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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7화 (13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8화.

전에 왔을 때보다 기사와 병사들의 수가 배는 늘어나 있었다.

그들이 풍기는 진중함은 자신이 나름 담이 세다고 여겨 온 줄리조차 주눅 들게 했다.

앤시아의 방 앞에 멈춰 선 줄리는 문이 열린 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혹 보면 안 될 것을 보게 될까봐 주의하는 행동이었다.

“어머, 줄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줄리는 굳은 각오를 하고 들어왔으나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앤시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저택 안에 퍼진 소문을 떠올리면 식음을 전폐하며 침대에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앤시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줄리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줄리.”

고개를 들어도 되는지 망설이던 줄리는 아기에게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말았다.

앤시아의 품에 안긴 뽀얀 아기와 눈이 마주친 줄리는 숨을 삼킬 만큼 놀랐다. 새까만 검은 머리와 푸른 눈, 그윈티드 가문의 주인인 공작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기였다.

모두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누구도 저 아이가 그윈티드 가문의 장손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줄리가 멍하니 바라만 보자 앤시아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애 좀 봐. 첫애는 아빠를 닮는 다지만 서운할 정도로 꼭 닮은 거 있지.”

살짝 서운한 기색이 묻어난 듯하여 줄리는 무의식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다.

“아닙니다. 아기님의 눈이 커다랗고 웃는 얼굴이 마님과 꼭 닮으셨습니다.”

“정말?”

앤시아의 화사한 웃음에 반응하듯 신이 난 아기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

당황하던 줄리마저 웃게 만들만큼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예, 마님. 방긋방긋 잘 웃으시는걸요. 정말 예쁜 아기님이세요.”

“그치? 원숭이를 낳았나 놀랐다가 하루가 지날수록 어찌나 이뻐지던지. 예뻐 죽겠어, 정말.”

아기를 자랑하는 앤시아가 너무도 행복해 보여 줄리는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줄리를 향해 앤시아가 포대기에 싼 아기를 내밀었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앤시아는 그만큼 더 다가섰다.

“잠깐 안고 있어 줘. 내려놓으면 울어 버리거든. 출출해서 간식 좀 먹으려고.”

“네? 제가 안아도 되나요?”

이미 앤시아는 줄리의 품에 아기를 떠넘긴 후였다. 다행히 줄리에게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이 있었기에 아기를 안는 자세는 익숙했다.

앤시아는 육아를 돕느라 지쳐 구석에 늘어져 있던 비앙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줄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응. 너희가 아니면 내가 누굴믿겠니.”

가벼운 말투였지만 줄리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파졌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바싹 마른 타르트를 집어 드는 앤시아를 보며 줄리는 작은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마님, 요리장이 탑에 머물고 있다. 들었습니다. 새 간식을 드시는 게 어떨까요?”

“아냐. 이 간식도 몇 명이나 맛을 본 후에 방에 들인 거라서 또 뭘 더 해 달라기가 좀 그래.”

기미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앤시아가 마른 타르트를 오독거리는 걸 보는 줄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줄리의 안쓰러운 시선에 앤시아는 손끝의 부스러기를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아직 세작을 다 찾지 못했다고 해. 날 납치했던 것처럼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불안해서 탑을 나갈 수가 없어.”

이제야 줄리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차단하고 최소한만 곁에 두었던 것이다. 그 세작 중 하나가 자신이었기에 줄리는 죄책감에 숨이 막 힐 듯 괴로워졌다.

“참, 어머니는 괜찮으셔? 동생들은 잘 있고?”

“네. 마님 덕분에 잘 지내세요.

치유 마석을 챙겨 주신 덕분에 무사히 나으실 수 있었습니다.”

줄리의 어머니는 편지로 다리를 좀 삐었다고 알려 왔었다. 그러나 막상 집에 가 보니 어머니의 다리는 심각했다. 발끝이 시커멓게 죽어 갈 만큼 퉁퉁 부은 다리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생각해 보면 다리를 삔 것 정도로 연락할 리 없었는데 줄리의 생각이 짧았다. 앤시아가 엘리를 통해 건네준 치유 마석이 아니었다면 발이 썩거나 몇 달은 부목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줄리는 진심으로 앤시아에게 감사했다.

“정말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줄리가 공작가를 위해, 날 위해 열심히 해 준 거 알아. 열심히 해 주는 사람에게 보답한 것뿐인걸.”

티 없이 맑기만 한 앤시아의 웃음을 앞에 두자 줄리는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공작 부인인 앤시아에게 받은 게 너무도 많았다.

그에 반해 황가의 세작 노릇을 하며 줄리가 받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공작가의 하녀로 들어오기 전 줄리는 무척 가난했다. 부모님은 몸이 아파서 일할 수 없고, 줄리가 일해서 동생들과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공작가의 급료가 넉넉한 덕에 형편이 나아지고 공부에 뜻이 있는 동생의 뒷바라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황실 시종이 접근해 왔다. 황태자의 편지 심부름을 해 주는 대가로 평민인 동생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정중히 거절하자 돌아온 것은 쓸모없는 평민을 지워 버리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아느냐는 비웃음이었다.

쓸모없는 평민이 줄리인지 동생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줄리는 어쩔 수 없이 황태자의 세작이 되었다. 세작이라할지라도 편지를 빼돌리는 가벼운 일이니 공작가를 크게 배신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합리화했다.

그러나 최근 황태자의 요구대로 앤시아의 편지를 감추고 공작이 미쳐 가는 걸 보는 동안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가족의 안위만 아니었다면 진실을 알린 후 도망치고 싶을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줄리에게 앤시아는 여전히 올곧은 신뢰를 보여 주었다.

줄리는 품에 안은 가벼운 아기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앤시아의 신뢰가 버거울 만큼 크게 느껴진 탓이다. 한 달만에 처음 불려 온 사람이 줄리 자신이라는 것도 더는 버틸 수 없게 했다.

여기서 더 속이는 건 무리였다.

아카데미를 준비 중인 동생에게는 미안했지만, 평민이 가지기에 애초에 과분한 꿈이었다. 차라리 모든 걸 고백하고 벌을 받거나 가족과 함께 도망치는 게 나았다.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줄리는 무너지듯 앤시아 앞에 무릎 꿇었다.

물론 품에 안은 아기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채였다. 피곤한 듯 늘어져 있던 비앙카가 어느새 줄리의 곁에 다가가 아기를 건네받았다.

소파에 앉은 앤시아는 줄리를 지켜볼 뿐 말이 없었다.

줄리는 고개를 숙인 채 그간 자신이 해 온 일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죄를 고백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해 온 일들이 워낙 단순했기에 할 말은 얼마 없었으나, 죄책감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벌을 받거나 쫓겨나기 전 줄리는 앤시아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뭐든 시켜만 주세요. 마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쓸모가 없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줄리의 고백을 전부 들은 앤시아는 화내거나 놀라워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확인하듯 되물었다.

“역시 편지를 감춘 게 줄리였구나.”

“죄송합니다, 마님.”

“줄리. 이 일은 나 혼자 덮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공작님은 무척 화를 내실 거고 나 역시 줄리에게 실망했어.”

더 변명할 여지가 없었기에 줄리는 고개만 숙인 채 어떤 벌이 내려올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손을 앤시아가 다정히 잡아 오자 줄리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줄리. 정말 날 도와줄 거니?”

“네, 마님.”

“그럼 날 위해 이중 첩자가 돼 줄래?”

“이중…… 첩자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줄리에게 앤시아는 쉽게 풀어 설명했다.

“황태자가 줄리에게 정보를 요구하면 내가 답을 알려 줄게. 그럼 줄리는 황태자의 세작이면서 나를 돕는 거지.”

“아…….”

“양측 정보원이지만, 내게는 솔직하게. 황태자에겐 거짓으로, 들킬 만한 거짓말은 안 시킬 거야.

할 수 있지?”

환한 웃음을 짓는 앤시아를 보며 줄리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는 내가 낳은 아이가 어떤 머리색을 했는지 무척 궁금해 하고 있을 거야. 줄리에게 그걸 묻는다면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면 돼.”

“예?”

“머리색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줄리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내가 아기를 꽁꽁 싸매고 안 보여 줬다고 전하면 돼.”

이런 상황에서조차 줄리를 배려 하는 앤시아였다. 줄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러면 마님께서 오해를 받으실 텐데…….”

“응,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을 뭇거리는 줄리에게 앤시아는 아기 옷가지를 담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를 받아 든 줄리는 조심스럽게 빨래를 들춰 보다 얇은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놀라 앤시아를 바라봤다.

앤시아는 비앙카의 갈색 머리카락을 열심히 뒤져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올을 아기 빨랫감에 붙여 두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줄리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앤시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는 세탁 하녀에게 전달해 줘. 그럼 부탁할게, 줄리.”

앤시아의 배웅을 받으며 탑을 나온 줄리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얼떨떨했다.

세작임을 고백했는데도 벌을 내리기는커녕 너무도 쉬운 일을 부탁했다. 물론 들키면 황태자가 줄리를 가만두지 않겠지만, 앤시아의 말 속에 줄리가 해코지당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줄리는 앤시아의 배려에 감사하며 잘 해내자 마음먹었다.

수많은 기사의 시선을 받으며 줄리는 품에 안은 빨래 바구니를 꽉 움켜쥐었다. 이 빨래 바구니 가 작은 불씨가 되리란 걸 알기에 바람에 먼지 한 올 날아가지 않도록 신중히 움직였다.

***

그로부터 보름 뒤.

황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공작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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