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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3화 (133/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4화.

대다수가 어서 이 소식을 여기저기 퍼 나르고 싶은 듯 입술이 움찔거리며 공작 부부의 평화로운 아침을 못 본 척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하도 좋아하길래 이 호칭을 쓰면 바로 깨어날 것 같아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정작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섭섭해졌다.

“리샤르.”

조금 투덜대는 심정으로 툭 하니 내뱉은 이름에 앤시아의 허리를 감고 있던 리샤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앤시아.”

나른하게 흩어지는 리샤르의 저음이 답을 해 왔다. 깜짝 놀란 앤시아가 리샤르를 확인하니 졸음이 가득한 그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보이던 리샤르의 풀어진 모습이었다. 아직 잠에 취한 듯 다른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리샤르의 손이 자연스레 앤시아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야릇한 움직임을 보였다.

“저기, 아침이에요. 일어나셔야 죠.”

“조금만 더….”

투정을 부리듯 나른한 리샤르의 목소리와 느릿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만족스러움이 느껴졌다. 앤시아가 흔들어 깨울 때마다 느슨하게 풀린 리샤르의 눈이 어찌나 그윽하면서도 다정한지 자꾸만 몸을 쓰다듬는 못된 손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두고 싶었다.

곤란해하는 앤시아를 보다 못한 비앙카가 슬쩍 트레이를 발로 찼다. 트레이에 올려져 있던 식기들이 흔들리며 작은 소음을 내자 그제야 리샤르는 제대로 몸을 일으켰다.

리샤르는 자신이 눈을 뜬 곳이 앤시아가 머무는 탑 꼭대기라는 것과 벽 쪽에 서 있는 하녀, 호위들의 모습에 내심 놀랐다.

품 안의 앤시아만을 인식한 채 몽롱한 기분에 젖어 있느라 다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여기가 마수의 숲이었다면 팔이 물어 뜯겨 나갔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한 방심이었다.

“가볍게 씻고 아침 먹어요, 우리.”

혼란스러워하던 리샤르는 앤시아의 가벼운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잠을 못 잔 터라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리샤르는 앞으로 조심하자 다짐하며 앤시아가 이끄는 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 후로 한동안 나오지 않는 공작 부부로 인해 아침 식사를 다시 차려 내는 건 하몬과 하녀들 몫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욕실 밖으로 나오자 비앙카와 엘리는 앤시아를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간단한 치장을 했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광이 나는 앤시아의 맞은편에 앉은 리샤르는 식탁 위에 자리 잡은 검은 수프와 새빨간 샐러드를 보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물론 옆에는 평소에 먹던 간단한 아침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으나 최근 매일 앤시아가 이것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던 리샤르는 묵묵히 검은 수프를 바라보았다.

“공작님도 한 번쯤 드셨으면 해서요.”

앤시아는 웃고 있었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건가 싶어 리샤르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지난밤 꽤 긴 시간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핵심이 될만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한 자잘한 수다였지만, 그래도 서로를 끌어안은 시간이 주는 안정감은 리샤르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욕실에서도 서로를 향한 애정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눈앞에 놓인 검은 수프는 앤시아에게 아직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처럼 보여 속이 쓰렸다.

“보기에 좀 그런가요? 거부감이 드신다면 안 드셔도 돼요.”

“아니, 부인이 매일 먹는 거라면 나도 먹겠소.”

앤시아가 권하는 검은 수프를 거부할 수 없었다. 스푼으로 가볍게 휘젓자 미끄덩거리는 감촉의 미역이 스푼에 휘감겼다. 국물만 떠먹을까 망설이는데 앤시아가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맛있게도 수프를 삼켰다. 저렇게 잘 먹는 음식에 리샤르가 거부감을 보일 수 없었다.

각오를 다진 리샤르는 독약 삼키 수프 그릇을 들고 들이켰다.

숨도 쉬지 않고 목으로 넘기는데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입 안에 남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바닷물을 먹는 듯 짭짤한데 고소한 향과 맑은 고깃국의 진함이 느껴졌다. 시커먼 재료는 미끈거리기는 해도 젤리와는 다른 식감이었다. 싫다면 싫은 식감이지만,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에겐 괜찮을 것도 같았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고민하면서 떠올렸던 최악의 맛은 아니었다.

“부인, 혹시 이 요리에 이름이 있나?”

“어머, 당연하죠. 미역국이라고, 우리… 어떤 나라에선 산모가 아이를 낳고 나서 매일 먹는 음식 이에요.”

“그런 중요한 음식이었다니.”

리샤르는 그간 앤시아가 이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 죽 오해해 왔음을 깨달았다. 앤시아는 리샤르를 거부하고자 시커먼 수프를 먹어 온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까맣게만 보이던 미역국이 다르게 보였다.

리샤르는 반도 남지 않은 미역국을 조심스럽게 입 안에 머금고 맛을 음미했다. 다시 먹어 보니 깊은 고소함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입에 안 맞으시죠?”

“낯설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소.”

최대한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리샤르의 반응에 앤시아는 기쁜 듯 웃음을 보였다.

낯선 식단이었으나 늦은 아침 식사 내내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 덕분에 리샤르는 그간 마음으로만 생각해 온 제안을 꺼낼 수 있었다.

“부인, 식사 후 괜찮다면….”

리샤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앤시아는 스푼을 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머리 장식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몇 가닥 땋은 머리와 함께 흔들렸다. 귀여움을 강조하자는 비앙카와 엘리의 주장에 안나가 백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새싹을 닮은 녹안이 어찌나 반짝이는지 리샤르는 매번 아내와 마주할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공작님?”

“나와… 같이 산책을 하지 않겠소?”

“산책이요?”

앤시아는 자신이 탑을 나서려 할 때마다 식은땀이 나고 어지럼증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른 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 리샤르의 진중한 태도나 머뭇거리는 말투를 보면 무척이나 용기를 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샤르의 커다란 손을 보며 앤시아는 그가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두지 않으리란 믿음을 가졌다.

“그래요, 여보.”

스푼이 빈 그릇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리샤르는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공작님?”

“호칭을… 계속 바꿔 부르니 좀 당황했소.”

“싫으세요?”

“아니, 그럴 리가. 마음대로 부르시오.”

“그럴게요, 여보.”

챙강 -

이번에는 찻잔을 들다 놓치듯 내려놓는 소리였다.

앤시아는 ‘여보’라는 호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리샤르가 귀여 워 자꾸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웃음을 감추느라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앤시아를 본 리샤르는 그제야 의도적임을 알아챘다.

부인과 단둘이 대화를 해야 할 것 같군.”

“네?”

조금 놀란 앤시아와 달리 사용 인들은 재깍 알아듣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단둘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난 리샤르가 앤시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갑작스러운 리샤르의 접근에 앤시아는 당황한 듯 눈을 굴리며 사과의 말을 꺼냈다.

“앗, 저기, 공작님. 제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도 하고….”

앤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 리샤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로 코앞에서 본 리샤르는 근심한 점 없이 편안해 보였다.

“부인.”

“네, 공작님.”

“앤시아.”

“… 리샤르?”

“무어라 부르는 상관없어. 그대가 나를 불러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리샤르의 진심에 앤시아의 장난스러운 웃음에도 진심이 담겼다.

둘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어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오늘 산책은 힘들지 않을까. 리샤르의 품에 안긴 앤시아의 몸이 둥실 들려 침대로 향했다.

리샤르가 탑에 머문 지 일주일이 넘어가자 참다못한 보좌관이 세 개의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각하, 더는 미룰 수 없는 서류들이 한가득합니다. 여기 두고 갈 테니 짬이 나면 맨 위의 상자부터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문할 때마다 문이 닫혀 있어 얼굴도 보지 못한 공작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 보좌관은 돌아오지 않는 답에도 착착 상자를 쌓아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리샤르의 품에 숨듯이 얼굴을 묻고 있던 앤시아는 더는 바깥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정말 가 보셔야 하지 않나요?”

“부인은 내가 갔으면 좋겠소?”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니 앤시아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보내고 싶지 않은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리샤르에게 가야 하지 않냐 물으면서도 앤시아는 여전히 품에 안긴 채였다. 리샤르 역시 제 품에 안은 아내를 놓을 생각이 없는 듯 앤시아의 둥근 어깨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허리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저기, 우리 아직 산책도 안 한 거 알아요?”

“그렇군.”

성의 없는 답에 앤시아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 제법 동그랗게 올라오기 시작한 배임을 알아챘다.

“보지 마세요.”

이전이었다면 이 말 한마디에 리샤르는 온갖 상상을 하며 오해 하고 자책하다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앤시아를 품으며 리샤르는 그런 식으로 홀로 오해하는 건 자신은 물론 앤시아를 괴롭힐 뿐임을 알았다. 혼자 고민하고 삭히는 일은 이제 없도록 할 생각이었다.

“어째서?”

이 가벼운 질문 하나를 하지 못해 매번 속을 끓여 왔던 리샤르는 얼굴을 붉히는 앤시아를 보며 걱정이 사그라듦을 느꼈다. 앤시아는 슬그머니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배가 나와서 부끄러워요.”

“그게 왜 부끄럽지?”

“…제 모습이 달라져서 부끄러운 것 같아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오. 후계 자를 품은 아내를 보는 건 감사한 일이지.”

예상하지 못한 리샤르의 반응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리샤르 역시 그런 앤시아를 따라 일어나 앉으며 진중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군.”

“네? 뭘요?”

“고맙소. 나의, 우리의 아이를 가져 줘서.”

리샤르의 진심이 가득 담긴 리샤르의 목소리는 묵직하고 진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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