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1화.
폴칸의 말대로 북부와 통하는 게이트 앞에 정식 절차를 밟은 그윈티드 공작 부부가 나타났다.
북부의 귀족들을 촌뜨기로 취급해 왔던 황궁의 궁인들은 공작부부의 기품 있는 모습에 감탄했다.
워낙 거리가 먼 데다 북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그윈티드와 황가의 사이가 나쁘다는 걸 알기에, 평소 북부 귀족들은 여간해선 황궁에 방문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황궁에 올 때도 그들은 묵직해 보이는 두꺼운 옷감에 어두운 색의 옷차림을 하고 나타나 비웃음을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어린 황족들과 함께 게이트를 넘어온 공작 부부가 로브를 벗어 내자 한없이 가벼운 옷차림이 드러났다.
천의 색감은 단조로운 흑백의 대비였다. 그러나 공작의 검은 제복과 공작 부인의 하얀 드레스에는 반짝이는 은색 실로 섬세한 자수가 들어가 있어 되레 시선을 끌었다. 자칫 잘못하면 심심해 보일 수 있는 옷이 화려해 보일만큼 집요함이 엿보였으나 기본 베이스가 무채색이라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게다가 공작 부부의 외모는 황족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공작이야 몇 번 황궁에 방문한 일이 있어 아는 이가 있었지만, 공작 부인이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인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반짝이는 은색 자수가 들어간 하얀 드레스가 저리 잘 어울리는 순수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여인은 보기 드물었다.
공작 부부의 외형이 너무도 눈길을 끌어 앤시아가 안고 있는 베일에 가려진 아기에게는 시선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의 아름다움에 익숙한 시종은 공작 부부를 보고도 의외라고만 여기며 그들을 안내하기 위해 다가섰다.
“카일루스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
초대는 분명 폐하의 친필 서명까지 적혀 있었지.”
여기서 왈가불가하며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다는 듯 리샤르는 초대장까지 꺼내 보였다.
은근슬쩍 황태자에게 먼저 데려가려던 시종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시기 지루하실 듯하여 잠시 모시려 했던 것뿐이니 오해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국의 태양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할 리가 있겠습니까.”
상냥하지만, 그 안에 시종을 나무라는 의미가 담긴 앤시아의 말에 시종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원칙대로라면 초청을 한 황제를 먼저 만나는 게 맞는 일이었으나,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다른 황족들과 친분을 쌓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공작 부부는 그런 건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굴었다.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같은 말을 계속해야 하나?”
지금까지 무표정하기만 하던 리샤르에게서 소름 끼칠 만큼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시종은 더 권유하기를 포기했다. 차라리 익숙한 카일루스의 짜증을 감당하는 게 나았다.
황궁 안을 마차로 이동하고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화려하고 넓은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거대한 문 앞에서 시종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부터는 초대받은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안으로 들어가 기다려 주십시오.”
“수고했어요.”
시종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앤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 안은 아기를 살폈다.
게이트를 타기 전, 앤시아는 혹여나 아기에게 게이트 이동 후유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마석을 가까이하는 북부인에게는 후유증이 거의 없다고는 하나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기에 걱정이 컸다. 다행히 게이트에 들어서기 전부터 잠들어 있던 아기는 황궁에 도착해서도 평온했다.
“다행히 잘 자네요.”
마담 이브가 아기를 생각해 얼굴을 가리면서도 답답하지 않게 동그랗게 띄울 수 있도록 재단한 베일은 필요에 따라 한 겹, 두겹으로 나눌 수 있었다. 두 겹일땐 이목구비조차 보이지 않았고 한 겹만 두면 희미하게 구분이 될 정도였다. 이브의 배려가 고마웠다.
‘돌아가면 꼭 감사 인사를 해야지.’
그런 앤시아를 바라보는 리샤르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힘들지 않소?”
“이렇게 많이 걸을 줄은 몰랐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고 가면?”
“공작님이 안으면 울잖아요. 아, 혹시 저랑 아기를 다 안고 가시겠다는 건 아니죠?”
부정하지 않는 리샤르를 보며 앤시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작게 터진 웃음이었으나 황궁을 방문할 때면 늘 짜증이 나 있던 리샤르에게 행복하다는 감정을 불러올 만큼 사랑스러우면서도 청량했다.
리샤르의 몸이 앤시아에게로 기울자 눈치 빠르게 한 걸음 앞서 갔다.
“안 돼요. 아직 저희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은 참도록 하지.”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내를 곁에 두고도 참아야 하는 게 힘겨웠다.
앤시아는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가고는 있지만, 만에 하나 틀어 질까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자신과 달리 걱정도 하지 않는 리샤르의 대범함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알현 장소 앞에 도달하자 여기서 얼마든지 기다리라는 듯 고급스러운 소파가 놓여 있었다. 한참 걸어와 다리가 아팠던 앤시아는 곧바로 소파에 앉으려 했다.
“기척이 느껴지는군.”
“네?”
리샤르가 앤시아를 감싸듯 뒤로 숨기며 알려 주었으나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리샤르가 바라보는 쪽을 쳐다보니 문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앤시아가 리샤르와 문을 번갈아 보기를 몇 차례 한 후에야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근위기사의 표본 같은 기사와 누가 봐도 공주님 소리가 나올 만큼 품위 있는 여인이었다.
앤시아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리샤르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 보고 따라 인사를 건넸다.
“2황녀 샬롯 드미트리 전하를 뵙습니다.”
샬롯 드미트리. 황가를 상징하는 외형이 아닌 탓에 후계자 경쟁에서 배제된 비운의 여인. 그렇기에 황태자 카일루스의 경계 대상이 아니었고 그 덕에 황제와 매일 티타임을 가져왔음에도 제 재 받지 않았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는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오늘 앤시아가 계획한 여러 가지 루트 중 하나 이기도 한 샬롯의 등장에 일이 잘 풀리겠구나 싶어 웃음이 절로 났다.
“반갑네. 그윈티드 공작.”
샬롯은 목소리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리샤르에게서 앤시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가벼운 동작에서도 우아함이 철철 넘쳐났다.
샬롯의 시선에도 앤시아는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심 가득했으나 순수해 보이는 앤시아의 웃음에도 샬롯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대신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정말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군.”
언뜻 비친 감정에는 애처로움과부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샬롯의 감정이 나단에게 향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앤시아는 그녀가 잠시 의아했으나 곧 칭찬에 칭찬으로 응수했다.
“황녀님도 제가 만나 뵌 분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아첨은 싫어하지만, 그대의 순수한 목소리는 진실로 포장하는 재주가 있군.”
샬롯의 말만 들으면 희미한 적의가 담긴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으나 그녀의 눈에 깃든 부러움이 그렇지 않음을 알려 주었다.
샬롯과 앤시아가 서로를 빤히 보고 있자 리샤르가 조심스럽게 개입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몸으로 막아서자 자연스레 샬롯의 시선이 리샤르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무슨 일이십니까?”
카일루스 전하께서 모든 형제자매를 불러 모으시니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카일루스는 가장 먼저 리샤르의 치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공작 부부가 그걸 거절하고 곧장 황제에게 갔으니, 그렇다면 가장 많은 이들 앞에서 드러내게 하고 싶었으리라.
황제와의 만남에 아무나 들일수 없으니 형제자매를 불러 보는 눈을 늘리려는 듯했다.
‘와, 쪼잔. 진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네.’
앤시아는 세상 유치한 황태자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샬롯의 시선이 처음으로 공작부부가 아닌 앤시아의 품에 안긴 아기에게로 향했다. 아기의 얼굴에 베일이 드리워져 볼 수 없었으나 샬롯의 시선에 담긴 건 호기심이 아닌 걱정이었다.
앤시아가 부러 잘못된 소문을 부풀리도록 의도했기에 샬롯 역시 공작 부부의 상황을 좋지 않은 쪽으로 접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여인인 앤시아의 부정을 혐오하거나 동정하기보다 아기에 대한 걱정만을 비쳤다.
그 모습을 본 앤시아는 확신했다. 원작에는 몇 줄 나오지 않는 황태자보다도 더 언급이 없던 황녀 샬롯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황제는 황태자조차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제2 황녀는 매일 황제와의 티타임을 가지며 온갖 보약을 권하고는 했다.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황녀는 꾸준히 함께 섭취하며 황제의 건강을 위해 애를 썼다.」
책을 읽었을 땐 후루룩 넘겼던 부분이었고,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필사적으로 내용을 복기할 때도 앤시아에게는 의미 없던 구절이었다.
그러나 원작에 없던 황태자가 공작가에 개입을 시작한 이상 단 한 줄의 정보라도 중요했다.
앤시아는 혹여나 오늘 황제와의 만남이 불발될 경우 샬롯을 어떻게든 만나고자 했다. 이렇게 황태자가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 놓칠 수 없었다.
앤시아는 황녀를 향해 살짝 아기를 들어 보였다.
“안아 보시겠어요?”
“지금 그대의 의중을 떠봐야 하는가?”
다른 이였다면 앤시아 역시 아기를 건네주는 걸 망설였을 테지만, 샬롯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안심됐다.
“저는 샬롯 전하를 오늘 처음 보았지만, 조금은 알고 있어요.”
의아해하던 샬롯은 나단의 존재를 떠올렸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단이 자신의 이야기를 앤시아에게 했다고 여겼는지 부드러워진 눈빛을 보내며 손을 내밀었다.
앤시아는 샬롯에게 아기를 넘겨 주며 아래쪽을 받칠 수 있게 자세를 잡아 주었다.
아기를 받아 들던 샬롯은 앤시아가 의도적으로 손이 닿게 한 곳의 부스럭거리는 감촉에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앤시아는 알아채서 다행이라는 듯 생긋 웃었다.
“샬롯 전하. 아무래도 북부의 추위만 생각하고 아기 옷을 두껍게 입혀 온 듯합니다. 검을 잡는 신사분들의 손은 너무 억세서……. 전하께서 도와주시겠어요?”
감히 황녀에게 손을 빌려 달라는 앤시아의 뻔뻔한 태도에 함께 온 근위기사의 근엄하던 얼굴이 흐트러졌다. 리샤르는 그런 기사를 노려보며 시선을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샬롯은 손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의 감촉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