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7화.
무슨 일인가 싶어 리샤르가 눈으로 좇자 의사가 다가와 차분히 상황을 알렸다.
“예정보다 빠른 출산이라면 아이가 작아야 하는데 촉진을 해보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의 산달을 채우신 듯합니다.”
여기서 목을 친다 해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의사를 향해 리샤르는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감정이 최대한 배제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내는?”
“네? 아, 너무 오래 산통을 겪으셔서 많이 지치셨습니다. 그래도 이제 곧 아기님이 태어나실 듯하니 본격적으로 진통이 시작되실 겁니다.”
“이제야?”
이미 몇 시간째 앤시아는 고통스러워했다.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다못한 리샤르가 차라리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고 치유 마석을 쓰면 안 되는지 물었을 정도였다.
의사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곧바로 거절했다. 당장은 준비되지 않기도 했고, 출산 과정이 정상적이라며 리샤르를 진정시켰다.
“공작님께 상황을 알려 드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지금부터는 공작 부인께 집중해야 하니 걱정되시더라도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아내를… 잘 부탁하네.”
그렇게 의사가 방으로 들어간 이후 리샤르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아내의 비명을 들으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토록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앤시아가 비명을 지르는데도 도울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럽다니. 제발 아내에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이 끝나고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리샤르는 인내했다.
그저 누구를 향한 애원인지도 모른 채 한참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주변이 어둑해질 때쯤 의사와 산파를 제외한 모든 이가 방 밖으로 내쫓겼다. 앤시아의 곁을 지켰던 안나와 엘리, 비앙카 모두 지저분해진 앞치마를 갈아입고 리샤르의 뒤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방 안에서 축하의 소리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리샤르가 그들을 저지했다.
“모두 밖에서 대기하라.”
모두 의아해하면서도 리샤르의 말에 한 걸음 물러섰다. 리샤르는 방문을 조금만 열어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는 산파는 천으로 감싼 아이를 안고 있었고 의사는 앤시아를 보살피는 중이었다.
리샤르는 새빨갛게 핏줄이 터진 앤시아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샤르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앤시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보, 우리 아기가….”
“무사해서 고맙소.”
앤시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아오는 리샤르의 눈가가 젖어 있는 걸 보고 놀라면서도 웃음을 보였다.
“아기를 보셔야죠.”
“지금은 그대를 봐야겠어. 많이 힘들었을 텐데 도울 수 없어 괴로웠소.”
“밖에서 지켜 주셨잖아요. 당신이 기다려 줘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두 사람이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의사는 미리 준비해둔 치유 마석을 꺼내 앤시아의 출산 후 상처를 치료했다.
배를 비롯해 통증으로 엉망인 곳은 치유 마석 덕에 고통이 급격히 줄어 앤시아는 빠르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덕에 출산 후 바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린 앤시아가 리샤르에게 머리를 기대며 작게 속삭였다.
“공작님. 이제 실행하셔야 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푹 쉬도록 해.”
“그럼 맡길게요.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요. 아가랑 한숨 자야겠어요.”
앤시아가 손을 내밀자 산파가 아기를 데려와 품에 안겨 주었다. 아직 빨갛기만 한 아기는 산 파가 능숙하게 닦아 냈는지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공작가의 핏줄을 그대로 이어받은 장손이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리샤르의 아이였다. 앤시아를 믿고 있으면서도 그 외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리샤르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간 자신이 보인 추태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당장에라도 앤시아의 발밑에 엎드려 사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지금은 그녀의 말대로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앤시아와 아이를 바라보는 리샤르의 부드럽던 시선이 의사와 산 파에게 향하자 서늘할 정도로 차게 식었다.
“사람은 아이의 성별, 외모에 대해 일체 함구해야 할 것이 오.”
“예? 하지만….”
앤시아의 출산을 앞두고 몇 번이나 주의를 받은 이야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앤시아가 낳은 아이가 공작 부부의 아이처럼 보이지 않을 때만 해당하는 경우라 여겼다.
하물며 앤시아의 백금발과 녹안을 그대로 닮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공표하고 축하받아야 할 일이었다. 리샤르를 똑 닮은 아이이니 감춰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의사의 답이 늦자 산파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저는 눈이 어두워 색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 걱정 마세요.”
“…아기님의 외형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이고, 그냥 알겠습니다~ 하라니까.”
산파가 안절부절 못하며 의사를 타박했으나 소용없었다.
“저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분명 안 좋은 소문이 돌게 될 것입니다.”
의사는 그간 공작 부인을 진료하기 위해 그녀를 자주 봐 왔다.
몇 달 후면 밝혀질 거짓말을 하는 철없어 보이던 첫인상과 달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현명했으며 아랫사람을 아끼는 좋은 귀족이었다. 게다가 출산일은 앤시아의 말대로 봄이었고 태어난 아이도 정상적인 몸무게를 가진 산달을 꽉 채운 모습이었다.
부정 따위는 없었다. 그런 공작부인의 명예에 흠집이 갈 수 있었다.
아이의 외형에 대해 의사와 산 파가 입을 다문다면 필연적으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리샤르는 제게 반발하는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앤시아를 걱정하여 저리 말한다는 걸 알기에 리샤르는 검을 두드리던 손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대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몇 달만 입단속하고 탑 안에 머물도록 해. 그 후에는 넘치도록 보상할 테니 현명하게 행동하도록.”
“예, 예.”
단호하다 못해 서늘한 태도에 의사와 산파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다시 앤시아를 돌아본 리샤르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잠이 든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내의 품에 안긴 아이가 입을 벙긋거리며 울상을 짓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울음을 터트렸는데도 듣기 싫지 않았다. 낮은 듯하면서도 큰 것 같기도 하고 작은 듯하면서도 잘 들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 듣고 싶을 만큼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아기가 우는데도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하는 리샤르의 태도를 오해한 의사가 다가가 아기를 안아 들었다. 리샤르의 다정함이나 관대함은 공작 부인 한정이라 여긴 탓이었다. 리샤르의 시선이 따라붙는 걸 보며 의사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급히 변명했다.
“계속 울게 둘 수는 없어서 달래는 것뿐입니다.”
“조만간 유모를 모집할 테니 당분간만 부탁하지.”
부드러워진 리샤르의 어투에 의사는 당황스러웠다. 의사에게 보모 노릇을 시키는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지만, 줄곧 유모 구하기를 미뤄 온 건 앤시아였다.
이 공작 부부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의사가 달래고 있는 아기를 좀 더 지켜본 후에야 리샤르는 손을 뻗었다. 아기의 머리에 천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고 의사의 등을 돌리게 해 완벽하게 감춘 후 리샤르만 밖으로 향했다. 종일 공작 부인의 출산을 기다린 사람치고 빠른 퇴장이었다.
문밖에서 오매불망 들어갈 순간만을 기다리던 엘리와 비앙카는 리샤르가 예상보다 빨리 방을 나오자 당황했다. 리샤르는 두 사람을 보고 미간을 찌푸린 후 안쪽으로 턱짓했다.
“한 사람만 들어가도록.”
“저요!”
“저, 저도 들어갈게요.”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비앙카가 손을 들자 한발 늦게 엘리도 손을 들었다. 먼저 손을 든 비앙카를 향해 리샤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단. 지금 들어가면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다. 그래도 들어갈 건가?”
“네, 마님과 마님의 아기님을 보살펴 드릴 거예요.”
리샤르를 쏙 뺀 불충한 말이었지만,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에 망설이는 엘리보다는 나았다. 리샤르는 사람 한 명 간신히 들어갈 만큼만 문을 열어 비앙카만 들어가게 한 후 문을 닫았다.
“앞으로 이 문은 내 아내, 공작부인의 요청이 아니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알아들었나?”
“예, 각하!”
호위를 서던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흔들림 없이 답을 했다.
엘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걱정스러웠으나 한기를 풍기는 리샤르에게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리샤르의 선언 이후로 공작가는 또다시 얼어붙었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태어난 축하해야 할 날임에도 의례적인 푸짐한 식사나 넉넉하게 베풀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도 없었다.
공작 부인의 출산을 곁에서 지킨 이들은 며칠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질 못했다. 식사를 전하거나 시트를 갈기 위해 사용인이 찾아오더라도 문 앞에 두고 가야 할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그 탓에 아기의 외모는커녕 성별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상황이 뜻하는 건 명백했다.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 되어야 할 아이.
사용인들 모두가 쉬쉬한다 해도 알음알음 퍼져 나가는 소문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처음 며칠은 그래도 다들 조심하려 애썼으나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다 되도록 탑을 나오는 이가 없자 소문이 점점 부풀어갔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소용없었다. 공작 부인이 낳은 아이가 후 계자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추측성 발언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그래도 아직은 공작가 안에서만 퍼져 나가고 있었으나 소문이 바깥까지 새어 나가는 건 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 엘리조차 출입을 금지당한 탑으로 불려 온 줄리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