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9화.
이 소식이 전해지기 전, 앤시아는 무료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앙카, 우리 아기 너무 예쁘지 않아?”
“네, 아기님이 너무 예뻐요. 어쩜 이렇게 마님이랑 똑 닮았는지 매일 봐도 예뻐요.”
앤시아가 아기의 뺨에 뽀뽀하고 통통한 손에 손가락을 내어 주며 한참 바라보는 동안 비앙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님, 슬슬 유모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기 보느라 많이 힘들지?”
“앗, 아뇨! 전 괜찮아요. 저보다 마님이 새벽에 몇 번이고 일어나 수유를 하셔야 하니 너무 피곤하실 거 같아서요. 유모가 있으면 밤에 푹 주무실 수 있으니까 안타까워요.”
“응. 나도 빨리 구하고 싶어.”
이놈의 황태자가 아직도 움직이질 않아 골치가 아팠다.
앤시아는 최선을 다해 떡밥을 뿌리고 미끼를 놓았다.
아기에 대한 정보를 감춰 수상해 보이게 하고 유모도 구하지 않으며 버텼다. 귀족이 유모를 쓰지 않는 경우는 여간해선 없었다. 아이에 대해 감추고 싶은 상황이 아니라면.
며칠 전 줄리가 황태자에게 답장을 보냈다고 해서 기대했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오지 않으니 답답했다.
어서 이 상황이 해결되어 아이 이름도 제대로 짓고 싶었다. 방긋 웃는 아기를 보는 동안에는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어 행복했다.
앤시아가 한참 아기와 시간을 보낸 끝에 노크 소리와 함께 기다렸던 소식이 들려왔다.
“마님,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에 앤시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단순편지가 아닌 화려한 겉봉투에 황가의 인장까지 찍힌 정식 초대장이 도착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리샤르는 앤시아가 이미 열어 본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 내용은 특별한 거 없는 의례적인 초청장이었다. 고급 귀족들만 모이는 작은 연회가 있으니 부담 없이 참석해 달라는 내용에 리샤르는 앤시아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부인의 예상대로군.”
“네. 생각보다 늦는다 싶어 걱정했는데 시작은 역시 조촐하네요.”
“답장은 부인이 써 보겠소?”
“아뇨. 공작님께서 다음 주쯤 정중하게 거절 편지를 보내 주세요. 그 전까지는 제 방에 자주 들러 주시고요. 세작이 보기엔 의견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정말이지 그토록 철저히 찾아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충격이오. 게다가 시녀장에 이어 하녀장마저…….”
“황태자가 쪼잔해서 그래요. 얼마나 공작가 일에 관심이 많은지 징그러워요.”
“쪼잔…….”
“쪼잔하죠. 세작 일을 시키면서 금화 한 푼 안 줬다잖아요. 그래서 더 세작을 찾기 힘들었고요.”
황족을 향해 쪼잔하다 표현하는 앤시아로 인해 리샤르의 심각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황족의 권한을 내세우니 평민이 무슨 수로 거절할 수 있겠어요.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억지로 하는 걸 거예요. 로사는 정말 의외였지만요.”
“이번엔 강도 높은 심문을 해서라도 전부 찾아내겠소.”
“그러지 마세요. 죄 없는 이들까지 괴롭히게 될 거예요.”
“죄 없는 부인이 갇혀 지내고 있는 건 어쩌고.”
“좀 답답하긴 해도 괜찮아요.
이번 일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전부 해결될 테니까요.”
앤시아가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안을 걸어 다니는 모습에 리샤르가 그녀의 곁에 다가섰다.
“산책하러 나가는 건 어떻겠소?”
“아니에요. 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황태자를 속이기 더 쉬울 거예요.”
앤시아를 바라보는 리샤르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비쳤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몇 달은 더 방에만 있어야 했다.
감금이냐 칩거냐 어느 쪽이든 앤시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소문은 점점 더 부풀려질 터.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황태자의 초조함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질 것이다.
황태자 쪽에서 공작만이 아닌 공작 부부를, 거기에 아이까지 불러들일 수 있도록 확신을 주어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아기도 백일은 충분히 넘긴 후라 외출도 조심하면 할 만했다.
앤시아가 떠올린 계획의 시작일 뿐이다. 지금은 답답해도 참아야 했다.
“리샤르, 너무 오래 계시면 안돼요. 나가신 후 화나신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부인을 보지 못하는 매 순간 화가 나.”
“조금만 더 힘내요, 여보.”
다정한 호칭에 리샤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앤시아의 계획 중, 리샤르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앞으로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기에 따르기로 했다.
앤시아에게 가볍게 키스한 리샤르는 곤히 잠든 아기의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그 후 앤시아의 예상대로 황태자의 편지는 보름에서 한 달의 텀을 두고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공작 부부의 상황을 에둘러 알고 있음을 알리며 여러 핑계로 초청을 해 왔다. 그때마다 해산 후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공작만 황궁에 방문하겠다.
는 답을 보내자 그럼 다음에 다시 초대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몇 달을 끌자 회유가 아닌 협박에 가까운 초대장이 날아 들기 시작했다. 티파티 수준의 초대는 점점 규모가 커져 기어코 신년제 초대장까지 날아들었다.
여름에 보내는 신년제 초대장이라니. 그것도 황제의 서명까지 적혀 있었다. 황태자가 이 일에 황제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년제에 공개적으로 나서기 곤란하다면, 황족과 독대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다며 마지막 제안을 해 왔다.
신년제에 내로라하는 귀족들 앞에서 추문을 밝히느니 그 전에 황족 앞에 치부를 드러내라는 의미였다.
“공작가를 정말 싫어하는구나, 황태자는.”
줄리가 가져온 편지를 확인하면서도 앤시아는 여유롭기만 했다.
“이번에는 무어라고 답을 할까요?”
“비슷하게 답해 줘. 공작 부인 이 무척이나 초조해한다고, 우는 소리도 들었다고 하면 나을까?”
“네,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황태자는 공작가에 초대장을 보낸 후 줄리를 통해 반응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씩 그럴싸한 분위기를 풍기자 점점 더 대범하게 초대를 해 왔다.
신년제만 해도 그렇다. 여기에 초대될 정도면 황족의 인정을 받은 귀족이거나 친밀한 관계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윈티드 공작은 최근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런 공작가에 신년회 초대장을 보낼 만큼 황태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절대 그 자리에 공작 부부가 나타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황태자는 이렇게까지 할 만큼 공작 부부의 추문을 끌어내는 데 진심이었다.
덕분에 황제를 만나는 일이 수월해졌다. 더불어 황태자의 감언이설에 넘어갈 만큼 황제의 이지가 흐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줄리, 잠깐만 기다려 줘. 금방 답장을 써 줄게. 물론 보내는 건 천천히.”
앤시아는 처음으로 직접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생각해 둔 답장이었기에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약간 불안해 보이도록 중간중간 흔들리는 글씨체를 섞는 게 조금 힘들었을 뿐이었다.
이브 드레스숍의 주인, 이브는 공작가의 방문 요청에 마차 한 대가 넘치도록 샘플 천과 디자인 북을 챙겼다.
최근 몇 달 영지에는 공작 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으나 이브는 개의치 않았다.
사랑스러운 공작 부인을 일 년 가까이 보지 못해 뮤즈에 대한 갈증이 깊어 가던 차였다.
항상 멀리서 봐 왔던 공작가는 그윈티드의 상징처럼 보였다. 이브는 공작가에 가까워질수록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크고 넓은 공작가 안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양쪽으로 늘어선 기사들을 지나 도착한 별채에는 생뚱맞은 탑이 있었는데, 공작 부인이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작 부인은 이브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마담, 바깥 이야기 좀 해 줄래요?”
앤시아의 한마디에 이브는 그녀에 대한 소문 중 일부가 진실이었음을 알아챘다.
공작 부인이 두문불출한다. 같혀 있다. 숨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으나 이곳으로 오는 내내 느꼈던 감시의 시선과 한낱 드레스숍 주인을 반기는 앤시아의 반응은 감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공작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축제 때 아무도 도전하지 못한 새로운 일들을 제안하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수십의 기사들이 무릎 꿇는 앞에서도 의연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 갇혀 있다니.
이브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막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네, 말씀드릴게요. 요즘 영지는 가을 축제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냐며 다들 들떠 있어요.
이게 다 공작 부인께서 만들어주신 관공서 덕분입니다.”
“축제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거예요. 혹시 아이들 소식도 아나요? 잘 지내요?
“예,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아예 아이들을 위한 공용 공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영지민들이 아이를 맡기고 일을 다니기 수월해졌다며 칭찬이 자자해요.”
이브는 비앙카가 내준 다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앤시아가 궁금해 하는 소소한 영지의 일들을 최대한 많이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앤시아를 위해 주문한 새로운 옷감이 있다며 선물하고 싶다는 의지도 비쳤다.
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에 자리를 비웠다.
이브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소문 중 하나가 또 맞았구나 싶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아기 울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으나 옆방에서 나온 앤시아가 천으로 감싼 아기를 안고 나오는 모습에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문이 맞았다면 저 아기를 절대 보아선 안 될 일이었다.
“마담, 혹시 아기 옷도 지을 수 있을까요?”
“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제가 봐도 되는 걸까요?”
조심스러운 이브의 질문에 앤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