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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2화 (132/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3화.

리샤르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앤시아가 납치당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맞닿은 몸은 따뜻했고 저에게 보이는 웃음은 부드러웠으며 눈이 마주칠 때면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단 한 번도 잃은 적 없는 듯 품안의 앤시아는 그대로였다. 앤시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머리에 입 맞추는데도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늘 어머니랑 만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나단을 만나지 못하게 했는데도 앤시아는 리샤르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샤르의 옹졸한 선택에도 고마움을 표현했다.

리샤르는 또다시 위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이건 죄책감이었다.

“소백작은 만나지 못하게 했잖소.”

“공작님 입장에선 불편한 상대니까 이해해요.”

“…다시 공작이라고 부르는 건가?”

“네? 어… 부를 때도 호칭을 여보라고 하려면….

앤시아는 아직 잠이 덜 깬 탓인지 생각이 빠르게 전환되지 않았다.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던 앤시아가 리샤르를 올려다보며 말꼬리를 올렸다.

“여보야?”

심장을 누가 움켜쥔 것처럼 거센 감정의 폭풍이 리샤르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이라면 앤시아가 나단을 데려오라고 해도 기꺼이, 아니 힐다 정도라면 다시 데려올 수 있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튀어나온 것인지 리샤르는 그저 앤시아가 제 아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했다.

힐다의 영향도 분명 있으리라.

리샤르는 그들이 돌아가는 길, 힐다와 나단을 위해 호위 병력을 딸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깊은 밤,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가며 다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와, 냄새가 좋아요.”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1층 주방은 분주했다.

몇 달간 실종됐다 돌아온 공작부인이 새로운 레시피를 전수한 후로 별채의 작은 주방은 온통 낯설거나 잘 사용하지 않는 식재료가 넘쳐 났다.

대부분 사용인은 거부감을 보였으나 공작 부인을 향한 하몬의 충심은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낯선 식재료에도 도전 정신을 불태우게 했다.

“정말이지 이 미역국이란 음식은 냄새가 좋네요.”

“전 바다 냄새가 나서 별로예요. 그래도 맛은 괜찮더라고요.”

재료를 다듬던 하녀들이 한마디씩 보태는 동안 몇 시간째 보글보글 끓고 있는 미역국에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처음에 새까만 데다 미끄덩거리는 괴생명체 같아 만지는 것도 꺼려졌으나 앤시아가 알려 준 조리법대로 하니 식감은 별로여도 맛은 괜찮았다.

게다가 이 미역국이라는 요리는 무척 간단한 데다 전날 끓여 두면 더 맛이 좋아졌다.

더불어 앤시아의 조언대로 뚜껑이 무거운 솥에 쌀을 넣고 끓이면 찰기가 도는 밥을 만들 수 있었다.

밥과 미역국은 잘 어울렸다. 사용인들은 어째서 앤시아가 미역국과 밥을 함께 만들라고 한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단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요리가 있었다. 배추나 무를 조리하지 않고 소금을 쳐서 절인 후, 기침이 나올 정도로 매운 고춧가 루를 뿌리는 샐러드는 벌칙 음식처럼 느껴졌다. 앤시아는 그것을 김치라고 불렀다.

“마님께서 김치를 땅에 묻어 두라고 하셨죠?”

“무슨 주술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막상 꺼내 보니 되게 새콤한 냄새가 나는 게… 맛이 궁금해지긴 하네요.”

“어허, 마님께 올라갈 요리에 눈독 들이지 마.”

“하지만 주인님께서 두 명 이상 기미를 보라고 하셨잖아요.”

모두의 시선이 항아리에 든 김치로 향했다. 새빨간 색 탓에 매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게 또 감칠맛이 날 것 같은 반지르르한 붉은 빛이었다. 거기에 새콤한 냄새까지 나니 호기심이 동했다.

“하긴, 너희들도 맛을 알아 둬야 앞으로 요리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한 조각씩 먹어 봐.”

“네, 요리장님.”

“이거 한 장씩 먹는 거예요?”

“그렇게 먹다간 매워 죽을걸.

조금만 먹어.”

저마다 포크로 잘린 김치를 한 조각씩 찍어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매워! 그리고 시큼한 냄새가 나요.”

“그래? 난 새콤하고 달아서 맛있는 거 같은데.”

“스읍. 흐물거릴 줄 알았는데 식감이 괜찮은데요?”

“미역국이 좀 느끼한데 이걸 먹으면 개운해질 거 같… 으아, 맵긴 맵네요.”

그 후로 한참 동안 매운데 맛있다는 소리가 이어졌다.

주방이 점점 더 분주해질 때쯤 하녀들의 아침 일과도 시작됐다.

본채 쪽에 있을 때는 다른 일도 해야 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야 했지만, 탑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앤시아의 방 하나만 관리하면 되었기에 해가 뜬 후 일어나도 충분했다.

욕실에 물을 받고 앤시아를 깨우러 방에 들어서던 엘리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커다란 남자의 등을 보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앤시아가 완전히 가려질 만큼 커다란 등은 엘리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한 듯 조용했다.

엘리는 그가 공작임을 금방 알아봤다. 본채의 부부 침실에 종종 늦게까지 공작 부부가 머무는 경우, 청소를 위해 침실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던 엘리가 본 장면과 똑 닮아 있었다.

침대 옆 바닥에 떨어진 공작의 옷가지나 혹여나 문 쪽에서 누가 들어와도 보이지 않도록 앤시아를 감싼 채 등을 보인 리샤르의 모습은 익숙했다.

단지 하나 의아한 점이 있다면 리샤르가 여전히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매번 리샤르는 사용인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앤시아를 이불로 감싸며 몸을 일으키거나 들어오지 말라는 손짓을 하고는 했다.

미동도 없는 리샤르는 혹시 죽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반응이 없었다. 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자니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르겠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니 문 앞의 호위를 부르기 위해 두드려 소리를 내야 했다.

주인인 리샤르가 진실로 잠든 거라면 깨워서는 안 될 것 같아 선택을 망설이는 사이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엘리는 안심했다. 역시 하녀의 조용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알아채는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는데 앤시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 부를 때까지 쉬고 있을래?”

“앗, 네, 마님.”

리샤르의 어깨 너머로 앤시아의 쑥스러워하는 미소가 티 없이 밝기만 했다. 아무래도 그간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던 공작 부부가 밤새 화해한 듯하여 엘리는 안심했다.

뒤늦게 엘리를 쫓아온 비앙카가 침대 위 두 사람을 발견하고 턱이 빠질 듯 놀랐으나 앤시아의 손짓에 눈치껏 입구로 향했다.

손톱으로 문을 작게 두드렸음에도 이미 다 예상했다는 듯 즉각 문이 열려 엘리와 비앙카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다시 방이 조용해지자 앤시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리샤르의 얼굴을 차분히 살폈다. 항상 리샤르가 먼저 일어난 탓에 잠든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어 신기했다.

대체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리샤르는 앤시아가 얼굴을 만지는데도 깨어나질 못했다. 작은 기척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던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피곤하면서도 새벽까지 앤시아와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다. 느슨하게 눈매가 풀릴 만큼 졸려 하면서도 앤시아를 바라보는 눈은 선명한 푸른빛을 띠었다. 그의 눈 위로 손을 얹고 ‘잘자요. 한마디 한 것만으로도 리샤르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불편해 보이는 정복을 벗기려 끙끙대는 동안에도 리샤르는 깨지 않았다. 팔 밑에 깔린 옷을 빼내기 위해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기를 쓰고 당겨야 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든 리샤르의 품에 다시 자리 잡자 거짓말처럼 그의 팔이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설마 자는 척한 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무의식적인 리샤르의 행동이 기뻤다. 그의 지나친 소행을 짚고 넘어가야 함에도 지금은 오랜만에 느끼는 리샤르의 품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다.

깜박 잠이 들고 하녀의 인기척을 느껴 앤시아가 눈을 뜬 후에도 리샤르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리샤르의 얼굴을 구경하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쩜 이렇게 봐도 봐도 잘생겼을까.

앤시아는 실실 웃음이 나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는지 앤시아는 슬슬 배가 고파졌다. 리샤르를 깨워야 하나 고민하는 데 작은 노크 소리 후 문이 열리고 고소한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매일 아침 식사로 올라오는 미역국과 쌀밥은 앤시아의 식욕을 동하게 했다. 게다가 오늘은 하얀 접시 위에 소담하게 담겨 나온 새빨간 김치가 군침을 돌게 했다.

넓은 방 한쪽에 놓여 있던 식탁과 의자를 중앙으로 옮기고 이 인분의 상이 차려졌다. 리샤르가 거북해할 경우를 대비해 평범한 샐러드와 빵, 고기 요리도 준비된 게 보였다. 앤시아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리장하몬을 향해 웃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갑작스러울 텐데 공작님의 식사까지 챙겨 줘서 고마워.”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만 해 주십시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그럼 간식은 붕어빵으로 부탁해.”

“예, 마님.”

조곤조곤 작은 소리였지만, 사용인들이 오가고 나름 번잡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음에도 리샤르는 여전히 앤시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진귀한지 호위나 사용인은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저도 모르게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두면 24시간이든 48시간이든 죽 잠들어 있을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리샤르를 보며 앤시아는 밥이라도 먹이고 재우자 싶어 그를 불렀다.

리샤르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공작님이라고 부르려던 앤시아는 지난밤 그의 반응을 떠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여보, 식사하세요.”

그러나 잠이 깊게 들었는지 리샤르는 미동도 없었다. 그보다는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평온함을 가장하기 위해 급급해졌다.

주인마님만이 부를 수 있는 친밀한 호칭이 주는 특별함이 사용 인들의 뺨을 달아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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