
아이가 배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추운 곳에서 험하게 구르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힐다는 죄책감에 며칠을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울었다. 유모가 나 단을 안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힐다가 겪은 일을 감금당한 앤시아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안 좋은 일은 감추고 진실과 거짓을 섞어 좋은 말만 들려주었다.
앤시아의 안도하는 얼굴을 보며 힐다는 자신의 거짓말을 담담히 넘겼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 탓에 눈물짓던 힐다는 부디 앤시아에게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앤시아의 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나단에게로 돌아가는 내내 힐다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
늦은 밤.
리샤르는 오랜만에 앤시아의 방을 찾았다.
낮에도 들렀던지라 화병의 꽃한 송이까지 기억 속 그대로인 방에 들어서자 앤시아가 같은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방에 들어설 때만 해도 문 앞을 지키던 호위가 긴장할 만큼 음울 한 분위기를 풍기던 리샤르였다.
앤시아를 바라보는 리샤르의 눈이 유순하게 풀렸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돌아가면 오늘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앤시아의 잠든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비쳤다. 힐다를 만나게 한 건 옳은 선택이었으리라.
“하아….”
실은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 리샤르는 이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가 응접실에 유순한 얼굴로 앉아 있던 나단을 마주했을 때는 치솟는 살의를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건 무리였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은 대부분 최악을 상정한 것들이었기에 스스로 말하면서도 상처받았다.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감정 소모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쳤다.
리샤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앤시아의 안전.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
그렇기에 앤시아가 자는 동안 얼굴을 바라보고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혹여나 그녀가 나단을 그리워하더라도.
‘아니, 가정은 이제 필요 없지.’
앤시아와 나단, 두 사람은 리샤르가 가장 불안해하는 일을 강하게 부정했다. 무엇보다 앤시아는 리샤르가 가둔 탑에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로지 리샤르 혼자만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일상이 돌아올 수 있을 터. 더는 부정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다.
“음?”
생각에 빠져 있던 리샤르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드라운 손이 붙잡아 오는 것에 당황했다.
이 시간에 한 번도 깬 적 없는 앤시아가 리샤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앤시아가 평소와 달리 일찍 잠이 들었다는 걸 망각한 탓에 실수를 범했다. 무어라 변명해야 하나 망설이던 리샤르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머리를 굴리려 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잠을 깨울 생각은 없었소.”
리샤르의 얼굴에 미안함이 깃들자 앤시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머리맡에 의자가 왜 있나 했어요. 매일 오셨던 거예요?”
“… 최근엔 오지 못했지만, 매일오고 싶었지.”
최근에 오지 못했다는 건 그 전에는 왔다는 의미였다.
평소와 달리 일찍 잠들었던 앤시아는 리샤르가 들어오는 기척에 잠이 깼다.
한밤중 침실을 방문한 리샤르에 대해 앤시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힐다와의 만남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당연한 일인데 감사하게 만든 리샤르를 향한 가벼운 원망이 앤시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낮에는 일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밤이 돼서야 몰래 찾아 오다니, 감정이 갈팡질팡 했다.
기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구는지 답답한데도 저를 보러 한밤중에 찾아온 리샤르가 반가웠다.
리샤르를 마주할 때마다 상반되는 감정이 생겨나는 게 속상했다. 그저 리샤르를 보면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이 그리웠다.
미안한 얼굴로 앤시아를 내려다 보는 리샤르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자신이 저택에 돌아온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리샤르는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갔다.
자신을 탑에 가두고 별채를 뒤집어 놓을 만큼 안전에 완벽함을 도모해 놓고도 리샤르는 여전히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이유가 자신이라면 풀어 줄 수 있는 것도 자신 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리샤르에 대한 불만이나 답답함보다는 그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다.
잡고 있던 리샤르의 손가락을 살짝 당기며 침대 옆을 톡톡 두드렸다.
리샤르는 홀리듯 앤시아의 옆에 몸을 뉘었다. 자연스레 더 뒤로 물러나는 앤시아를 품으로 끌어 안자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안겨 들었다.
리샤르는 그동안 무얼 겁낸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품 안에 보드랍고 작은 여인이 엉망진창이었던 감정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부인….”
너무도 소중한 사람.
“앤시아.”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까워 말을 삼키듯 작게 속삭였다.
“어서 와요, 여보.”
낯선 호칭에 리샤르는 앤시아를 보듬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실은 낮에 힐다와 앤시아가 대화를 할 때, 앤시아가 리샤르를 공작님이라고만 부른다는 사실을 힐다가 재빠르게 눈치챘다. 힐다는 남편을 그렇게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앤시아에게 귓속말을 했었다. 집중하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리샤르는 힐다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애써 보좌관이 가져온 서류에 집중하며 외면했었다.
리샤르는 구태여 묻고 싶지 않았지만, 정지한 사고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다 보니 가장 궁금한 걸 묻고 말았다.
“백작 부인이 알려 준 건가.”
“싫으세요?”
“아니, 좋소.”
리샤르의 빠른 대답에 가슴 위로 흩어지는 작은 웃음소리가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