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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5화 (135/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6화.

불편한 마음을 감추려 줄리는 적당히 집안일을 부풀렸다.

“어머니께서 다리를 다치셨습니다. 어린 동생에게 맡겨 두기가 걱정되다 보니 얼굴에 드러났나 봅니다.”

“어머니가 다치셨어? 그럼 어서가 봐야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밀려있습니다.”

“일은 나누면 돼. 집사장이랑 아서 경한테 도와 달라고 할게.”

“아닙니다. 하녀장이 할 일인걸요.”

한사코 거절하는 줄리의 반응에 졸음이 날아간 듯 또렷한 눈으로 앤시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하면 되잖아. 애초에 공작가 안주인이 할 일을 줄리가 지금까지 도맡아 해 준 건데.”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줄리가 망설이는 사이 앤시아는 더없이 상냥한 얼굴로 서랍 안에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줄리의 앞에서 거침없이 열어 손을 넣고 금화를 한 주먹 꺼냈다. 앤시아가 손을 내밀자 얼결에 양손을 내민 줄리의 손바닥 위로 여러 개의 금화가 떨어졌다.

“이거 가지고 집에 다녀와. 기간은 한 일주일 정도면 될까? 아니, 보름?”

어머니 치료도 하고 동생 교육비나 간식비에 보태.”

“하지만….”

“줄리가 그간 내게 해 준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 정도는 받을 자격 충분해.”

안절부절못하는 줄리를 보고도 앤시아는 태연하기만 했다. 줄리가 떠나지 못하자 앤시아는 뭐라도 더 챙겨 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머니가 심하게 다치신 거면 치유 마석을 챙겨 줄게.”

“아니에요!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황한 줄리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앤시아가 부드럽게 손을 잡아 오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줄리, 미리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해. 어머니가 아프시니 얼마나 걱정이 컸을까. 바로 출발하도록 해.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마님….”

실은 어머니는 가볍게 발목이 삔 정도라고 했다. 그걸 다쳤다는 말로 적당히 포장하려던 줄리는 앤시아의 배려에 안 그래도 불편하던 마음이 더욱 힘들어졌다.

“엘리, 밖에 있어?”

“예, 마님.”

“지금 줄리가 외출해야 하는데 바래다줄래?”

혹여나 줄리가 일하느라 떠나지 못할까 싶어 앤시아는 방으로 돌아온 엘리를 불러 그녀를 배웅하라고 전했다.

가벼운 변명으로 인해 일사천리로 줄리의 휴가가 성사되었다.

줄리는 엘리와 함께 저택을 나설 준비를 하면서도 얼떨떨했다.

앤시아는 항상 순수하고 다정했다.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는 데 한몫을 한 게 줄리라는 걸 모르고 호의를 보였다. 티 없이 맑기만 한 웃음으로 하녀인 줄리를 위로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자신이 황태자의 세작인 것이 부끄러워졌다.

줄리는 정말 급한 일 몇 가지만 처리하고 엘리의 재촉에 간단히 짐을 꾸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운영하는 마지막 공용 마차를 놓칠 수 있었다. 기껏 받은 금화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줄리의 집은 그윈티드 영지에 없었다. 비앙카처럼 깊은 산속은 아니지만, 하루는 공용 마차를 타고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앤시아에게 말한 이삼일은 정말 집에서 하룻밤만 묵었다. 아침에 바로 출발할 생각으로 꺼낸 기한이었다.

줄리는 저택을 나서기 전까지 따라붙는 엘리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꼭 해야 할 일들을 전해 주었다. 그런 줄리를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엘리는 문을 나서기 전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마님에 이어 엘리까지 이러니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미안했다. 버는 족족 집으로 보내는 하녀의 처지가 뻔했는데 뭘 챙겼나 싶어 미안해진 것이다.

“나 거지인 거 알잖아. 이건 마님이 챙겨 주시라고 한 거야.”

“어? 이미 주신 게 있는데?”

“이건 특별한 거. 잃어버리면 안 돼. 꼭 잘 챙겨.”

줄리가 더 묻기도 전에 엘리는 손을 흔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마을까지 데려다줄 사용인 전용 작은 마차에 올라탄 줄리는 엘리가 손에 꼭 쥐여 준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그 안에는 하얗게 빛나는 치유 마석이 들어있었다.

고작 사용인에게 치유 마석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전 공작 부인도 사용인에게 관대했으나 치유 마석을 내준 적은 없었다. 사용인이 큰 상처를 입는 경우 귀족인 의사를 내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배려였다.

급하게 둘러댄 변명일 뿐이었는데 앤시아는 진심으로 줄리의 어머니를 걱정했다.

줄리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죄책감을 느꼈다.

***

사용인들이 지쳐 나갈 정도로 여러 번 조사하고 심문한 끝에 공작가는 제법 깨끗해졌다.

의심 가는 이들을 모조리 내치고 안전이 확보된 후에도 여전히 앤시아는 탑에서만 지냈다.

거의 매일 밤 탑에 와 함께 잠이 들던 리샤르는 그런 앤시아가 걱정되어 다시 부부 침실로 돌아가기를 권했지만 의외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보, 전 당신과 비앙카 말고는 아무도 안 믿어요.”

리샤르는 앤시아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진심으로 놀랐다. 앤시아는 항상 누구든 쉽게 믿어 걱정이었다. 그렇게 보이던 앤시아가 반대로 아무도 안 믿는다니.

리샤르의 놀란 얼굴에 앤시아는 웃음을 보였다.

“제가 사라지고 많은 이들이 저의 부정을 의심했다고 들었어요.

예전 약혼자와 도망갔을 거라고.”

“그건….”

“물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만, 계속 절 믿으려고 노력했잖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엘리만 해도 울면서 고백하지 않았던가. 나를 의심했다고. 그러면서 죄책감 탓인지 딱히 묻지 않은 다른 사용인들에 대한 반응을 상세히 알려 주고는 했다.

“혹시 제 말에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여기서 믿는다의 기준은 황태자나 황제가 저나 공작님께 해를 끼칠 만한 협박이나 수작을 부렸을 때.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 거라면 아서는 믿어도 돼.”

“아, 그러네요. 아서 경이라면 황족의 수작을 곧장 알려 주겠죠.”

긍정하던 앤시아는 리샤르의 얼굴에 깃든 걱정에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엘리도안나도 하몬도 모두 좋아해요.

그들과 잘 지내고 싶고 모두 행복했으면 해요. 단지, 다들 가족이 있고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거예요.”

그제야 리샤르의 걱정 어린 얼굴에 미약한 안도가 깃들었다.

앤시아는 리샤르의 얼굴을 매만지며 덤덤히 중요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오라버니가 보낸 편지와 전서 구가 영지에 도착했는데도 저택안에서 사라졌죠. 다행히 한 통은 줄리가 찾아냈지만요. 나머지는 누가 숨긴 것인지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어요.”

“역시 봐주지 않고 고문을 했어야….”

“아뇨. 세작을 찾아도 또 다른 세작이 움직이면 그만인걸요.”

맞는 말이었기에 리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샤르의 호응에 앤시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함정을 파려고요.”

“함정?”

“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공작님이 절 의심하고 있다는 걸 끝까지 밀어붙이려고요. 그럼 누가 됐든 황가에 이 소식을 알리겠죠.”

리샤르가 최선을 다해 세작을 쳐냈으나 앤시아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앤시아의 뜻을 이해한다는 듯 리샤르는 긍정했다.

생긋 웃으며 앤시아는 크게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전 그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예요. 이 기회에 황태자의 권한을 끌어내릴 생각이니까요.”

“…그 계획 내게도 말할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여보.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밤이 깊도록 부부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

앤시아의 배는 누가 봐도 만삭으로 보일 만큼 커졌다.

여름이 출산일일 것이라 예상했던 의사와 산파가 어쩌면 더 이를지도 모르겠다며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처음 앤시아가 주장했던 대로 봄이 오자 계단을 내려갈 생각은하지도 못할 만큼 배가 잔뜩 부풀어 올랐다.

북부의 늦은 봄이 찾아와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날. 앤시아가 탑에서 지낸 지 반년이다 돼 가는 시기였다.

공작 부인의 첫 출산을 앞두고 모든 사용인의 출입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지난밤부터 해산의 기미가 보인다는 소식에 모두가 긴장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저마다 제할 일을 하면서도 탑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다못해 탑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쪽을 향해 종종 기도를 올리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마석 관리인은 부지런히 치유마석을 별채로 날랐고 기사단은 마수 토벌도 미룬 채 공작가의 주변까지 샅샅이 살피고 경계했다.

어딘지 모르게 번잡스러운 본채 저택과 달리 별채의 탑 주변은 고요했다.

기감이 뛰어난 기사 중 몇몇은 밤새 계속된 공작 부인의 비명에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들은 교대 시간이 되자 걱정하면서도 안도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마수의 비명은 며칠이고 들을 수 있으나 여인의 비명은 도무지 들을 수 없어서였다.

보좌관 역시 급한 일을 가지고 주변만 맴돌다 돌아갔다. 이런 날 예민할 수밖에 없는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 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리샤르는 몇 번이고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가고 싶은 걸 인내하느라 손바닥과 입술이 다 헤졌다.

혹여나 그녀가 잘못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두려울 정도였다.

아이의 머리카락 색 따위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그저 앤시아만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앤시아의 비명이 잦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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