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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39화 (13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0화.

“음… 얼굴은 안 봐도 되죠?”

“예, 예. 아기님 몸에 손을 대도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눈을 감고 손의 감각으로만 치수를 잴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한 살도 안 된 아기가 걸어 다닐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오차는 고려하고 만들어야 했다. 이브의 제안에 앤시아는 다행이라는 듯 포대기에 싼 아기를 안고 다가왔다.

“그럼 마담, 미안하지만 이대로 만져서 확인해 줄래요?”

“예,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잠깐 실눈을 뜨긴 했으나 포대기로 얼굴까지 거의 덮어 둔 터라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봐봤자 소문을 확인하면 마음만 어지러우니 이브는 눈을 꼭 감았다.

무엇보다 이브의 눈을 따로 가리지 않는 공작 부인의 순수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런 여인 이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직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브는 손의 감각만을 이용해 아기의 팔 길이나 몸통 넓이 등을 확인한 후 수치를 기입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으나 집중한 탓에 이브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힘든 일 부탁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언제쯤 어떤 일로 입히실 건지 말씀해 주시면 어울리는 의상 디자인을 보여 드리러 오겠습니다.”

“음……. 일단 다음 달이랑 신년제 때 입을 게 필요해요.”

“신년제라면 거의 반년 뒤이니 치수가 좀 달라질 것 같은데, 다시 방문을…….”

말을 잇던 이브는 흐릿해진 앤시아의 미소에 괜스레 죄책감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두 가지 치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드레스를 만들어야 할까요?”

이브는 아기의 성별을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상을 알 수 있으면 그에 맞춰 천을 고르기 더 쉬울 텐데 그것까지는 차마 역린 같아 묻지 못했다.

성별에 대해서는 앤시아도 답을 해야 한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는 안 돼요.”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남자아이였음을 알게 된 이브는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나 소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리샤르를 보고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놀랐다. 공작은 공작 부인의 옆에 섰으나 차가운 시선으로 이브를 바라보았다.

소문의 한복판에 맨몸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이브가 긴장한 걸 알아챈 앤시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브, 우리는 황궁에 초대를 받았어요. 우리 부부와 내 아이.

세 사람이 함께 어우러질 옷을 지어 주세요.”

너무도 커다란 폭탄 같은 소식에 이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년제라고 했어도 공작가에서 있을 파티 정도로 짐작했다. 게다가 앤시아는 아이를 지칭할 때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브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최대한 디자인 쪽으로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를 믿고 주신 기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앤시아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이브를 통해 어느 정도 정제된 소문이 퍼지기를 기대하며 겉으로는 애매한 웃음을 보였다.

이브의 성정을 보아 앤시아에 대해 변명을 해 주거나 입을 다물 터. 공작가에 다녀온 디자이 너가 편을 들거나 침묵하면 소문은 더욱더 안 좋은 쪽으로 치우칠 것이다.

“혹시나 해서 남성복 디자인도 가져왔는데 다행입니다. 드레스를 먼저 고른 후 거기에 맞춰 색과 장식을 고르시면 어떨까요?”

“전부 맡길게요. 마담의 안목을 믿어요. 항상 절 생각해서 만들어 주잖아요.”

디자인 북을 펼쳐 보이던 이브는 앤시아의 믿음에 감격한 얼굴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브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앤시아는 아이의 얼굴을 가린 얇은 천을 서둘러 올렸다. 다행히 얼굴에 닿지 않게 공간을 만든 덕에 답답한 기색도 없이 그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리샤르 역시 이브 앞에서의 차가운 얼굴이 아닌 풀어진 얼굴로 아기를 바라보다 지쳐 보이는 앤시아에게 시선이 향했다.

“부인,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요. 아무래도 절 좋아해 주는 사람을 이용하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요.”

“저자는 옷을 만들고 부인은 옷을 의뢰한 것뿐이오. 그리 마음쓸 것 없어.”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아요.”

앤시아의 쓴웃음에 리샤르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이번 일이라면 나도 함께 사과하지.”

“네? 공작님이요? 제가 벌인 일인데 공작님까지 나서실 필요는…….”

“부인의 남편이니까. 언제든 곁에 있을 거요.”

“…여보.”

강한 친밀감을 느낄 때만 나오는 호칭에 리샤르는 앤시아를 성공적으로 위로했음을 확신했다.

앤시아의 뜻대로 어서 이 지긋지 긋한 일들이 끝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녀와 아기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

가을이 깊어 가는 계절에도 황궁은 보온 마석으로 인해 봄과 같이 따스했다.

황족의 옷이 가벼운 이유였으며 상시 꽃 내음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정원의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런 온화한 환경 속에서도 황족들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제1 황태자이자 후계자로 지목되어 탄탄한 앞날이 약속돼있는 카일루스 드미트리는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을 부족하다 여겼다.

아직 살아 있는 황제가 걸림돌이었고 그윈티드 또한 매우 거슬렸다. 정치적으로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그윈티드는 다른 귀족들의 마음 한쪽에 최강 무력의 가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카일루스는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그윈티드 공작가에 대해 자주 들어왔다.

북부를 지키는 최강의 검이자 방패. 전쟁터에서 적들이 이름만 들어도 항복할 만큼 두려워했던 전쟁의 신.

마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적국보다 마수를 상대하게 된 이후에도 최전방에서 굳건히 버틴 자.

피에 미친 공작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매일같이 검을 휘두르며 마수가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어릴 때는 자신도 공작처럼 검을 잘 쓰고 싶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궁에 찾아와 시범검술을 펼친 또래인 소공작, 리샤르의 예기 어린 검을 보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검 앞에 선 것도 아닌데 어깨너머 목격한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웠다.

그건 황태자인 카일루스에게 너무도 생소한 감각이었다. 두려움은 부끄러움이 되었고 착각이었다며 부정하게 되었다.

한때는 공작가의 기사단을 제것으로 하고 싶어 욕심을 내기도 했다. 정작 황궁에 들어온 북부의 기사들은 황궁의 웅장함에 잠깐 혹했다가 하나같이 리샤르와 북부를 그리워했다.

황태자를 앞에 두고도 잘도 리샤르를 칭찬하고 마수를 베어 넘기던 공작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그런 기사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아 적당히 아무 곳에나 배치했다.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변질되어가는데도 공작가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했다.

황태자에게 한때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어느 순간 경계하게 됐고, 시기와 질투를 지나쳐 이제는 손안에 두고 감시하지 않으면 못 견딜 만큼 집착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석의 판매를 제한하고, 조그만 틈만 보이면 참견하며 공작가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매번 수긍해 왔다.

아직도 견딜 만한가? 이래도?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돌덩이를 찔러도 이것보다는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어일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랬던 공작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결혼 후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혹시나 하고 사주한 납치가 이루어진 후 여러 세작을 통해 들었던 공작의 소식은 그도 감정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골랐지.”

고작 여인 하나에 흔들리고 괴로워하다니. 여인쯤이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이건만 얼마나 숙맥이면 그러할까.

리샤르의 감정을 폄하하며 그의 사랑을 비웃었다.

공작의 아내가 함께 납치된 후 견인의 아들과 바람이 났다는 소식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통쾌했다. 그 잘난 그윈티드 공작께서 한낱 소백작에게 아내를 빼앗기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정말이지 납치범에게 포상을 내리고 싶을 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태어난 아기가 공작을 조금도 닮지 않으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공작 부인이 탑에 갇히고 이른 출산 후에도 외출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황태자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세작들이 보내온 소식을 종합해 보면 아이의 머리카락은 갈색.

성별은 남아. 공작가의 첫 장손이 부모 중 누구도 닮지 않은 갈색 머리를 가졌다는 소식에 카일루스는 어서 그들의 치부를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처음에는 귀족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시작하려 했으나 공작의 정중한 거절 편지는 합당하였기에 다음에는 좀 더 큰 규모의 파티 초대장을 보냈다.

마수 토벌을 핑계로 거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년 이상 기간이 남은 신년제의 초대장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황제에게도 서명을 받아 냈다.

이미 오랜 시간 독차를 마셔 온 황제의 눈빛은 흐렸고, 카일루스의 속삭임에 느릿하게 서명을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황제의 최후를 기대하며 카일루스는 공작가에 초대장을 보냈고 드디어 긍정적인 답장을 받았다.

세작을 통해 새 의상을 맞췄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혹여나 중간에 아이를 바꿔치기할까 봐모든 세작에게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라 일러둔 터였다. 다행히 공작 부인과 아이는 황궁 방문일인 오늘까지도 탑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차 보였어도 고작 한미한 가문의 계집일 뿐. 공작의 씨가 아닌 아이를 안고 얼마나 떨고 있을까.”

축제 때 이름을 허락했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황태자와 공작 부인이 불륜 관계인 것만으로도 공작은 상당히 괴로워했을 터.

어쩌면 이번 기회에 달콤한 말로 위로하면 공작의 냉대에 지친 공작 부인이 쉽게 이름을 허락할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가 버린 패였지만, 앤시아 정도의 미모라면 한번쯤 품는 것도 즐거우리라.

카일루스의 즐거움이 지나쳐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폴칸이 그런 황태자를 더욱 기쁘게 할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전하, 북부 게이트를 통해 그 윈티드 공작 부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함께 왔다고 합니다.”

카일루스의 잘생긴 얼굴에 기이 해 보일 만큼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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