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4화 (134/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5화.

앤시아는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리샤르가 어떤 의심을 하든 진실이 무엇이든 그는 결심한 것이다. 앤시아가 낳는 아이라면 자신의 아이이자 그윈티드 공작가의 후계자로 인정할 거라고.

설령 완전히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앤시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한발 나아간 리샤르의 감사에 앤시아는 그간 잊고 있던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부인….”

아침 이슬이 맺혀 떨어지듯 소리조차 없었다. 힐다를 만나 기쁨과 서러움이 섞여 울음을 터트렸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요함이었다.

흐느낌도 없이 떨어지는 앤시아의 눈물에 리샤르는 체온이 닿으면 녹아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몇 번을 닦아도 흘러내리는 눈물에 리샤르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아내를 이런 식으로 울게 하였다는 게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리샤르는 목이 멘 듯 억눌린 목소리로 사죄했다.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어.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하느라 우리에게 온 축복을 축하하지 못했소.”

감정이 복받친 듯 서서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고자 앤시아가 고개를 숙이자 리샤르는 더욱 마음이 미어졌다.

“앤시아, 제발. 울지 마.”

리샤르의 간절함에 눈물만 흘리던 앤시아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다. 미약하게나마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떨리며 달싹였다.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당신이었다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어요. 그런데….”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는 리샤르의 손등에 얼굴을 기대며 앤시아는 차분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는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었어요. 공작가에 와서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리고 비앙카가 저를 위해 약을 지어 주지 않았다면…”

원래는 주인공인 비앙카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앤시아는 여전히 허약했을 것이다. 앤시아의 임신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은연중에 원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앤시아는 이런 미래를 꿈꾸지 못했다. 모든 게 활자로 이루어진 세상에 유일한 새로운 존재. 확실한 내 것.

이불로 가린 배 위를 감싸듯 두 팔로 끌어안았다.

“내 아이예요, 리샤르.”

고개를 끄덕이는 리샤르에게 앤시아는 단호하게 알렸다.

“우리의 아이라고요.”

“그래.”

리샤르의 손이 천천히 앤시아의 배로 향했다. 머뭇거리듯 느리면서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탑에 온 이후, 처음으로 리샤르의 손이 앤시아의 배에 닿았다.

앤시아가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

추궁하듯 만진 이후 차마 건드리지 못한 곳이었다. 침실이나 욕실에서 앤시아와 가까이 있을 때도 의식적으로 닿지 않은 곳이었다.

한없이 조심스럽게 부푼 배를 쓰다듬는 손끝이 떨렸다. 처음 만졌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의심을 지우자 낯선 울렁임이 목 안을 간질였다.

“부인의 배 속에 아이, 우리 아이가….”

“네, 우리 아이예요.”

“고마워. 진심으로 감사하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일주일간 애써 피해 왔던 주제였으나 이전보다 가벼웠다.

어느새 눈물은 그쳤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만 가득했다.

***

그날 이후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마수 토벌을 나갈 때가 아니면 반드시 탑으로 돌아와 함께 잠들 것.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의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앤시아에게 먼저 물어볼 것.

이렇듯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규칙이었다.

공작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라는 전제 조건이 붙기는 했으나, 큰 효과를 보였다. 작은 의심이 이성을 갉아먹지도, 음습한 감정이 폭주하지도 않았다.

앤시아에게 직접 물어보고 답을 들을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리샤르는 제멋대로 판단하고 절망하려는 마음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비앙카가 전해 준 노트도 한몫했다. 겨우내 고립된 마을에서 앤시아가 리샤르를 향한 마음과 그곳에서의 일을 상세히 적은 노트였다. 러브레터, 혹은 일기처럼 보이는 노트를 보며 리샤르는 마음을 다스렸다.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앤시아의 배가 눈에 띄게 부풀었다.

조임이 없는 넉넉한 드레스를 입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고 묵직해진 탓에 앤시아의 게으름은 최고조를 찍었다.

푹신한 소파나 침대에 쿠션을 잔뜩 쌓아 기대고 있는 모습은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게으르다는 건 탑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일 뿐, 앤시아는 다양한 일을 해내고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 쌓인 수북한 종이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나는 양식도 없는 쪽지나 편지들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봄 축제는 안 하냐며 궁금해하네요. 축제에 대한 영지민의 기대치가 무척 높은 듯합니다.”

“축제 기간에 수익이 많이 늘어서 그럴 거예요. 그 이후로도 관광객이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면….”

실제로 야경이나 맛집 지도 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만큼 중요한 시기였으나 앤시아의 실종, 납치로 인해 영지 분위기가 얼어붙자 외부 인의 발길이 뚝 끊겼었다.

앤시아가 시무룩해지자 안나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작년에 공작 부인께서 마수 토벌 축제를 성공리에 마치 신 덕분입니다.”

“다들 애써 준 덕이에요. 저는 아이디어만 좀 낸 것뿐인걸요.”

앤시아는 솔직하게 말했으나 안나는 공작 부인의 겸양이 존경스럽다는 듯 뿌듯한 눈을 했다. 그런 안나의 시선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용기를 주었다.

“축제까지는 아니어도 행사 정도는 치를 수 있을 거예요. 참여 의사를 밝힌 가게 위주로 새로운 맛집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연인 코스, 친구 코스, 아이를 위한 스탬프 코스도 만들어서 유도해 보면 좋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시안을 잡아 보겠습니다.”

기꺼이 앤시아의 손발이 될 마음 가득한 안나가 종이를 살피며 분류하기 시작했다. 앤시아가 한숨 돌리려 하자 문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비앙카가 종이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마님, 눈눈 마을에서 새로운 도안을 보내왔어요.”

“벌써? 이전에 부탁한 자수도 예정보다 일찍 보내 주더니 정말 부지런해.”

“마님께서 값을 넉넉하게 치러 주시니 마을 여인들도 신이 난 거죠. 덕분에 험한 산이 아닌 집에서 아이와 함께 일을 할 수 있어 다들 감사하고 있어요.”

이 말의 의미는 아이들 역시 자수나 레이스 뜨기를 돕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서 뛰놀기만 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조만간 선생 역할을 할만한 사람 하나를 보내면 어떨까 고민하던 앤시아는 도안을 받아들고 신중해졌다.

굵은 목탄으로 그려진 터라 번지기도 했고, 어찌 보면 어설프고 투박해 보였으나 이걸 자수로 떠올려 보면 달랐다. 앤시아는 그윈티드 영지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도안을 몇 개 뽑아 비앙카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이 도안으로 샘플을 만들어 달라고 해 줘. 그리고 이전에 발주한 문양 중 동물 모양이 아이들에게 호응이 좋다고 하던데… 스탬프 코스 상품으로 작은 파우치를 주는 것도 좋겠어. 단순해져도 좋으니 크기를 줄여 달라고 전해 줘.”

“네, 마님.”

“아, 그리고 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연필이랑 물감, 종이를 구매해 줘. 도안 그리는 용도랑 아이들이 가지고 놀 거.”

“아이들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전할게요.”

비앙카는 감동하면서도 빠르게 짐을 챙겨 일어났다.

요즘 비앙카는 직접 눈눈 마을을 오가며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였다. 앤시아와 서로 규칙을 정한 이후 리샤르가 비앙카를 노려보는 일이 줄어들었다.

비앙카의 빈자리는 안나가 빈틈없이 채워 주었다. 오히려 너무 애써서 앤시아가 말려야 할 정도였다.

다행히 안나는 저녁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기에 그녀의 열성적인 응원을 적당한 선에서 물릴 수 있었다.

안나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가 방문했다.

“엘리, 비앙카가 외출하는 거 보고 도와주러 왔어.”

“어서 와, 줄리.”

비앙카가 눈눈 마을로 향할 때면 밤마다 엘리 혼자 옆방에 머물렀는데 그럴 때면 종종 줄리가 찾아와 함께했다. 사용인으로 만났어도 친구처럼 지내는 두 사람이 보기 좋았다.

오늘도 줄리의 방문에 반가워하는 엘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앤시아는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급한 일을 끝내고 마음마저 편해져 그런 듯했다.

앤시아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엘리는 눈치 빠르게 쿠션을 빼내고 편히 눕게 도왔다. 그 후 탑 안의 사람들에게 공작 부인이 이른 잠자리에 듦을 알리러 방을 나섰다. 호위와 줄리만이 남아 앤시아를 바라보았다.

앤시아는 오늘따라 줄리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는 듯해 몰려오는 잠을 간신히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줄리는 그런 앤시아를 걱정하며 다가왔다.

“마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바로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몸은 괜찮아. 그보다 줄리.”

가까이서 보니 줄리의 얼굴이 거칠어 보일 만큼 안색이 나빴다. 항상 무표정하여 알아채는 게 늦었다.

“혹시 걱정되는 일이 있어?”

흔한 안부 인사와 비슷한 수준의 가벼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줄리는 딱딱하게 굳을 만큼 강한 반응을 보였다. 앤시아는 그런 줄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망설이던 줄리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려 했다. 앤시아가 줄리의 손을 붙잡아 다정히 두드리지 않았다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있었으리라.

“줄리, 무슨 일이 있다면 말해 주지 않을래?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앤시아는 기본적으로 선하기도 했지만, 가까운 사람에겐 더욱 다정다감했다.

줄리의 마음이 불편해질 만큼.

줄리는 지난 몇 달간 탑 안에만 있는 앤시아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리샤르와 앤시아가 화해한 듯 보이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감금 상태였다.

앤시아와 나단의 행방이 담긴 편지를 뒤늦게 발견되도록 수를 쓴 일이 문제가 됐다. 이를 알게 됐을 때 줄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줄리의 고의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